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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부처님오신날의 추억-지선 스님편

기자명 지선 스님
  • 기고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80년 피의 초파일’ 인생의 전환점 돼

5·18 광주민주화 운동이 있었던 20년 전(1980년)의 부처님 오신날은 내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5·18 발생 3일 후인 5월 21일(양력)이 부처님 오신날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날이 진압군에 의해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날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날을 가리켜 일명 ‘피의 초파일’ 초파일로 부르기도 했다.

나는 당시 제주도 관음사의 주지를 맡고 있던 중이어서, 광주의 처참한 현장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다. 다만 풍문으로 흘러오는 끔찍한 소식을 확인하기 위해 은사 스님이 계시던 문빈정사에 전화를 하거나 여기 저기 인연 있는 곳에 연락을 취해 그곳의 참상을 전해 듣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그때마다 부처님 오신날의 민중학살이라니 … , 민중이 저렇게 죽어가고 억압받고 있는데 중생을 구제하고자 출가사문의 길에 접어든 내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 심한 좌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몇 달 후 나는 관음사에서 10·27 법난이란 초유의 사태를 당했다. 군홧발에 짓밟힌 법당, 그리고 범죄인 취급을 받으며 끌려가는 스님들, 1600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의 종교인 불교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다음 해(1981년) 2월이 되어서야 광주 문빈정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무등산 길목의 문빈정사에서 살면서 나는 충격적인 일을 경험했다. 등산길을 오가는 시민들이 절의 문짝을 발로 차거나 스님을 보면 시비를 걸어오는 경우를 자주 당했던 것이다. 불교는 군사독재정권에 아부나 하는 어용종교, 승려들은 민중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절에 트집을 거는 주된 이유였다. 나는 그때 ‘정권에 짓밟히고 민중들에게도 외면을 당한다면 불교가 이 땅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도반이나 후배 스님들 중에 민족을 생각하고 역사를 두려워하는 의식 있는 스님들이 많다는 점에 용기를 얻어 시민들을 설득하고 적극적으로 불교의 입장을 해명하기 시작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불교가 그런 종교가 아니라고, 또 많은 스님들이 군사독재에 울분을 토하며 민주화 투쟁에 동참하거나, 동참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설득을 하자, 그들은 그러면 자리를 마련할 테니 스님이 나와서 그런 입장을 공식적으로 이야기해줄 수 있겠느냐는 제의를 해왔다.

그렇게 해서 여기저기 다니며 강연을 하고 연설을 하게 된 것이 나의 인생을 바꾼 중대한 전기가 된 것이다. 수난의 시절을 맞아 좌절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바로 여기가 내가 죽을 자리구나’라는 결연한 각오로 분연히 일어나 민중들과 함께 했던 당시의 기억, 그리고 그후 민주의 현장에서 살아왔던 기억이 새롭다. 20년 전의 부처님 오신날, 그날은 내 삶의 방향을 운명처럼 정해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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