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불교와 풍수④-도선국사의 비보풍수

기자명 최원석
  • 사설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절 짓고 숲 가꿔 ‘명당 만들기’

도선국사는 원효 이상으로 역사와 민중들의 입에 오르내린 스님이다. 그에 대한 평가 역시 시대적으로 다양한데, 열반 당시(898년)에는 평범한 선승이었으나 100여년이 지난 현종조에는 대선사(大禪師)로, 다시 백여년 뒤의 숙종조에는 왕사(王師)로 높혀지고, 이윽고 열반 후 250년이 지나서 국사(國師)로 추존된다. 조선조의 도선은 술승과 도참승으로 추락한다. 이러한 굴곡이 심한 평가는 다름아닌 그가 풍수의 시조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도선국사는 통일신라 후기인 827년에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열다섯 나이에 월유산 화엄사로 출가하고, 20세에 태안사에서 선문을 열고 있던 혜철에게로 들어가 수행한 후 ‘무설지설 무법지법(無說之說 無法之法)’이라는 선지를 깨친다. 그는 이처럼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선의 정수를 깨달았으니, 이것은 중국풍수의 지리설과 풍수법에 얽매이지 않은 비보사탑설이라는 것을 창안한 원동력이 된다. 이후 지리산의 이인(異人)에게 풍수법을 전수받고 미호사, 도선사, 삼국사를 개창한 뒤에 나이 38세(864)에 광양의 백계산 옥룡사에 주석하였다. 49세 되던 해에는 태조 왕건이 태어날 집터의 풍수를 보아주고, 신라의 헌강왕의 부름을 받고 궁중에 일시 머물렀으며, 이윽고 898년에 옥룡사에서 열반하였다.

광양시 옥룡면 백계산에 있는 옥룡사지는 도선국사가 38세 이후로 주석하여 열반한 곳이다. 몇해 전에는 도선국사의 부도터에서 법구로 추정되는 인골이 발견되어 세간의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 도선국사라면 한국 풍수의 시조로서, 풍수에 관심을 둔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땅을 택하여 살았는지 자못 궁금해질 것이다. 그곳은 대단한 풍수적인 명당터일 것이라는 기대도 할 만하다. 그러나 막상 옥룡사지를 가면 선입견은 깨지고 일말의 실망감초차 생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곳은 그저 여느 사찰과 다름없는 평범한 입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찰의 경역도 그리 넓지 않고, 눈을 놀래고 감탄할 만한 풍수적 특징도 찾아볼 수 없고, 심지어는 경내로 들어오는 입구 부분에 약간의 풍수적 결함도 있는 땅, 왜 풍수의 달인인 도선은 이 땅을 선택하여 평생을 주석하였을까?

그 대답은 도선풍수의 사상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명당, 곧 최적의 자연조건에 굳이 집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록 최고의 명당은 아니어도 잘만 가꾸고 쓰면 얼마든지 살기좋은 터전이 될 수 있다는 풍수사상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도선으로부터 비롯한 이러한 전통을 풍수사(風水史)에서는 비보풍수(裨補風水)라고 일컫는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풍수적인 좋은 땅으로 가꿀 수 있을까? 여기에 비보풍수의 방법론이 나온다. 그 중 하나가 숲을 조성하는 방책이다. 숲으로 땅 기운을 북돋고 허함을 막는 효과를 거둘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 옥룡사에서는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나무 숲이 장관을 이루고 있고 특히 사지 경내로 들어오는 입구에 집중되어 있는데, 전하기를 도선이 땅의 기운을 북돋기 위하여 심었다고 한다.

옥룡사는 경내로 이르는 진입로의 경사도가 높고 따라서 경내에서 보자면 지형적 조건상 앞이 푹 꺼져 있는 모습을 띠고 있다. 풍수에서는 이런 곳은 땅의 기운이 쑥 빠져 나간다고 꺼리는 곳이다. 이런 땅을 도선은 숲을 가꾸어서 보완하는 효과를 얻고 있다.

옥룡사 말고도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승주의 운동산 도선암이라고 있다. 여기는 도선이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는 전설이 있으며 실제 인근 마을에는 어머니 묘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 절은 주위로 암반을 끼고 있는데, 〈조계산 선암사 사적(1704)〉에 의하자면 이 절은 호랑이 아가리 혈〔虎口穴〕에 입지하고 있다는 표현이 나온다. 흥미롭지만 현 주지스님의 증언에 따르자면 본전 뒤로 암벽 가운데 굴처럼 푹 파인 곳이 있어 여기는 호랑이 목구멍이고, 그 좌우의 암맥은 호랑이 어금니라는 것이다. 이 절에서 앞을 바라보면 순천 고을이 내려다 보인다. 왜 이런 곳에 절이 들어서 있을까? 호랑이라는 상징성은 또 무엇일까?

운동산 도선암은 대표적인 고을 비보사찰의 하나이다. 순천 고을에서 바라보면 도선암이 들어서 있는 운동산은 호랑이 형세를 하고 있으니 〈운동산 도선암 중창기(1838)〉에 따르자면, “순천부 남쪽 20리의 운동산 도선암은 도선 국사가 도를 이루고 창건한 곳으로, 이 산의 형세는 굶주린 호랑이가 먹이를 찾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순천 고을의 남산은 풍수적인 형세로 사슴의 형국을 하고 있다. 사슴은 호랑이의 밥이 되고 말 것은 뻔한 이치니 순천 고을의 입장에서 보면 운동산이 부정적인 배역(背逆)의 형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도선은 이러한 흠과 결점을 비보풍수적인 방법을 써서 치유하였으니 그 방법은 호랑이의 아가리에 절을 들여서 부처의 힘으로 산세를 다스리는 것이다. 이처럼 절을 세워 문제가 있는 땅을 고치는 법을 사탑비보법이라고 한다.

도선의 비보풍수는 이후 한국의 국토 공간에 매우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다. 고려의 개성과 조선의 한양을 위시하여 각 고을과 마을, 그리고 사찰 들에서 비보의 흔적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 풍수의 구성이 기존에 알고 있었던 명당풍수와 비보풍수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도 발견하게 된다. 명당풍수는 자연상태의 명당이 어딘지를 찾는 이론으로서 자연 가치를 인간사에 적극 도입하고자 한 택지론이었다.

비보풍수는 명당의 조건을 인위적으로 가꾸는 방법으로서 기존의 자연가치에 의존하고자 한 경향을 벗어나 인문 가치의 중시와 공간 조영 주체로서의 인간에 강조점을 둔 발전적인 논리이다. 이렇듯 도선의 비보풍수는 자칫 이상적이고 의타적으로 흐르기 쉬운 명당에 집착하지 않고 주어진 지리적 조건의 문제점을 능동적으로 보정·보완하여 어느 땅이나 살기좋은 환경으로 조성하는 길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최원석 /성신여대 강사/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