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전승과 전파– 화엄십찰과 ‘일승법계도’ 주석
10. 전승과 전파– 화엄십찰과 ‘일승법계도’ 주석
  • 해주 스님
  • 승인 2018.05.1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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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승법계도, 의상 스님의 법손들이 끊임없이 주석서 편찬

▲ 태백산 부석사 전경. 부석사 제공

의상 스님은 ‘일승법계도’를 저술하고 귀국한 후 전국을 다니면서 화엄도량을 개설하고 ‘화엄경’과 ‘일승법계도’를 강설하였다. 그리하여 부석사를 비롯한 화엄십찰이 건립되고 수많은 뛰어난 화엄수행자가 길러졌다. 그리고 법손들에 의해 ‘일승법계도’에 대한 주석서가 계속 편찬되어 의상 스님의 화엄사상이 끊이지 않고 전승되었으며 사자상승의 전통이 이어졌다.

의상 스님 처음 건립한 사찰
관음도량인 낙산사 홍련암

태백산에 부석사 창건 이후
화엄십찰 건립해 후학 길러

부석사 창건 관련 두가지설
‘송고승전’ ‘삼국유사’ 달라

화엄사·해인사 화엄십찰 확실
직접적 관련 없는 곳도 있어

신라·고려·조선 이르기까지
꾸준하게 주석서들이 등장

일본서도 법성게 널리 독송
관련 저서들을 국보로 지정


의상 스님이 화엄본찰인 부석사를 창건하기 전, 맨 처음 건립한 사찰은 낙산(오봉산) 바위굴에서 친견한 관음보살을 모신 낙산사 홍련암이다. 절을 지을 때 산세를 살피며 머물렀던 곳이 지금의 의상대 자리라고 한다.

부석사 창건과 관련해서는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선묘 호법용이 변화한 부석(浮石)의 도움으로 부석사가 화엄도량이 되었다는 ‘송고승전’의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문무왕의 도움으로 부석사가 창건되었다는 ‘삼국유사’의 ‘의상전교조’이다.

▲ 낙산사 의상대.

먼저 의상 스님이 본국에 되돌아온 후 산천을 두루 다니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땅이 신령스럽고 산이 수려하여 법륜을 굴릴만하다고 보이는 곳을 찾았다. 그곳에는 이미 권종이부의 승려들이 오백명이나 모여 살고 있었다. 의상 스님이 ‘대화엄의 가르침은 복되고 선한 땅이 아니면 일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하자, 항상 의상 스님을 따라다녔던 선묘룡이 그 생각을 알아차리고, 곧 허공 중에서 대신변을 나타내어 커다란 바위로 변해서 너비 1리나 되도록 가람 위를 덮고는 떨어질 듯 말 듯 하였다. 그 상황에 놀란 승려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래서 의상 스님이 이 절에 들어가 겨울에는 양지 바른 곳에서 여름에는 그늘에서 ‘화엄경’을 강의하였는데,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모여드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후자는 의상 스님이 의봉 원년(676)에 태백산으로 돌아가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고 대승을 널리 펴니 신령스러운 감응이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아무튼 부석사는 의상 스님이 이곳을 중심으로 주변의 태백산과 소백산 골짜기 등에서 법석을 펴는 화엄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부석사는 통도사, 법주사, 대흥사와 함께 다음달(6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예정이다.

이 부석사를 비롯하여 의상 스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대 도량으로 10찰 또는 10산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의상전교’에서는 의상 스님이 10찰에서 가르침을 전한다고 하며 여섯 개의 사찰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최치원의 ‘법장화상전’(904년)에서는 열 곳의 산 이름을 밝히고 있다.

▲ ‘화엄원융찬(華嚴圓融讚)’ 출처=稱名寺金澤文庫).

두 기록을 비교 종합하면 ①북악 태백산 부석사 ② 남악 지리산 화엄사 ③강주(康州) 가야산 해인사 ④낭주(良州) 금정산 범어사 ⑤비슬산 옥천사 등 다섯 산사가 일치한다. 이외에 ⑥ 원주 비마라사(‘의상전교’) ⑦계룡산 갑사 ⑧전주 모산(母山) 국신사(國神寺) ⑨웅주(熊州) 가야협(迦耶峽) 보원사(普願寺) ⑩한주(漢州) 부아산(負兒山) 청담사(淸潭寺) ⑪중악(中岳) 공산(公山) 미리사(美理寺) ⑫강주(康州) 가야산 보광사(普光寺) ⑬계룡산 화산사 등의 여덟 사찰이 더 보이니 모두 13개의 사찰이 화엄십찰 또는 화엄십산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창건연대를 보면 이 가운데 부석사(676년) 국신사(676년, 현 歸信寺), 옥천사(670년), 범어사(678년), 갑사(679년, 중창) 등이 의상 스님 입적 전에 건립되었다. 비슬산 옥천사는 현재 비슬산 용천사 또는 연화산 옥천사라고 간주되고 있다.

화엄사는 연기조사가 544년에 창건하였으며 의상 스님이 677년에 장육전(각황전)을 조성하고 벽에 화엄석경을 새겼다고 전한다. 그런데 8세기 중엽 창건설이 대두되었으니, 경덕왕 때 연기조사가 사경한 발원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해인사(海印寺)는 802년에 순응(順應)스님과 이정(利貞)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순응 스님과 이정 스님은 신림(神琳) 스님의 제자이고, 신림 스님은 상원(相源) 스님의 제자이다. 따라서 해인사 창건주는 의상-상원-신림-순응·이정으로 이어지는 의상 스님의 4세 법손들이다.

보광사는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그런데 현재 가야산과 인접한 수도산 수도암이 옛 명칭이 보광사로서 십찰의 하나라는 설이 있다.

보원사지는 서산마애삼존불을 지나서 계곡을 따라 조금 올라간 곳에 있는데, 법인탄문(法印坦文, 900~975) 스님이 보원사를 중창하고 ‘화엄경’을 강의하여 고려전기에도 화엄사찰의 위세를 크게 떨쳤다. 현재 탄문 스님의 탑비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비마라사지는 2곳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강원도 유형문화재(제49호)인 당간지주가 있는 원주시 봉산동이라고도 하고, 단양군 영춘(당시는 원주라고 불림)의 비마라산 마을 절터가 십찰에 속하는 곳이라고도 한다.

청담사지는 현재 서울시 은평구 일원으로서, 한주는 서울이고 부아산은 북한산 줄기인 북악의 옛 명칭이다.

화산사와 미리사는 그 위치가 불분명하지만, 현존 사찰이나 사지들이 한결같이 비로자나불 또는 아미타불을 모신 대찰임을 볼 때, 화산사와 미리사도 봉불이나 규모에 있어서 여타 십찰의 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전국에 펼쳐진 화엄십찰.

이처럼 화엄 10찰중에는 의상스님이 직접 창건하고 전교한 곳도 있고,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려운 곳도 있다. 그러나 이 모두가 화엄십찰 또는 화엄십산으로 전해져온 것은 이들 사찰이 의상 스님과 제자 그리고 법손에 의해 대를 이어 창건되었으며, 적어도 의상 스님의 화엄사상과 수행이 전승되어 신라 사회에 널리 유포되었음을 강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의상 스님은 삼의일발의 무소유 삶을 보였으나, 제자들과 대중들에게 법등을 펴고 전한 곳은 모여든 대중 모두의 원력으로 국가의 외호와 함께 대도량으로 전개되었다고 하겠다.

이외에도 의상 스님이 창건했거나 주석한 사찰도 많고, 제자와 법손들에 의해 건립되었거나 화엄강의가 이루어진 화엄사찰이 많았다. 의상 스님의 출가사찰인 황복사는 물론이고 불영사, 마하연, 비로사, 골암사, 불국사, 월유사, 표훈사, 봉정사, 세달사, 숭복사, 천관사 등이다.

뿐만 아니라 의상 화엄의 전승은 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내려오면서 ‘일승법계도’에 대한 주석을 통해 계속 이루어졌다. 주석서에서 ‘일승법계도’에 담긴 의상 스님의 화엄교가 면면히 이어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신라시대에 저술된 ‘일승법계도’의 수문석에 ‘법융기(法融記)’ ‘진수기(眞秀記)’ ‘대기(大記)’의 삼대기가 있다. ‘법융기’의 저자 법융 스님도 신림 스님의 제자로서 의상 스님의 4세손이니 800년을 전후하여 활동하였다. ‘진수기’의 저자 진수 스님은 신라 하대에 활동하였고, ‘대기’는 누구에 의해 저술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저술 년대는 9세기 중엽 이후의 신라 하대로 추정된다.

이 삼대기는 고려시대 집성된 ‘총수록’에 수록되어 전해져왔다. ‘총수록’은 상1·2, 하1·2의 4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승법계도’와 그 주석인 삼대기, 그리고 ‘삼대기’를 이해하기 위한 관련 화엄전적 등을 집성한 것이다. ‘총수록’에는 서문이나 발문이 없으므로 ‘총수록’이 언제 누구에 의해 집성되었는지 알기 어렵다. 단지 ‘총수록’에 균여(923~973) 스님의 저술이 소개되어 있고, 고려 고종 41년(1254년) 전후 무렵에 조판된 고려대장경 보유판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10세기 말엽에서 13세기 중엽 사이에 편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균여 스님도 ‘일승법계도원통기’를 지어 의상 스님의 화엄사상을 계승하였다. 균여 스님은 중국 화엄종조의 저술에 대해서도 원통기와 원통초를 저술하였으나, 신라말 고려초에 분열된 남악과 북악의 대립을 자신이 속한 북악의 입장에서 화해시키면서 의상 스님의 법성 사상을 이어간다.

조선 초기에는 설잠(雪岑) 김시습(1425~1493)이 ‘대화엄법계도주병서’를 지었다. 서문에서 ‘법성게’는 ‘법성’이라는 한 말로 화엄세계를 다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30구의 시(詩) 내용을 선적으로 해석하였으니, 의상 스님의 화엄세계가 선세계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설잠의 화엄관은 구산문 개산 이래 계속되어온 선과 화엄의 교섭에 영향 입은 것으로 간주된다.

조선 후기에는 도봉유문(道峯有門, 1790년 전후 활동) 스님이 ‘법성게과주’를 지었다. ‘법성게’ 전체를 법성으로 파악하여 과분하고 주석한 것이다.

이와 같이 전시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주석되고 전승된 것은 한국불교전적 중에 ‘일승법계도’가 유일하다고 생각된다. 그런가하면 ‘법성게’는 전국사찰에서 독송되어 왔으며, 오늘날에도 거의 매일 독송되고 있다.

일본에서도 ‘법성게’ 내지 ‘일승법계도’가 서사 유통되었는데, 일부는 국보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쇼묘지(稱名寺)에 소장 되어있는 서사본으로서, ‘해동화엄초조 술(海東華嚴初祖述)’ ‘화엄일승법계도’(13세기~14세기 서사), ‘일승법계도’의 주석부분인 ‘법계도기’를 서사한 ‘일승법계도기’(1315년, 정화4), ‘법성게’ 30구 210자에 악보[聲明譜]를 붙여 달리 이름한 ‘화엄원융찬(華嚴圓融讚)’(1363년, 貞治 2년) 등이 다 국보로 모셔져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일승법계도기’가 1120년에 서사된 동대사 존승원본을 저본으로 하였는데 해동화엄초조가 저술한 것임을 명기하고 있고, ‘화엄원융찬’은 ‘법성게’에 운율을 붙여 불교의례에서 사용되었으니 이는 한국에서 ‘법성게’가 널리 독송된 영향을 입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440호 / 2018년 5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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