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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맞춰 사는 삶

기자명 성원 스님

입춘 한파·폭설 속 다례재 참석
먼저 떠난 도반 빈 자리 지키며
오고감에 여여한 삶 돌이켜봐

춘분이다. 입춘이 한참 지났으니 봄이 깊어도 한참 깊어야 할 때이다.

입춘에 때아닌 한파와 폭설이 몰아쳤다. 마침 강원 졸업 도반스님들의 모임이 있어 육지로 나갔더니 가는 날이 장난이랄까 추워도 너무 추웠다. 궂은 날씨에도 많은 스님들이 모였다. 벌써 유명을 달리한 스님이 세 분이나 계셔서 매년 해제 후 모여 다례재를 올린다. 생각해보면 스님들은 정말 흔적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 같다. 누군가 후손이 있어 거둬 주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함께 수학한 도반들이 살아 있으니 차라도 한잔 대접받을 뿐이다.

죽음 후의 단출함을 생각하다 보면 삶도 이렇듯 단아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어도 쉽지 않다. 누구나 장수를 꿈꾸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오래 산다는 것도 그리 행복한 일만은 아닌 듯하다. 언젠가 본 다시(茶詩)에 “좋은 벗 하나둘 보이지 않고, 새로운 벗 사귀기 힘이 드는구나” 라고 노래한걸 봤다. 친한 도반들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먼저 간 도반들에게 차를 챙겨 올리게 된다면 오래 산다는 게 무한히 행복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인생에도 적용되나보다. 재를 마치고 공양이 끝나자 벌써 떠날 차비를 하는 도반들이 있었다. 눈발 때문이 아니었다. 바빠도 너무들 바쁘게 산다.

불자들은 자주 ‘스님이 뭐 그리 바쁘세요? 라고 한다. 그 말에 출가 본연에 충실하지 못하고 또 다른 일상이 되어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바빠져 버린 삶의 언저리에서 그저 씁쓰레할 뿐이다.

대부분의 도반들이 오늘처럼 길을 나선 것이 아니라 되돌아오지 못할 길을 이렇듯 춘설 가득한 날 다 떠나 버린다면 남은 사람들은 오래 산다는 의미만으로 진정 행복할 수 있을까? 삶의 일상에 쫓기어 떠나버린 도반들의 뒷자리에서 바라보는 설중매(雪中梅)도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장수만이 복된 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때늦은 추위와 백설로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도 하지만 힘들어한다. 때맞추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또 힘든 일인지를 알 것도 같다. 부처님의 명호 열가지 중에 여래(如來) 와 선서(善逝)라는 명호가 있다. 진리의 세상에서 여여히 오셨다는 말이요, 깨달음의 세계로 잘 가신 분이라는 뜻이다. 오시고 감에 있어 그 때를 잘 맞추는 삶이야말로 여여한 삶이 아닐까 생각된다. 때를 맞추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결코 여여하지도 잘 한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때를 맞춰 일하고 시(時)를 맞춰 살피는 것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입춘에 내려 잠시의 흥만 돋우고 많은 피해를 입히기만 하며 춘설같이 사라져가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떠나야 할 때를 알기는 정말 어려울 것이다. 떠날 날은 그만두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더욱 큰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자꾸 나의 삶과 지금 머무는 내 자리가 때에 잘 맞지 못한 춘설의 모습이 되지 않을까 주의스러워진다.

▲ 성원 스님

 

지금 이곳의 삶이 최고의 삶이요. 지금 이곳에 머무는 생각이 가장 아름다운 생각이다. 이 순간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깨달음을 이루어 여래와 선서의 이름으로 불리지는 못해도 하는 일이나 만나는 사람들과 그때를 잘 맞추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더는 것을 보니 나도 제법 오래 살았나 보다.

제주에 다시 돌아오니 차가운 봄비가 한창이다. 우리가 아무리 저항해도 남으로부터 밀려오는 따스한 봄기운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나 보다. 서둘러 산사로 떠난 도반들에게 남국의 따스한 봄기운을 간절히 전해 주고 싶다.

성원 스님 약천사 신제주불교대학 보리왓 학장 sw0808@yahoo.com
 

[1433호 / 2018년 3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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