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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대승경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초기경전도 대승경전도 부처님의 원음(原音)

오늘은 정토경전을 포함하여 대승경전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다 아시는 것처럼 현대 불교학의 연구는 대승경전이 역사적 실존인물인 석가모니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른바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의 입장입니다. 대승경전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직설(直說)이 아니라는 것만으로, 대승경전에 의지하는 불교신행에는 문제가 있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정토신앙이 그다지 폭넓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도 그 밑바닥에는 이러한 대승비불설론이 미치는 어두운 영향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경전에만 의지하면 불교는 교종
불교는 결코 언어에만 있지 않아
원음은 석가모니 체험과 깨달음

초기경전만 원음이란 것은 모순
모든 불교는 깨달음에 대한 해석
초기·대승 서로 모순적이지 않아

대승경전은 불설이 아니라는 의미로 번역되는 ‘대승비불설’의 입장에서 보면 ‘정토삼부경’은 불설이 아니게 됩니다. 그러면 불설은 무엇일까요? 바로 초기불교 경전입니다. 역사적 실존인물인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셨기 때문입니다. 한역 ‘아함경(阿含經)’이 그것이고 팔리어 니카야가 그것입니다. ‘아함경’은 물론 지금은 니카야도 다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아함경’이나 니카야에 담긴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은 우리 불자들이 의지하고 살아가야 할 성스러운 말씀입니다. 이 점은 분명합니다. 이 점을 부인한다면, 그 사람은 결코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분명히 한 바탕 위에서, 지금까지 불교학의 상식처럼 되어 있는 한 이야기에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원음(原音)에 관한 것입니다. 흔히 불자들은 말합니다. “부처님의 원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가리키는 ‘원음’은 무엇일까요? 바로 ‘아함경’, 니카야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우리는 ‘원음’을 이렇게 밖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요? 저는 이미 ‘불교해석학연구’에 실린 마지막 논문에서, 그러한 원음 이해가 잘못임을 지적하고서 새로운 원음 이해를 제시하였습니다.

만약 초기경전만이 원음이라고 본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하지 않았다고 하는 대승경전은 원음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 문제점입니다. ‘정토삼부경’을 비롯한 대승경전이 불신을 받거나 평가 절하되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원음 이해 때문입니다.

두 번째 문제점은 그렇게 경전의 말씀에서 원음을 찾게 된다면 그것은 불교를 교종(敎宗)으로만 국한하고 말 위험이 있게 됩니다. ‘교종’이라고 할 때 ‘교’는 바로 언어문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불교가 언어 문자에만 있다라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동의할 수 있습니까? 이 물음에 동의할 수 없는 분은 이제 비록 역사적 실존인물인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하신 초기경전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곧 원음이라는 식의 이해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불교는 결코 언어 문자에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어문자 이전에 ‘그 무엇’이 있습니다. 저는 원음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제게 있어서 원음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 언어 이전의 깨달음이 원음입니다. 이렇게 볼 때 불교는 비로소 교종으로 국한되지 않고 그 이전에 선종(禪宗)을 놓게 됩니다.

제가 지금 선종과 교종을 말씀드리고 있는데 선종은 종교경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교종은 종교경험에 대한 해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아함경’, 니카야의 형태로 남아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초기경전(편집이나 전승 과정에서 아무런 문제가 설사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은 원음이 아니라 원음에 대한 해석으로 봅니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그러므로 원음은 체험이고 깨달음입니다. 이는 사실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깨닫지 않는 한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설사 우리가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제3자에게 또 전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저의 원음 이해는 선종적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불교가 불교다운 것은 즉 다른 종교나 철학과 다른 것은 어쩌면 이렇게 언어문자에서 원음을 찾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것을 우리는 또 얼마나 자랑해왔는지요?

그런데 그런 자랑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원음을 초기경전이라고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원음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원음을, 수학의 미지수처럼 모른다는 뜻에서 ‘X’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원음이라고 해왔던 초기경전의 가르침 역시, 석가모니 부처님 스스로에 의한 원음 해석이라고 봅니다. 원음 자체가 아니라 원음에 대한 해석이라는 의미에서 ‘X’에는 어떤 한정이 붙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저는 숫자로 표현해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X1’이라고 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흔히 학자들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내용을 ‘연기’라느니 ‘중도’라느니 ‘사성제’라느니 하고 있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바로 깨달음의 내용이 아니라 깨달음에 대한 해석이지요. 혹은 당신이 깨치신 그런 깨달음으로 우리 중생들이 나아갈 수 있도록 제시해 준 길(방법론)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원음 ‘X’를 보신 분은 깨치신 분은 정녕 다만 한 분, 역사적 실존이 인정되는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밖에 안 계셨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것이 믿음이라 봅니다.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불교학은 성립 불가능한 것 아닐까요. 그 뒤에 대승경전을 실제로 제작하신 분들 역시 원음 ‘X’를 보았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대승경전 중에서도 ‘정토삼부경’의 저자들은 원음 ‘X’를 보고서는 그에 대한 해석으로 ‘X10’을 말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 X10’이 ‘정토삼부경’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저는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경전을 포함한 모든 불교문헌에는 원음을 본 견자(見者)들의 해석만이 들어가 있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해석이 이루어지던 당시의 시공간적 맥락이나, 그 해석을 들을 사람이 놓여있는 시공간적 맥락이나 역량, 즉 근기(根機)에 대한 배려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이 맥락이나 근기를 저는 ‘C(ontext)’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결국 불교경전 내지 불교문헌은 “Sn = Xn + Cn”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초기경전이 “S1 = X1+ C1”이라고 하고 ‘정토삼부경’이 “S10 = X10 + C10”이라 해 봅시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초기경전이나 대승경전이나 모두 원음 ‘X’에 대한 해석인데 그 양자에는 공히 해석된 형태로 원음 ‘X’가 다 들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 양자는 한 목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를 이렇게 보는 이해방식을 일음교(一音敎)라고 합니다. 초기불교와 정토불교가 다 일음입니다. 이렇게 볼 수 있다면,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은 선택적이지도 않고 모순적이지도 않습니다. 서로 대립하거나 싸울 일이 없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저는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의 화쟁론(話諍論)’(‘보조사상’ 제34집)에서 논의한 바 있습니다. 이 길이 초기경전도 살고 대승경전도 사는 길이라 봅니다. 이런 식으로 대승경전을 이해할 수 있다면 정토신앙을 보는 눈 역시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김호성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lokavid48@daum.net
 


[1413호 / 2017년 1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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