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낭산 중생사터 (狼山 衆生寺址)
5. 낭산 중생사터 (狼山 衆生寺址)
  • 임석규
  • 승인 2018.03.20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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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토속신과 불교의 만남 확인 가능한 신비의 땅

▲ 낭산출토 석조보살입상(국립경주박물관소장).

“서기 413년 8월의 일이었다. 신라의 궁궐 동남쪽에 있는 낭산에 신비로운 구름이 피어올랐는데 마치 궁궐의 누각같이 보였다. 향기도 짙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실성왕(實聖王)(402~417)은 이 광경을 보고 ‘저 곳은 분명히 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니는 곳이니 복 받은 땅일 것이다’ 라고 하였으며 이후 이곳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하였다.”

‘삼국사기’ 권3 실성니사금조(實聖尼師今條)

왕실에서 신에게 제사 지냈던
신라의 진산 경주 낭산에 위치

일제강점기부터 절터 정밀조사
마애삼존불 등 4구의 불상 발견

절터 문화재 외부 반출하면서
지하유구 조사는 한번도 안해


신라는 경주 주변 세 개의 산에서 큰 제사(大祀)를 지냈는데, 낭산은 그 중 한 곳이다. ‘삼국사기’에는 “나라의 큰 제사를 삼산에서 거행하였는데, 삼산은 나력산(奈歷山), 골화산(骨火山), 혈례산(穴禮山)이다”라고 되어 있어서, 이 세 산이 가장 중요한 영산으로서 모셔진 것을 알 수 있다. 이 중 나력산은 신라 6부의 하나인 습비부에 있다고 하였는데, 습비부는 현재 경주시 동남에 있는 낭산 주변이고, 나력산은 바로 현재의 낭산(사적163호)이다.

신라 사람들은 낭산을 ‘신들이 노니는 숲’이란 뜻의 신유림(神遊林)이라 부르며 신성시했으며 일찍부터 신라의 진산(鎭山)으로 여겨왔다. 그래서인지 들판 한가운데에 솟은 구릉같이 낮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낭산에는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낭산의 남쪽 봉우리 아래에는 647년에 죽은 선덕여왕릉과 681년에 죽은 문무왕을 화장했다고 하는 능지탑(陵旨塔)이 있다. 능지탑의 북쪽으로 추정 중생사터가 넓게 분포하고 있는데 ‘낭산여신’이라고 추정되는 마애삼존상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 문무왕 때(661~681) 명랑 스님이 밀교비법을 써서 당나라 군대를 격파한 호국사찰로 유명한 사천왕사터는 낭산의 남단에 있다. 그리고 동쪽 기슭에는 최근 발굴조사가 진행되며 전모가 드러나고 있는 신라왕실의 원찰 황복사터가 있다. 황복사는 진덕여왕 6년(652) 의상(625~702) 스님이 출가한 곳이고, 헌강왕 원년(875)에는 선왕 경문왕을 화장했던 곳이다.

▲ 낭산출토 석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국립경주박물관소장).

그런데 신라의 산신들은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삼국유사’ 김유신조에는 김유신(595~673)이 젊은 시절 고구려 간첩 배석에게 잡혀 위험에 빠지려는 찰나 삼산의 신이 모두 나타나 김유신을 구했으며, 그들의 모습은 젊은 여성이었다고 되어있다. 즉 신라의 산신은 왕이나 백성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역할뿐 아니라 장차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가장 큰 역할을 하게 되는 김유신을 구해주는 호국신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생김새는 젊은 여성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여신이 살던 낭산이 불교 성지가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삼국유사’ 흥법(興法) 제3 아도기라조(阿道基羅條)에는 경주가 현세의 부처인 석가모니 탄생 이전부터 부처님의 나라였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전불시대(前佛時代)부터 있었던 일곱 사찰을 나열하고 있다. 흥륜사, 영흥사, 황룡사, 영묘사, 분황사, 담엄사와 함께 낭산의 사천왕사를 언급하였으며, 문호왕 법민조(文虎王法敏條)에서는 679년 문무왕이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세웠다고 했다. 늦어도 7세기에는 불교신앙과 아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신산으로서 모셔진 것이다. 그리고 8세기가 되면 낭산에서 불교가 활짝 꽃피우게 된다. 이같은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 추정 중생사지 주변에서 발견된 불교문화재들이다.

낭산이 위치하고 있는 경주시 배반동 640-1번지 일원에는 ‘배반동사지’라는 절터가 남아있다. 이 절터는 ‘삼국유사’에 자주 등장하는 중생사의 옛 터라고 여겨지는 곳이며, 지금도 이 터에는 중생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이 절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그 중생사와는 관계없는 현대 사찰이다.

▲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1917년 제작한 ‘조선고적도보’ 속 석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

절터에 대한 조사는 일제강점기부터 이루어졌는데, 당시 사역 내에 남아있던 다수의 소재문화재를 소개하고 있다. 1917년에 발간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는 ‘낭산석조보살(狼山石造菩薩)’의 사진이 실려있는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석조십일면관음보살상이다. 1931년 간행된 조사보고서에는 ‘낭산마애삼체상(狼山磨崖三体像)’이 보고되어 있고, 1933년 간행된 ‘동경통지(東京通誌)’에도 낭산 서록 마을 내에 마애삼존상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대형 석조보살입상과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석조약사불좌상도 이 절터에서 발견된 불상들이다. 정리하면 추정 중생사지에는 여신을 표현했다고 생각되는 마애삼존상과 석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 1구, 석조관음보살입상 1구, 석조약사불좌상 1구 등 총 4구의 상이 있었는데 그 중 3구는 국립박물관으로 이동되었고 절터에는 이동이 불가능한 마애상만이 남아있다.

먼저 마애삼존좌상은 현 중생사 서쪽의 암반에 남향으로 새겨져 있다. 이 상의 공식명칭은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보물 제665호)이다. 과거에는 본존상의 존격을 머리에 두건을 쓴 피모지장보살(被帽地藏菩薩)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본존상의 머리를 잘 살펴보면 앞머리와 양 어깨에 걸쳐진 수발(垂髮)에까지 두발 전체에 가는 선으로 머리카락을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두건을 쓴 것이 아니라 여성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는 상이다. 게다가 양 손과 발을 노출하지 않은 점 등 형태면에서 일본 교토 마쯔오타이샤(松尾大社)의 목조여신좌상과 매우 닮아있다. 그러나 이중원광의 광배와 통견식으로 입고 있는 가사, 가부좌의 좌법 등에서 명확하게 불교에 귀의한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본존의 좌우에는 갑옷을 입은 신장좌상이 배치되어 있다. 사천왕사의 건립과 함께 7세기부터 사천왕신앙의 중심이 된 낭산에 불교에 귀의한 산신의 협시로 이천왕을 배치한 것이 그리 부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조성시기는 8세기로 추정된다.

▲ 낭산출토 석조약사불좌상(국립경주박물관소장).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 1층에는 석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이 전시되어 있다. 이 보살상은 발견 당시 낭산 마애삼존상의 남측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고적도보’에 반출 이전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어 세키노 타다시(關野貞)가 낭산 일원을 조사하던 1909년 무렵에는 절터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1937년 이후부터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고, 두부와 팔 등이 보수·접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보살상의 현재 높이는 약 199㎝이며 대좌는 결실되었다. 두부와 하반신에 보수한 흔적이 있으며, 왼팔도 새로 조성한 것이다. 신라의 십일면관음보살상으로는 8세기 중엽에 제작된 석굴암의 상을 비롯해 굴불사지 사면석불의 팔이 여섯 달린 상이 유명하다. 그런데 이 상들이 2차원의 부조(浮彫)인 것과 달리, 박물관에 있는 상은 뒷면까지 모두 새긴 환조(丸彫)인 점에서 신앙뿐만 아니라 조각적으로도 중요하다.

국립경주박물관에는 또 한 구의 관음보살입상이 야외에 전시되어 있다. 큰 키에 높은 보관을 쓰고 왼손에는 정병을 잡고 있는 석조보살입상이다. 원래 이 상의 두부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현장에서 반출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었고, 동체부는 경작지에 매몰된 채 상체만 노출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보살입상의 동체부는 1978년 7월 경상북도 문화재위원회 비지정석조문화재 조사반이 처음 정밀조사하였고, 조사 결과 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던 보살 머리가 이 보살상의 몸과 결합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1997년 보살상의 몸을 박물관으로 옮겨와 머리와 결합시켜 현재의 모습으로 전시하고 있다. 이 보살상은 전체 높이가 360cm에 달하며 불신의 높이만도 3m가 넘는 대형보살상이다. 보살상이면서도 위엄을 지닌 당당한 모습으로 표현한 점에서 8세기에 조성된 상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 탑상 제4 삼소관음중생사조(三所觀音衆生寺條)에는 중국의 화공이 신라 중생사에 와서 보살상(大悲像)을 조성하였는데 백성들의 공경과 기복의 대상이 되었다는 기록과 함께 관음상이 신통력을 발휘하였던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관음보살이 앞에서 언급한 두 보살상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이름 모를 이 사찰이 8세기에는 관음신앙의 성지였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 낭산마애삼존상의 본존.

석조약사불좌상은 낭산 석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반출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불상의 유물등록상황을 살펴보면 1914년 이왕가박물관이 스즈키 슈지로라는 일본인으로부터 구입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후 이왕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을 거쳐 1981년 6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되어 현재에 이른다. 이 불상은 왼손에 약기를 들고 있어서 약사불로 판단되며 약사신앙이 유행하던 9세기에 조성한 상으로 추정된다.

신라식 신불습합(神佛習合)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 마애삼존상이 원위치에 남아있고 신라에서 가장 거대한 관음보살상과 유일한 환조의 석조십일면관음보살상이 봉안되었던 이 사찰의 정체에 대해서는 그리 알려진 바가 없다. 사찰의 범위는 어느 정도 되는지, 사찰의 이름이 무엇인지, 언제 창건되었는지 등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의 단편적인 기록과 절터에서 반출된 문화재를 통해 몇 가지 정황을 유추해 볼 뿐이다. 아쉬운 점은 일제강점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절터에 있던 석조문화재를 옮기면서 단 한차례도 지하유구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를 실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상들이 반출된 원위치와 현재 사찰 경내를 포함한 지역에 대한 정밀학술조사가 이루어졌을 때 신라의 진산이었고, 신라인들이 가장 신성한 지역으로 생각한 곳에 입지했던 이 사찰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이산가족이 되어버린 불·보살상들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상상을 해본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장 noalin@daum.net

 

[1432호 / 2018년 3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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