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을 위한 법회 구성의 제일의 - 전통과 미학이 충족된 법회
현대인을 위한 법회 구성의 제일의 - 전통과 미학이 충족된 법회
  • 이성운
  • 승인 2018.05.22 14: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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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식은 소통이 중요…의례형식과 내용 이해가 우선돼야

▲ 이성운 교수는 “현대 법회는 과감하게 그 구조를 개선하고 의례의 공양에 재가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종교는 의례로 종교가 추구하는 가치와 사유가 실현된다. 아무리 명확한 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현하는 형식으로서의 의례가 불비하다면 그 내용은 드러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불자들은, 불교는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스스로 얻어나가는 자력의 종교라고 대체로 이해하고 설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 의례의 대다수는 소원의 성취를 삼보님이나 특정 불보살과 신중들께 축원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한국불교를 ‘기복 불교’라고 하면서 조금 자랑스럽지 못하다고 느끼고 있는 분들을 간혹 볼 수 있다. 수선 지상주의와 기복 종교들이 우리에게 덧씌운 이미지를 우리 스스로 수용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타력에 의지하는 종교라고 해서 열등한 것도 아니고 자력에 의지하는 종교라고 해서 우등한 것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해당 종교를 통해 안심입명하고 그 힘으로 더 높은 이상을 추구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불교 기복불교 비판은
선 중심·기복종교의 그늘

타력에 의지한다고 해서
열등하다는 시각은 오해

의례를 행하는데 있어서
한문이라는 장애는 여전

교설 의미 쉽게 이해될때
현대인 가슴 울리 수 있어


현재 직장인들을 위한 법회는 대개 설법 중심으로 진행되는 데 비해 사찰에서 일요일이나 초하루 보름 혹은 재일에 행해지는 법회는 헌공의식과 설법으로 이원화되어 진행된다. 시작은 의식을 주관하는 스님이 이끌어가고 있는데 ‘천수경’으로 도량을 엄정하고 결계하며 삼보통청으로 삼보를 청하여 가영으로 찬탄하고 자리를 권하여 앉으시기를 청한 다음 공양을 올리는 형식이다. 공양을 올리기 위해 정법계진언 이후 공양게송과 4다라니 염송으로 공양물을 변식하여 공양하는데, 공양물을 받는 대상인 삼보님을 일일이 거명하여 지심정례공양 모모 불보살 하는 형식으로 진행한다. 법주스님이 요령을 갈아 내리면서 사다라니를 염송하는 동안 바라지 스님은 목탁으로 칠정례 공양을 모신다. 칠정례 공양이 끝난 다음에는 다시 일사천리로 보공양진언 보회향진언 보궐진언 탄백 등이 진행되며, 이후에는 축원이 이어진다. 축원을 마치고 동쪽의 중단을 향해 퇴공의식을 별도로 행하지 않고 ‘반야심경’을 염송한 다음 서쪽의 영단을 향해 법성게를 합송한다. 이후 일요법회를 시작하겠다는 사회자의 선언과 함께 청법가가 제창되고 법사스님이 등단하여 법회를 이어간다. 설법이 끝나면 발원문 낭독, 사홍서원과 산회가 제창으로 법회가 마쳐진다. 이렇게 재일이나 일요법회를 설행하고 있지만 아직도 삼귀의를 하는 곳도 적지 않다고 한다.

대체로 이와 같은 절차로 진행되는 법회의 일원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는 헌공의식과 법회의식이 둘로 나눠 진행되는 것은 표면적으로 보면 큰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좀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심이 결여되고 있고, 거기에는 논리가 부재하다는 것이다.

먼저 신심이 결여되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기 위해 부처님을 청해 모셨다. 물론 부처님을 청해 모시고 공양을 올린 대가로 설법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불교도들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가 헌공의식으로 봉행하는 삼보통청(三寶通請)이라는 의식은 삼보를 청하는 목적이 공양에만 있다고 생각하면 의례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 현재의 삼보통청은 상주권공의 축약형이고 상주권공은 영산재의 축약형이라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지만 동의하기가 쉽지는 않다. 왜인가. 영산재는 영산의 석가모니부처님을 청하기 위해 상주삼보를 청해 공양 올리고 영산의 석가모니부처님께 법화경을 설하여 달라고 부탁드리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불교의식의 대부분은 청하는 의식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청하여 공양을 올리고 그분이 설해주시는 법문을 듣는 것이 목적이지만 청하는 의식 이외의 의식은 대동소이하므로 별도의 의식을 시설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청문만 시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상주권공 의식을 보면 청하여 공양을 올리고 경전을 염송하게 되므로 정대게송을 염하고 경전을 독송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을 대신하는 법사를 이운하여 모시고 설법을 듣는다. 그래서 청법게송을 한다. 설법이 끝나면 정근을 하고 보궐진언을 한다. 보궐진언을 하는 것은 법화 법석이었던 영산재의 잔영이라고 할 수 있다. ‘영산대회작법절차’의 구조를 보면 헌좌진언 이후 다약게송으로 차를 올리고 정대게와 개경게나 청법게를 한다. 보궐진언은 법시(法施)로서, “대중이 ‘법화경’ ‘방편품’을 염송할 때 시간이 촉박해서 정설을 다 읽지 못하고 경전을 거두게 될 때 ‘어산’은 ‘서품제일’이 무엇인가 하며, 보궐주를 읽고 중부는 ‘수경게’를 읽고 있다.”

다시 말하면 보공양진언 보회향진언으로 공양의식이 끝나고 나면 공양을 마치신 부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법을 설해주시는 순서인데, 유위의 중생들을 위해 법사님을 모시고 부처님을 대신하여 법을 설해달라고 청하는 청법을 하거나 개경게 염송을 필두로 경전을 염송함으로써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 것이다. 이때 설법을 하거나 경전을 염송할 때 짧은 경전을 염송할 수는 있지만 ‘법화경’이나 ‘화엄경’ 같은 경전은 분량이 크므로 여러 날에 걸쳐 법석을 열고 그날 못 읽은 경전을 보궐한다는 의미에서 보궐진언을 염송하는 것이다.

보궐진언 염송 이전에 4대주나 대승경전을 염송하였는데, 여기서 청법가를 하고 법문을 듣게 되면 헌공의식과 설법의식이 일원화될 수 있다. 이 같은 주장을 하면 축원을 어떻게 하냐고 하는 반문이 있을 수 있는데, 법문을 마치고 법사스님이 하좌할 때 정근을 하고 하단을 마치면 법사스님이나 법사스님을 대신하는 스님들이 봉행하면 된다고 한다. 법문을 듣는 것은 업장을 소멸하는 것이고, 정근을 하는 것은 선근을 쌓는 것이다. 업장을 소멸하고 선근을 쌓아야 그 공덕으로 소원이 성취되게 되므로 축원의 의미가 배가될 수 있다.

다음은 어찌 신심이 결여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법당은 불전이다. 다시 말해 부처님이 선정에 들어계시는 곳이다. 이미 부처님이 계시지만 삼보를 청하고 있다. 법당에 계신 부처님은 특정불보살이다. 특정불보살은 삼보의 보편적 속성을 안고 있다. 보편적 삼보를 청해 찬탄하고 공양을 올린다. 그러므로 매 법회 때마다 삼보님을 통청해 공양 올려야 한다고 믿는다면 매 공양 올린 다음 축원이나 설법이 끝나고 나면 돌려보내는 봉송의식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도 않고 매번 통청하기만 하면 상주삼보가 어디에 계시는지에 대한 믿음과 인식이 결여될 수 있다. 거룩한 삼보님을 매번 청하기만 하고 보내드리지 않는 것은 그분들이 청해서 오셨다는 믿음이 없거나 믿지 않거나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분들은 진정계에 계신다고 했다. 중생들을 위해 청을 받아 사바에 오셨다면 다음에 도량을 건립할 때 다시 오시도록 돌려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일체에 상주한다고 믿는다면 통청할 것이 아니라 일체의 삼보님께 공양을 올리겠노라고 아뢰거나, 아니면 지금 대좌에 앉아계신 부처님이 그분들을 대신한다면 청할 필요 없이 그냥 정성 다해 공양을 올린다고 아뢰기만 하면 된다. 법회의 일원화는 차서의 일원화와 신심과 같은 사고의 일원화가 이뤄져야 한다. 행해지는 의례를 믿음으로 수용하기 때문에 수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법회를 보면 공양의식이 끝나면 법회를 새로 시작하여 헌공과 법회로 이원화되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공양의식의 보궐진언 이전에 청법게로 법사를 청하고 법문이 끝난 다음 하당할 때 정근을 하고, 이후에 축원을 봉행하여 일원화할 필요가 있다. 중단퇴공과 하단시식으로 행해지는 염송의식도 일원화될 필요가 있다. 상중하단의 의식들이 유기적으로 설행되어야하며, 그 의미가 바로 논리적으로 해명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또 그렇게 설행돼야 한다. 현대인들은 무조건 믿지를 않는다. 혹자는 그것을 간혜(乾慧)라고 할지 모르지만 현대의 열린사회에는 바로 이해되고 소통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막연히 신심만을 강조하면 현대인의 법회에 적합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현대인을 위한다고 하면서 한국불교의 전통 범패가 활용되지 않은 채 진행되는 법회는 종교성이 저감되는 한 요인이 될 수 있다. 장시간의 수륙재라도 훌륭한 범음으로 진행되면 신심이 고양되는 사례를 볼 수 있다. 해서 법회의 일부만이라도 범음을 활용하여 현대법회에 전통의 범음으로 아름답게 장엄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전후 의식의 맥락이 일치되어야 한다. 삼청하였으면 삼청으로 공양 올리고, 공양을 올리려면 소청을 해야 한다. 지장청 등과 같이 수미일관되지 못하는 의식은 점검될 필요가 있다.

또 의례에 공양하는 재자들이 직접 공양의 간절함을 전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경산수륙재에서는 상단과 중단의 헌공부분은 전통의 소리에다 재자들의 고백을 살려나가고 있다. 자력종교를 자랑하는 불교의 헌공에서 자력성이 많지 못한 점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듣기만 하는 종교가 아니라, 말도 하는 종교, 부처님께 자신의 정성을 직접 고백하는 경건하고 숭고한 순간을 향유해야 한다.

아뢴 대로 행위가 갖춰져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언설이 논의되어야 하는 우리나라 불교의례의 현실에는 의례설행의 갖가지 역사와 우리의 언어가 아닌 한자 한문의 장애라는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시제가 없는 한문을 주로 사용하는 과정에 간략히 행할 때의 의식과 장황하게 행해야 하는 의식이 중복되기도 하고 같은 의식을 다르게 이해하게 되면서 일어났다고 보인다. 이제 한문으로 사유하는 세대는 극히 적다. 현재 행해지는 일요법회 등을 보면 ‘천수경’ 등 일부는 우리말로 봉행되고 있다. 하나 적지 않은 부분은 아직도 정비되지 못한 상태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 이성운
동방문화대학원대 연구교수
현대인의 특징은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해되고 곧바로 느낌이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대인을 위한 법회는 전통이 면면히 이어지지만 과감하게 그 구조를 개선하고 의례의 공양에 공양을 올리는 재자들을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처님을 만나는 숭고미를 맛보고, 의례의 형식과 내용의 이해를 통해 불교가 설하는 교설의 의미가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의례는 지성미를 갖추게 되고 의례가 조화로운 완전체로 다가올 때 의례에서 우아미를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전통이 이어지고 참여하며 수미일관의 언설이 일관될 때 그것들은 현대인들의 가슴에 곧바로 다가가지 않을까 한다.

 

[1441호 / 2018년 5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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