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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누와 염불암

아늑한 허공 속의 신기한 힘

여름이 가까운 계절이지만 염불암은 겨울이 알맞다. 그 곳은 늘 겨울처럼 한결같이 텅 비어있다. 난 그런 겨울날의 풍경을 좋아한다. 살풋 내린 눈보다는 비어있음을 채워주는 푸지게 눈이 내리는 날이 좋다. 마침 그날과 맞닥뜨리면 들판으로 나갈 일이다. 아니면 바람에 떨고 있는 앙상한 겨울나무 가득한 숲으로라도 갈 일이다.

숲으로 가는 길에 방온거사는 ‘호설! 편편불락별처’(好雪! 片片不落別處)라 한다. 이리저리 바람에 흩날려 떨어지는 눈이지만 어디하나 가리거나 분별하지 않고 고르게 떨어져 쌓여 있다. 참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염불암은 나에게 그토록 신기한 곳이다. 갈기갈기 조각난 마음을 가지고 그 곳으로 오르면 아늑한 허공이 전부다. ‘好空! 片片不落別處’인 것이다. 가득하다. 어디 한 치의 틈도 없이 허공이 넉넉하다. 그 곳에선 아무 것도 없음, 아니 허공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온 몸을 덮어 오는 볼 수 없는 그의 힘. 그것 앞에서는 본래의 모습이 드러난다. 나를 발가벗길 수 있는 곳. 갈기갈기 갈라 진 마음 따위를 더 갈기갈기 찢어 형체도 없이 만들어 ‘방아착’(放我着), 내려놓을 무엇조차 없게 만드는 그런 곳이다. 혜능조사가 이야기했다. ‘비풍비번’(非風非幡)이라고, 그 곳에 올라 두어 시간, 마음이 산산이 부서지고 나면 혜능의 그 속 깊은 말 또한 그토록 아름답게 들릴 수가 없다.

다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허공을 본다. 흔들리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다. 가만히 있을 따름, 나 또한 흔들릴 마음조차 없어져 버렸으니 모든 것이 고요하기만 하다. 허공 또한 꼼짝도 않고 이도 저도 움직이지 않지만 허공의 힘은 모든 것을 펄떡펄떡 살아 숨쉬게 한다. 어느새 내 안으로 그것이 가득 들어 와 있는 것이다. 꼭 염불암이 아니더라도 허공에 가득 취하거나 덮여 보라.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의 크기에 짓눌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곧이어 짓눌림이 곧 살아남이라는 것 또한 알게 될 것이다‘불주적정’(不住寂靜)이라. 혜능은 다시 고요히 머물러 있지 말라고 했다. 허공이 마치 고요히 머물러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나에게 아무런 눈짓도 몸짓도 하지 않지만 살아서 펄떡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나의 문제일 뿐, 내가 그 곳엘 가는 것은 살아 숨쉬고 싶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의 모습처럼 큰 힘과 맑은 마음으로 꿈지럭거리며 세상 속에 살아 있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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