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헨리 8세의 정치와 종교
61. 헨리 8세의 정치와 종교
  • 김정빈
  • 승인 2018.04.09 16: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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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사사롭게 탄생했지만 공공이익 컸다”

▲ 그림=근호

영국 튜더 왕조는 헨리 7세(1485년 즉위)로부터 시작된다. 헨리 7세는 왕위를 두고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이 싸움을 벌인 이른바 ‘장미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튜더 왕조를 세웠다.

이혼·재혼 반복한 헨리8세
민심 혼란 속 국교도 바꿔

저마다 다른 교회법 제정
기독교 내 여러 교파 생겨

말썽 속 탄생한 성공회지만
나이팅게일, 투투주교 등
위대한 인물 배출 하기도


그는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요크와의 사이에서 두 딸과 두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딸 메리는 18살 때 자신보다 나이가 서른두 살 많은 프랑스 왕 루이 12세와 결혼했고, 둘째 딸 마거릿은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4세와 결혼했다.

헨리 7세의 첫째 아들인 아서는 일찍 죽었기 때문에 둘째 아들인 헨리가 왕위를 이어받아 헨리 8세가 되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형수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스페인 왕 페르디난드와 왕비 이사벨의 딸이었다.

헨리 8세로부터 첫 번째로 신임을 받은 신하는 토머스 울지였다. 헨리는 그에게 거의 전권을 맡기다시피 했다. 울지는 왕의 친한 친구이자 요크 대주교, 대법관, 추기경으로서 영국을 좌지우지했다. 그는 차기 교황 자리를 노리고 있었는데, 헨리 8세는 그의 야심을 은근히 지지하고 있었다. 그가 교황이 되면 잉글랜드에 여러모로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에 카를 5세가 즉위하자 유럽의 상황이 일변했다. 스페인, 부르고뉴(네덜란드 포함), 오스트리아의 왕권이 그에게 집중됨으로써 프랑스를 제외하면 그와 겨룰 만한 나라가 없게 된 것이다. 헨리는 카를 5세의 제권을 위한 전초기지를 자임했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 때문에 영국은 다른 나라들과의 동맹관계를 훼손하고 말았던 것이다.

국내에서도 헨리의 인기는 하락하고 있었다. 국민의 불만이 높아지자 울지는 민심을 달래기 위해 의회 소집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의회가 동의해준 과세액은 왕실이 필요로 하는 액수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특별세를 거두려던 시도도 포기되었다.

왕에게는 개인사가 개인적인 범주에 국한되지 않는다. 헨리 8세의 경우에는 아라곤의 캐서린이 왕자가 아닌 공주를 출산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공주가 왕위를 이어서는 왕조를 안정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 헨리 8세는 마음이 초조했다.

몸이 아픈 데다가 왕자를 낳지 못하는 캐서린에게 싫증을 느끼고 있는 그에게 앤 불린이라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총명하고 재치있는 성격으로 어렸을 때 프랑스 궁정에서 예법을 배웠고, 프랑스어와 라틴어에 능숙했다. 1521년, 앤 볼린은 잉글랜드로 돌아와 헨리 8세의 정비 캐서린의 시녀가 되었다.

헨리 8세는 세련된 기품이 있는데다가 화술까지 뛰어난 그녀를 유혹하려 했지만 앤은 정식 결혼을 요구했다. 왕비 캐서린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고 있던 헨리는 젊은 앤과 결혼을 하여 그녀에게서 왕자를 낳기를 원했다. 문제는 그러려면 캐서린과 이혼을 해야 하는데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교황이 그것을 허락할 것인가의 여부였다.

우여곡절을 거쳐 이 문제는 영국 법정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다. 처음에 법관직을 수행한 켐페노 추기경은 헨리 8세의 혼인을 무효로 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화가 난 헨리 8세는 법무를 주관하던 울지를 쫓아냈고, 그 뒤를 토마스 모어가 이어받았다. 하지만 결론이 나지 못한 상태로 여러 해가 흘렀고, 그동안 영국은 혼란에 혼란을 거듭했다.

1532년, 토머스 크롬웰이 대신회의를 주도하면서 분위기가 변했다. 결과적으로 크롬웰은 종교를 혁명한 셈이 되었다. 그의 주도로 영국 교회는 로마 교황 아래에서 분리해 나와서 영국 왕의 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로마 교회의 수위권자인 교황은 유럽의 모든 왕을 영적인 문제를 앞세워 통어해 왔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새로 제정된 법에 의해 영국 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모시는 영국 국교로서의 성공회가 출범하였다.

1533년 1월,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결혼하였으며, 그해 5월에 새로 대주교가 된 토머스 크랜머에 의해 헨리의 첫 번째 결혼이 무효로 판결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 9월, 앤 불린은 헨리 8세의 기대를 저버리고 왕자가 아닌 공주를 출산했다. 헨리와 앤 사이에 태어난 공주가 영국의 번영을 끌어낸 훗날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다.

이후 앤 볼린은 유산을 거듭했으며, 그러는 동안 헨리의 앤에 대한 애정은 차가워졌다. 왕의 눈길은 앤의 시녀 제인 시무어에게로 옮겨갔고, 시무어를 지지한 크롬웰이 앤의 추락을 부추겼다. 1536년, 앤은 간통, 반역, 근친상간, 이단 혐의로 런던탑에 감금되었다. 증거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화형을 언도받고 참수되었다.

비록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일지라도 승려들의 모임인 승단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세속적 단체이다. 출가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탐진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승려들이 모인 사회에서도 탐심과 탐심, 진심과 진심, 치심과 치심 간의 충돌이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율장은 그 충돌을 조절, 해소하여 본래 목표인 진리 추구에 힘을 모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이다.

종교 교단에 진리를 추구하는 면과 세속적인 사회라는 면이 병존하는 점은 기독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점은 종교의 세속 면을 다루는 기독교의 교회법이 후대의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불교의 경우 기독교의 교회법에 해당되는 율장을 부처님께서 직접 제정하셨지만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는 이에 대한 아무런 가르침도 남기지 않았다. 그 결과 저마다 다른 교회법을 제정함으로써 갖가지 교파가 생겨났다.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는 교리상에서도 나타나지만 교회법에서도 나타난다. 그 점에서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해 나온 성공회는 교리 면에서는 개신교의 일파로 볼 수 있지만 교회법으로 보면 가톨릭 요소가 적지 않다.

성공회의 탄생에는 사사로운 목적을 가진 정치 권력자 헨리 8세의 역할이 매우 컸다. 탄생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공회는 에큐메니컬 운동을 주도하고, 나이팅게일이나 투투 주교 같은 위대한 인물을 탄생시키는 등 인류에게 공공의 면에서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헨리 8세와 성공회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보면서 우리는 정치와 종교 간의 물고 물리는 관계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35호 / 2018년 4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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