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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정토신앙은 방편인가?

“초기불교든 대승불교든 모두 방편일 뿐입니다”

▲ 보물 제766-1호로 지정된 ‘법화경 권 4~7' 중 변상도 부분. 문화재청 제공

저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극락을 말하는 정토신앙은 방편(方便)이라고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방편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전이 ‘법화경’일 것입니다. ‘방편품(方便品)’이 있을 정도입니다. 거기에서 말하는 요점은 ‘법화경’이 설해지기 전에 많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설해졌는데 그것들은 다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소승의 성문(聲聞)들에게는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이, 연각(緣覺)에게는 12연기가, 마침내 대승의 보살에게는 여섯 가지 바라밀이 설해졌다는 것입니다.

법화경에 일불승만 있을 뿐
소승도 대승도 없다고 말해
방편이 부정적으로 보이지만
삼승의 가르침이 일불승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포용

부처님의 가르침 전체가 방편
방편이라면 모두가 방편일 뿐
문제는 정토신앙 국한 않고
방편, 부정적으로 쓰고 있는 것

방편이 아닌 진실은 한 가지로 부처 되는 길(佛乘) 하나만이 있습니다. 이른바 일불승(一佛乘)만이 있을 뿐, 소승도 없고 대승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모두 부처가 되고 만다는 것이 ‘법화경’의 입장입니다.

얼핏 본다면 방편은 부정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일불승의 가르침에 비한다면, 그렇게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일불승의 가르침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후대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천태종에서도 논란이 일었습니다. 대승의 가르침인 여섯가지 바라밀이 곧 일불승
의 내용인가, 아니면 대승 외에 다시 일불승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입장은 다르지만 하나 공통적인 것은 대승과 일불승 사이에만 연결고리를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3승을 열어서 1승으로 돌아간다고 말할 때는 3승 모두를 살리는 방향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일불승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3승의 가르침 그대로가 곧 일불승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포용하는 방법이 나옵니다.

이렇게 본다면 ‘방편’이라는 규정 자체만으로 반드시 하열(下劣)한 것이라고 볼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성문이나 연각들에게 그들의 근기에 맞는 가르침을 제시하지 않고 곧바로 수준이 높은 가르침을 제시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은 팔만대장경 전체가, 부처님 가르침 전체가 방편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방편이라고 한다면 다 방편입니다. 그것들은 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달’만이 진실일 것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그 손가락이 엄지이든 검지이든 무관하게 다 방편입니다.

그렇습니다. 다 아시겠습니다만 ‘달’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부처님 가르침 안에서 어느 것은 더 높고 어느 것은 더 낮다고 보는 관점(교판)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다 상대적인 평가일 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것이 초기불교이든 대승불교이든 무엇이든 다 방편일 뿐입니다. 방편이라는 점에서 값어치는 같습니다.

제가 ‘불교해석학’이라는 책의 다섯 번째 논문에서, 부처님의 ‘원음(原音)’이 초기불교 경전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풍조를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방편이 어찌 ‘원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진실만이 ‘원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깨달음이라는 진실만이 원음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원음은, 진실은 우리의 깨침이라는 경험입니다. 그 경험은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법화경’에서 ‘유불여불(唯佛與佛)’이라고 한 것도 그런 것을 나타냅니다. 방편으로는 알 수 없지요.

따라서 부처님의 깨달음만이 진실이고 다른 경전의 말씀들은 모두 방편이라고 했습니다만, 생각해 보면 부처님의 깨달음조차도 방편일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의 깨달음만이, 내 자신이 깨달을 바로 그 순간의 경험만이 진실이라고 할 때, 그 모범이 되는 부처님의 깨달음 역시 모두 방편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효 스님의 화쟁(和諍) 논리에 따른다면, 진실이라고 본다면 모두 진실입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만 ‘법화경’의 일불승의 논리에서는 성문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되살아납니다. 일불승으로 되살아납니다. 연각이나 대승의 보살승 역시 일불승 안에서 되살아납니다. 방편으로서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서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방편이 진실로서 되살아날 수 있는 것은 어째서일까요? 방편이 방편으로서 제 역할을 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극락세계나 아미타불의 존재가 방편이라고 하더라도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 어떻습니까? 그러한 극락세계나 아미타불이 중생들로 하여금 번뇌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업을 짓는 것을 막게 하고 고통을 벗어나서 부처가 되는 길로 나아가게 한다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 외에 다시 불교가 더 목적으로 삼는 것이 있는 것일까요?

부처님께서 ‘전유경(箭喩經)’에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다음 세상에 여래는 태어나는가 아닌가? 육체와 영혼은 하나인가 아닌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어느 한쪽의 대답을 제시하지 않은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그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올바른 방편 노릇을 못한다고 보셨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문제들에 대해서는 침묵하셨습니다. 마찬가지 논리가 극락세계나 아미타불에 대해서도 주어질 수 있을 것으로 저는 봅니다.

극락세계의 존재에 대해서, 아미타불의 존재에 대해서 그것을 문제로 삼는 것이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존재를 차라리 방편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대로 좋은 일입니다. 오히려 더 철저하게 방편으로 밀고 나가면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러한 방편은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되는 방편일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할 수 있을 터이니까요.

이제 다시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 보지요. 제 주변의 지인들이 제게 와서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어떤 분들이 말하기를 극락세계나 아미타불의 존재를 말하는 것은 방편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런 것입니까?”

문제는 방편이라고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은 논리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방편이라면 방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표층적인 것이 아니라 심층적인 데 있습니다. 그분들은 대개는 방편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정토신앙에 대해서만은 아닙니다. 불교 전체에서 방편이 갖는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곳에 문제가 있습니다. 자! 여기서 다시 우리는 ‘법화경’의 논리로 돌아가 봅시다. 성문에게는 사성제를, 연각에게는 12연기를 설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 부처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극락과 아미타불이 필요한 근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에게는 그것이 방편으로서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을 포장지에 ‘방편’이라고 써서 전할 것입니까? 경허 스님은 ‘편찬(偏讚)’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경전마다 그 경전에서 주장하는 바를 주관적으로 치우쳐서 찬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믿음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방편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포장지에는 ‘진실’이라고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바로 방편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진실은 성불에서만 찾아질 수 있고 왕생 역시 바로 그렇게 성불하는 길이라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고 “나무아미타불”은 왕생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호성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lokavid48@daum.net
 


[1434호 / 2018년 4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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