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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밧다 ②

기자명 김규보

“산과 들에서 수행할테니 찾지 말라”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장으로 끌려갈 때, 천신에게 기도했어. 살려주신다면 공양을 바치겠다고. 내 이렇게 살아났으니,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천신이 가만히 있겠나. 나를 위해 공양을 마련해 주시오. 준비가 끝나거든 같이 갑시다.”

살기 가득한 사투카 밀치며
욕망의 부질없음 깨달은 뒤
하인들 보낸 후에 수행 결심

사투카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밧다에게 말했다. 결혼 후, 하루 종일 바깥만을 나돌 뿐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남편 때문에 속이 바싹 타들어가던 터다. 한량 같던 남편이 처음으로 건넨 반듯한 말에 밧다는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이제 정신을 차리려나 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준비를 마치고, 공양을 옮길 수십여 명의 하인과 길을 나섰다. 남편의 지시에 따라 집안에서 긁어모은 온갖 보석을 몸에 주렁주렁 매단 채였다.

도착한 곳은 라자가하 외곽, 가파른 절벽으로 오르는 산길 초입이었다. 사투카가 또 한 번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하인들에게 말했다. “천신에게 공양을 올리기 전에, 나와 아내가 먼저 인사를 드리려 한다. 기다리고 있으면 곧 돌아올 것이다.” 집에서 나왔을 때부터 남편이 자신의 보석들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던 것도 그렇지만, 여기까지 와서 굳이 둘만 인사를 드리겠다며 하인들에게 기다리라고 한 것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불안한 마음으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절벽에 도착했다. 사투카가 밧다를 돌아보았다. 얼굴에 섬뜩한 살기가 가득했다.

“당신 정말 어리석구만. 나는 천신에게 공양을 올리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야. 보석들을 당장 내놓지 않으면 절벽에 떨어뜨릴 테야.”

산길을 오르기 시작할 때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본색을 드러낸 남편의 흉악한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살려달라고 빌어 보아도 소용없었다. 보석을 내놓는 순간 절벽으로 떨어뜨릴 것이고, 집으로 돌아가서는 부모님도 가만 두지 않을 게 뻔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식은땀으로 뒤덮인 밧다가 몸에 두른 보석들을 만지작거리다 한 가지 꾀를 냈다.

“여보. 나는 여기서 죽을 거 같은데 마지막으로 당신을 안아볼 수 있을까. 죽기 전에 사랑하는 남자 품에 안기고 싶다는 소원 하나쯤은 들어주구려.”

사투카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팔을 벌렸다. 밧다는 천천히 다가가 사투카의 품에 안겼다. 짧은 순간 사투카의 얼굴을 올려다 본 밧다가 있는 힘을 다해 남편을 밀었다. 미쳐 손 써볼 틈도 없이 뒤로 밀린 사투카가 절벽 아래로 괴성을 지르며 떨어졌다. 한동안 머뭇거리던 밧다가 절벽 끝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사투카는 이미 온몸이 부러져 숨을 거둔 뒤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흐느꼈다. 남편이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충격과 살았다는 안도감, 살인을 했다는 죄책감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눈물이 말라 버릴 정도로 울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헤아려 보았다. 어렸을 적부터 유달리 남자에 관심이 많은 자신을 부모님은 항상 걱정스런 눈빛으로 타이르곤 했다. 하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하인을 비롯한 남자들에게 대놓고 눈독을 들였었다. 남편도 처음 봤을 땐 사형수였음에도 탄탄한 육체에 정신을 빼앗겨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다. 또한 보석은, 그깟 돌덩이 때문에 목숨까지 잃을 뻔하지 않았나. 부모님이 아낌없이 건네주던 보석과 산해진미에 넋을 놓고 살아오다 사리분별도 제대로 못한 꼴이었다. 어리석은 욕망에 사로잡혀 한 치 앞도 보지 못한 채 내달려왔던 지난날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부질없었다는 걸 알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지 않고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같은 생활만 반복하게 될 터다.

밧다는 왔던 길을 거슬러 내려가 산길 초입에 도착해 하인들에게 말했다. “보석을 탐낸 남편이 날 죽이려 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먼저 남편을 죽였다. 가서 부모님에게 전하라. 이제부터는 산과 들을 떠돌며 수행할 것이니, 나를 찾지 말라고.”

김규보 법보신문 전문위원 dawn-to-dust@hanmail.net
 

[1436호 / 2018년 4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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