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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 김호성의 정토행자 편지
윤회의 길, 극락의 길“억겁 어둠도 빛 들어오는 순간 소멸”
김호성 교수  |  lokavid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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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05  11: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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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을 이야기하면 꼭 윤회를 생각하게 됩니다. 윤회나 극락이나 모두 다 내생의 일이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극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윤회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불교학계입니다. 불교학자들 중 극락을 연구하는 분들은 매우 드물지만 윤회를 연구하는 분들은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윤회를 둘러싸고 여러가지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윤회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저 역시도 윤회를 논하는 분야의 불교학, 예를 들면 초기불교나 부파불교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히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상식적인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불교만이 아니라 정통 인도종교라고 할 수 있는 바라문교나 힌두교에서도 윤회를 이야기한다는 것, 윤회와 함께 이야기되는 것이 업(karma)이라는 것 정도입니다. 여기서 업이 나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업 역시 바라문교나 힌두교에서도 말하지만 불교에서도 중요한 교설입니다.

윤회를 의혹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도 업에 대한 불교의 입장까지 의혹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모든 행위에는 결과가 있다”는 것 말입니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라 할 수 있는데 부처님께서는 그 당시의 다른 종교인들로부터 “늘 업을 말하는 사람(業說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할 정도입니다.

업을 긍정하게 되면 원인에 대하여 그 결과를 받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시간적인 한계입니다. 금생에 지은 업을 금생에 다 받지 못하고 다음 생애로까지 그 결과를 받는 시간이 연장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윤회설이 성립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습니다. 아마도 이 문제가 윤회설 연구에 불교학자들을 끌어들이는 원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누가 윤회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른바 윤회의 주체 문제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입장이 영원히 존재하면서 소멸하지 않는 주체라고 할 수 있는 것, 즉 ‘아(我)’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무아를 말하면서 다시 윤회를 인정한다면, 과연 무엇이 윤회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무아설과 윤회설은 서로 모순되는 것 아닌가 이래서 갖가지 학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여기서 말씀드릴 형편이 못 됩니다. 제가 잘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정토신앙과 관련하여 윤회를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거기까지 안 가도 될 듯해서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윤회와 극락은 공히 내생의 문제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윤회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극락 역시 인정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차피 내생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그 이상 공통점은 없습니다.

여섯 갈래로 나누어지는 윤회의 세계에서 제일 좋은 곳이 천상(天上)이라 말합니다. 하늘입니다. 천상은 오직 즐거움만 있는 세계라 하지만 그 역시 윤회의 세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즐거움을 받을 원인이 다 소진하고 나면 다시 윤회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반면 극락은 윤회의 세계가 아닙니다. 윤회를 벗어난 세계입니다. 성불의 과정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성불의 길에서 본다면 극락을 간다는 것은 제8지에 들어가는 일이 됩니다. 제8지는 십지(十地) 중에 여덟 번째입니다. 그 위로는 제9지, 제10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다시 등각(等覺)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경지나 거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 등각 다음 단계가 묘각(妙覺)입니다. 묘각은 바로 부처님의 경지입니다.

제8지를 다른 말로 하면 부동지(不動地) 또는 불퇴전지(不退轉地)라고 합니다. 아비발치(avivartika)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이름에 이미 뜻이 들어있습니다만 제8지에 이르면 더 이상 물러나지 않습니다. 후퇴가 없기 때문에 점차로 제9지, 제10지, 등각을 거쳐서 마침내 묘각에 이르는 것은 다만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 한 번으로 제8지로 들어간다는 것, 올라간다는 것은 돈법(頓法)입니다. 점법(漸法)이 아닙니다. 돈법이라는 점에서, 염불은 선(禪)과 통하는 바 있습니다.

‘관무량수경’에서는 “한 번 염불로 80억겁 동안 생사윤회를 하면서 지은 죄를 다 소멸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그럴까? 이렇게 의혹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은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해서 마련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오래 묵은 어둠이라도 빛이 들어오는 바로 그 순간 다 소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불하는 사람에게는 윤회가 없습니다. 더 이상 윤회하지 않습니다. 단 한 번의 “나무아미타불” 염불로 80억겁 동안 생사윤회를 하면서 지은 죄업이 다 소멸됩니다. 그런 까닭에 염불하는 사람은 윤회를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윤회와 함께 극락을 생각할 때 하나 더 확인해 두어야 할 점은, 윤회의 주체와 같은 문제는 극락왕생의 경우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해 준 분은 바로 잇펜(一遍) 스님입니다.

잇펜 스님의 정토사상 역시 독특한 바 있습니다. 이 분은 시종(時宗)이라는 정토문 종파의 개조로 추앙받고 있는 분인데, 정토종이나 정토진종과 같은 다른 정토문의 종파들과 비교할 때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명호를 더욱 중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지 않는 정토문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중에서도 잇펜 스님의 명호에 대한 생각은 질적인 깊이를 더했다고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다른 수행법들 사이에서 경쟁을 하면서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해야 한다고 설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아미타불” 그 자체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점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이 한 마디를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나무”도 버리고 “아미타불”도 버리면서 해야 한다고 잇펜 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무”는 염불하는 중생 스스로이고, “아미타불”은 염불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입니다. 그 모두를 잊고 “나무아미타불”이라 외우라는 것입니다.

중생도 있고 아미타불도 있으면서, 중생이 아미타불을 염하는 것은 올바른 염불법이 아니라고 봅니다. 참된 염불에는 중생도 없고 아미타불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중생도 버리고 아미타불도 버리면서 하는 염불 속에서 남는 것은 그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소리 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제 우리는 또 주목하게 됩니다. 윤회의 주체를 둘러싸고는 많은 논의가 있지만 극락왕생의 주체는 문제되지 않는다는 점. 아니 왕생의 주체는 없습니다. 있다면 “나무아미타불”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극락왕생은 무아(無我) 왕생이고 중생도 아미타불도 모두 탈락된 탈락(脫落) 왕생입니다. 이렇게 잇펜 스님의 왕생사상은 초기불교(무아)나 선(탈락)과도 통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김호성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lokavid48@daum.net
 


[1418호 / 2017년 12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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