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 2018.5.22 화 06:44
> 특별기획 > 부처님오신날 특집
[거사 불교사의 주역] 1. 거사란 누구인가?교단 외호하고 생활 속 수행 통해 해탈로 나아가는 남자신도
차차석 교수  |  beopbo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8.05.15  16:07:21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 불교사에는 무수히 많은 거사들이 존재했고 그들에 의해 불교가 오늘날까지 전해올 수 있었다. 사진은 올해로 창립된지 29주년을 맞은 거제불교 거사림회 정기법회 모습.

봄볕 속에서는 무수히 많은 꽃들이 피어 법계를 장엄한다. 그처럼 유구한 불교사의 전개 과정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거사들이 출현하여 세상의 어둠을 밝히고자 했다. 거사들은 부처님을 만나 삶의 지표를 바꾸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상의 꽃이나 향기로 피어나게 했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세상의 평화가 완성되길 희구했다.

남자신도인 우바새 중에서
교단 적극적 후원자가 거사

출재가 분별 없앤 유마거사
거사 개념 실천적으로 심화

최초 우바새는 아그리 장자
빔비사라 등 많은 거사 출현

거사란 남자신도 의미 넘어
지혜실천 인류애 실현 역할

한국불교 출가 중심 지나쳐
재가자 없는 승단 존립 불가

교단 발전과 외연 확장 위해
거사의 중요성 돌이켜 봐야


불교의 역사적 등장과 교단의 성립에는 출가자와 재가자의 호혜의 상보적 관계가 필요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처음 법륜을 굴리고 세상을 깨우기 위해 법고를 울리는 위대한 여정에 올랐을 때는 비구승 밖에 없었다. 때가 이르러 마하파자파티가 출가하여 비구니가 교단에 등장하며, 이후 차례대로 우바이 우바새가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온전한 교단을 구성하게 된다.

많은 경전이나 불교사상가들이 상가를 화합중(和合衆)으로 표현한 것은 4부대중의 화합 속에서 교단이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출가와 재가라는 상보적 관계 속에서, 앞에서 끌고 뒤에서 미는 화합이 불교의 교단에 필요했던 것이다. 잠자는 세상을 깨우는 법고의 울림을 ‘법화경’에선 기침[謦咳]이나 손가락의 튕김[彈指] 등으로 표현하지만, ‘유마경’에선 불이(不二)의 침묵으로 표현한다. 교단의 존재의의는 잠자는 세상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고, 세상과 인천의 이익과 안락을 위한 일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출가하기 전 고타마 싯다르타가 출가했다는 소문을 듣고, 빔비사라왕이 찾아와 “깨달아 부처가 되거든 가장 먼저 교화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후 불교교단의 발전에서 빔비사라왕은 훌륭한 재가신도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는 죽림정사를 지어 보시했을 뿐만 아니라 초기 불교교단의 초석을 다지는데 다양하게 기여했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면서 학문과 덕망을 갖추었지만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사람을 거사라 부르기도 했다. 혹은 처사란 단어와 혼용하면서 거사란 단어가 지닌 본질을 호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사란 불교의 독자적인 용어이다. 산스크리트어인 그라파티(grha-pati)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특히 교단의 구성원을 사부대중이라 할 때 이들 중에서 남자신도를 우바새라 부르는데, 거사는 교단의 구성원 중에서 남자 신도인 우바새에 속한다. 우바새이긴 하지만 단순한 우바새가 아니라 학문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여유를 가진, 그러면서도 신심과 수행이 굳건하고 교단의 운영과 발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거나 후원하는 사람들을 거사라 존칭했다.

필자의 견해로는 거사를 좀 더 고상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비록 출가하지는 않았지만 불교적 신심과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은 물론이며, 불교라는 종교의 정체성을 온전하게 유지하면서도 사회의 발전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거사인 것이다. 이유는 ‘유마경’에 나오는 유마거사를 연상하기 때문이다. 중생이 아프면 함께 아파하고, 중생이 병들면 그들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헌신하는 것이 보살의 근본이라는 유마거사의 설법은 거사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이라 본다.

유마거사가 볼 때 중생의 아픔이란, 이분법적인 대립과 갈등 때문에 생긴 것이며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과 절대적 사고에 갇혀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런 현실을 통찰한 유마거사의 법문 속에는 출가와 재가라는 분별의식도 없으며, 재가와 출가가 상보적 관계라는 의식도 없다. 어느 위치에 있든 불교적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 중심에 거사들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할 뿐이다. 유마거사의 상징성은 대승불교운동의 전개와 함께 거사라는 개념이 보다 포괄적이면서도 실천적으로 심화되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불교의 역사 속에는 무수히 많은 거사들이 존재했다. 이름을 남긴 분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다. 중국 청나라 때 팽제청(1740~1796)이 편집한 ‘거사전’에는 역대 중국의 유명한 거사들을 망라하고 있다. 동북아불교가 발전하는데 안팎으로 공헌한 인물들이다. 예컨대 모융을 필두로 양나라의 소명태자, 당나라 때 시불(詩佛)로 평가받은 왕유, 그리고 방거사로 알려진 방온, 원나라의 정치적 기반을 닦은 야율초재, 청나라 거사불교의 대표자인 팽제청, 근대 중국불교의 중흥을 도모한 양인산 등이 있다. 이들이 중국불교의 토착화와 발전에 기여한 공은 이루 형용할 수 없다. 인도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초기불교의 교단이 정착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아나타핀디카 장자나 빔비사라왕, 그리고 정법대관을 파견해 법의 정신과 불교적 가치를 세계화 하는데 기여한 아쇼카대왕, 엄격한 카스트제도의 한계와 모순을 타파하고 인권의 평등한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불교교단을 후원했던 그리스계의 수많은 무역상들도 있다.

무수히 많은 거사들이 있지만 불교의 역사에서 최초의 재가거사, 즉 최초의 우바새는 아그리 장자이다. 그의 방탕한 아들인 야사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만나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게 된다. 탕아가 정신적 방황을 끝내고 청정한 수행자의 길을 가는 것을 보면서 아그리 장자는 부처님을 존경하게 된다. 결국 부처님을 찾아온 아그리 장자는 재가신도가 되어 열심히 수행할 것을 다짐했다. ‘우바새오계상경’에 의하면 아그리 장자는 삼귀계와 오계를 받은 최초의 우바새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우바새의 역할이 무엇인지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

그런데 ‘별역잡아함경’ 제8의 152경이나 ‘잡아함경’ 제33의 927경에는 우바새의 역할과 개념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즉 부처님께서 카필라바스트의 니그로다 숲에 계실 때, 사촌동생인 마하나마가 찾아와 우바새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세속에서 가정생활을 하면서 붓다에게 귀의하고, 붓다의 가르침에 귀의하며, 붓다를 따라 출가한 이들에게 귀의하는 사람을 우바새라 하느니라”고 대답한다. 이어 오계를 지키는 것이 우바새의 기본이 된다고 강조한다. 또한 “어떤 것을 우바새의 믿음이라 하나이까?”라는 질문에 “나의 가르침을 깊이 믿고, 믿음에 편히 머무르며, 외도나 마군들에게 현혹되어 믿는 마음이 파괴당하지 않는 것이니라”라고 대답한다.

또 “어떤 것이 우바새의 보시행이라 하나이까?”라는 질문에는 “우바새는 재물에 인색하지 않고 탐욕의 마음을 버려야 할 것이니, 기쁜 마음으로 보시하되 손수 베풀어야 하며, 베풀고 난 뒤에 후회하지 않아야 하느니라”라 대답한다. “어떤 것이 우바새의 지혜입니까?”라는 질문에는 “인생을 전체적으로 꿰뚫어 보아 괴로움이 무엇인가를 있는 그대로 알고, 무엇이 괴로움을 초래하는가를 알아야 하며, 괴로움을 벗어난 해탈을 알아야 하고,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분명하게 알아서 실천하는 것을 우바새가 지혜를 갖추는 것이라 말한다”라 대답한다.

경전의 내용을 정리하면 우바새는 가정생활을 유지하면서도 삼귀의계와 오계를 수지하고, 믿음에 흔들림 없이 수행하는 재가 남자신도를 지칭한다. 이들은 보시바라밀을 실천하면서도 지혜롭게 인생을 살아가는데, 여기에 수행과 해탈의 완성이라는 불교적 가치가 집약되어 있다. 특히 마지막 문답에서 우바새가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알려준다. 존재의 근원적 성찰과 궁극적인 자유를 추구하고,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부단히 수행하는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사란 단순한 남자신도의 개념을 넘어 지혜를 실천하는 우바새를 말한다. 우바새이지만 평신도의 역할을 넘어 인간의 이성을 확장하고, 인류의 평등과 인류애의 완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데 앞장서는 남자신도이다. 세상을 깨우는 일의 중심에 승가가 있다면, 그 승가의 한 축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거사들이다. 경제적 후원을 통해 승가의 유지와 수행이 원만하게 성취될 수 있도록 외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승가가 중심을 잃고 흔들릴 때는 승가를 대신해 불교의 중심이 되었다. 몸은 비록 세속에 있더라도 정신만은 불교의 가치를 구현하는데 헌신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근대중국불교의 중흥에 팽제청과 양인산이 있다면, 근현대 한국불교의 발전과 안정에는 장경호나 이한상 등의 거사가 있는 것과 같다.

   
▲ 차차석
동방문화대학원대
불교문예학과 교수
무수히 많은 재가자들이 음양으로 외호하고 수행하면서 교단의 한 축을 형성해 왔지만 불교교단의 중심은 출가자였다. 그런 점은 특히 한국불교계에서 더욱 심한 현상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재가자 없는 출가자는 존립이 불가하며, 존립의 가치가 없다. 거사들의 활동이나 수행이 교단의 발전과 외연을 확장한다는 점에서 거사들의 중요성을 새삼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여성 불자들의 후원에 의해 교단이 유지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한국불교계의 현실을 돌이켜본다면, 거사들과 함께 교단이 발전해 갈 수 있는 방안을 지속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

 

 

[1440호 / 2018년 5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기사 댓글 2
전체보기
  • 나그네 2018-05-19 11:19:49

    차거사님의 의견에 일부분 동의 한다.허나,
    居士란,
    僧家의 뒤치닥거리 하는자가 아닙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그리고
    "居士"라는 그 명칭의 다툼이 그리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僧家의 발전은 물질의 넉넉함이 아니라,
    헐벗음과 삶의고통에 대한 진정한 체득이 밑받힘되어야 할 것이다.

    그 고통의 竿頭에서 만히 解脫를 향한
    進一步가 실현 될 수 있기때문이다.
    僧家!
    진정한 수행 에너지는 지금존재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거사들의 후한 잘못일 것이다.

    차거사님의 거사론에 대한 이해는
    왜곡적인 오해일 것이다.신고 | 삭제

    • 한말씀 드립니다 2018-05-16 15:34:56

      ㅎㅎ 교수님까지 왜 이러시나
      스님들은 절대 거사라고 잘 안불러요
      어이 00처사~, 라고들 하며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요

      교수님 말씀에 오류가 있다고 봅니다
      계를 수지해 지혜롭고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불자로 당연한 것인데
      후원하고 영향력이 있으면 장자이고 거사입니까!
      조계종에서 진행하는 신도품계도 기준 정리가 묘연한데
      교수님까지 이런 글을 올리시니 안타깝습니다

      먼저 처사란 무엇이고 거사란 무엇이다
      그리고 우리 불교의 고유 장자가 있었는데 현실은 ~이렇다
      앞으로 ~~ 했으면 좋겠다란 말씀도 함께 기고 하심이 저 좋다고 봅니다신고 | 삭제

      라인
      라인
      포토뉴스
      라인
      가장 많이 본 기사
      여백
      실시간뉴스
      라인
      여백
      법보신문은찾아오시는길구독·법보시광고안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03157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구독신청 : 02-725-7010  |  광고문의 : 02-725-7013  |  편집국 : 02-725-7014
      기사문의 : 070-4707-4969, 4966  |   사업자 등록번호 : 101-86-19053  |  정기간행물·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07229  |  등록일자 : 2005년 11월 29일
      제호 : 법보신문  |  발행인 : 김형규  |  편집인 : 이재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형규
      Copyright © 2013 법보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