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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문 봉축 에세이-우직스러움의 미학

기자명 박일문
  • 기고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1

전라도 어떤 산사에서 행자로 지내던 시절 이야기다. 얼굴빛이 유난히 검고 농사꾼처럼 생긴 사무장이 있었다. 그는 우직하고 단순해서 주위사람들에게 답답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곤했다. 그에 비해 스님은 학승으로 이름이 높고 성격이 아주 예민한 분이셨다. 나는 그 스님 밑에서 행자생활을 하게되었다. 하루는 스님이 서울에 올라가시며 나에게 당부하셨다.

“아침에 고추밭에 물주고 점심 때 나무를 해라.”

나는 스님을 배웅한 후 공양간 설겆이와 경내 청소를 마쳤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아침 나절, 연녹색 미루나무 잎새들이 팔랑거리며 바람에 헤살짓는 것을 보노라니, 내 마음도 싱숭생숭했다. 출가를 결심하고 이 절 저 절을 떠 돈지도 어느 새 한 해가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잡념을 쫓는 최선의 방법은 일을 하는 것이다. 일의 순서를 보니 시원할 때 나무를 하고 더울 때 고추밭에 물을 주는 것이 좋을 것같았다. 땀이 나면 물을 주다가 손발도 씻고, 좀 좋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나는 사무장에게 “고추밭 물은 나중에 주고 시원할 때 나무합시다.” 하고 말했다.

사무장이 말했다.
“스님이 그렇게 시키지 않았습니다. 고추밭에 물을 먼저 주라고 했습니다. 스님이 시킨대로 합시다.”
나는 사무장의 말에 숨이 탁 막혔다. 뭐 이렇게 답답한 사람이 다있나 싶었다. 나는 수행자의 길을 걷는 사람이고 그는 속인이지만, 나는 사무장의 주장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소위 말하는 짠밥에 밀렸던 것이다.

#2

해마다 5월이면 광주지역 사람들은 타지에서 망월동 참배하러 오는 사람들을 위하여 먹거리를 해가지고 묘지로 간다. 내가 살던 가난한 절에서도 타지 사람들을 위하여 무언가를 해가기로 했다. 새벽예불을 마친 뒤, 스님이 내려오셔셔 말씀하셨다.
“내일 김밥 50인 분을 준비하거라."
그러면서 스님은 김밥을 장만할 돈도 주지 않고 우리에게 어떤 것도 제공하지 않았다. 나는 그일을 사무장과 의논했다.
“스님께선 돈도 한 푼 안 주시면서 우리에게 김밥 50인 분을 장만하라시는데, 아는 보살님들에게 단무지나 김밥재료를 보시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무장은 “있는 걸로 하면 되지요.” 하고 말했다.
그러나 공양간에는 먹을 것이라곤 쌀 밖에 없었다. 가난한 절살림이고 스님도 공부만 하시는 스님이라, 먹을 것이 거의 없었다. 반찬이랬자 산야에서 자라는 산나물을 뜯어다가 된장에 묻혀 식탁에 올려놓는 게 고작이었다. 다행이 쌀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옛날 스님들의 식생활에 비하면 얼마나 풍족한 것인가.

먹을 게 없어도 그것이 나에게 불만은 아니었다. 절간에 있는 것이라곤 쌀 밖에 없는데 50인분의 김밥을 어떻게 만드느냐가 문제였다. 다행히 주머니를 탁탁 터니 50인분의 김을 살 수 있는 돈이 나왔다. 문제는 단무지나 시금치 같은 재료를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였다. 시장에 나가 김을 사고 나자 돈이 한 푼도 남지 않았다. 사무장이 공양간에 있는 반찬들을 다 꺼내놓았다. 반찬거리라고는 들깨와 막소금과 맛소금 밖에 없었다. 결국 생각한 방법이 들깨를 볶아 맷돌에 갈아서 김밥에 넣기로 한 것이다. 간은 어떻게 맞출 것인가.
“맛소금이 있는데 이걸 씁시다. 굵은 소금 보다는 맛이 낫지 않을까요.”
나는 사무장에게 맛소금을 고집했다. 사무장은 맛소금은 조미료 냄새가 난다면서 막소금을 고집했다. 결국 김밥 간을 맞추는데 맛소금을 넣기로 했다. 행자인 내가 최초로 사무장의 고집을 꺽은 사건이었다. 들깨와 맛소금만 넣어 만든 김밥 50인 분을 만들었다. 스님께서 예불을 마친 후, 새벽에 내려오셨다.

“김밥은 어떻게 됐어?”
“다 만들어 놓았습니다.”
스님이 김밥 한 줄을 집어드셨다. 스님께선 인상을 찌푸리시면서 나에게 물었다.
“맛소금 넣었지?”
나는 당연하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예” 하고 답했다. 나는 돈 한 푼 받지 않고 50인 분의 김밥을 만들어냈으니 당연히 칭찬받을만한 일이 아닌가,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웬걸, 바로 스님의 호통이 떨어졌다.
“내가 조미료는 절대 쓰지 말라 그랬잖아. 이거 다시 만들어.”
그러며 스님은 공양간의 조미료를 모조리 찾아 쓰레기통에 집어던지셨다. 조미료를 여러차례 버려왔지만 속가의 보살님들이 자꾸만 사와서 쌓이고 쌓였던 것이다. 그래서 행자인 나는 없는 반찬에 조미료를 쓰면 그래도 맛이 나지 않을까 해서 가끔 써왔던 것이다.

나는 망연자실 사무장의 얼굴만 허탈하게 바라보았다.
“지금 어떻게 다시 김밥 50인분을 만든단 말입니까.”
새벽 세시여서 다행히 아직 시간은 남아있었다. 사무장이 물었다.
“김은 남았습니까?”
김은 남아 있었다.
“그럼 밥을 다시 해서 남은 김으로 만들어 봅시다.”

나는 다시 쌀을 안쳐 밥을 지어 김밥을 만들었다. 이제는 맛소금 아닌 막소금을 넣어 20인 분 정도의 김밥을 다시 만들 수 있었다. 거기다가 이미 만들어 놓은 50인 분을 합치니 70인 분의 김밥이 되었다. 산사 아랫마을까지 김밥을 경운기로 실어날랐다. 그리고 망월동 묘지로 향했다. 이미 광주지역의 이런 저런 단체에서 먹거리를 해가지고 묘역 가는 길가에 나와 있었다. 우리도 절에서 만든 김밥을 망월동 묘지 길가에 내놓았다. 각 지역에서 단체로, 개인으로 많은 사람들이 광주로 내려왔다. 다행히 들깨를 넣어 만든 김밥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사건 이후, 나는 맛소금이고 사무장은 깊은 맛이 우러나는 막소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어떤 일이든 우직하게 최선을 다하는 사무장의 생활방식에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3

하루는 스님께서 서울 올라가시면서 빨래감 한보따리를 행자인 나와 사무장 앞에 던져 놓으셨다. 나는 내의와 검은 양말을 같은 솥에 넣고 삶았다. 삶은 빨래를 씻으려 개울가로 솥을 들고 가서 건져내니 내의가 검게 물이 들어 있었다. 스님이 멀리서 보고는 걸어오셨다.
“흰 내의를 망쳐놓았구나.”

사실 난 오래도록 자취생활을 해오면서 스스로 빨래를 해왔지만 내의를 단 한번도 삶아본 적이 없었다. 누구에게나 당연한 사실을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정신을 다른 데 팔고 실수를 했던 것이다. 스님의 호통이 떨어졌고 나는 넋을 잃고 하늘만 바라보았다.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할까. 그때 사무장이 다가왔다.
“행자님, 공양간에 들고가서 다시 삶읍시다.”
“어차피 못쓸텐데 버려야하지 않을까요.”
“할 때까지 해봐야지요.”

우리는 내의를 다시 삶고 몇번이고 빨았다. 내의의 검은 물이 다 가진 않았지만 몇 차례 빨고 나니 그런 대로 입을 만했다. 우리는 그것을 말려 스님에게 드렸다. 스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이미 일어난 결과를 인정하고, 그 상태에서 최선을 다할려는 사무장을 보며 나는 사무장이 결코 우직한 사람만은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사무장은 우직스러움이 아니라 언제나 변치않는 항심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예민한 스님과 항심있는 사무장의 공동 생활이 오래도록 가능했던 것이다. 더구나 종교에 대한 믿음이란 실은 약간의 우직스러운 신앙심이 필요할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작가의 길 역시 작심한 사건이 아니라 우연한 팔자 탓이었을 것이다. 나는 저자거리로 나와 구류의 인간, 소설가가 되어 시정의 가담항설을 늘어놓는 자가 되었던 것이다. 어느날 나는 스님께 한통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 이미 그 길로 들어섰으니 열심히 하여보아라. 너는 재주가 승하니 작가의 길이 맞을 것이다…… ’
나는 편지를 접고 참담하기 그지없는 심정에 사로잡혔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재주가 많다는 말이다. 나는 세상살이를 재주로 살아가기 보단 늘 변치않는 항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태도를 존경하기때문이다. 나에게 불법인연이 그렇게도 박하더란 말인가. 스님은 나에게 ‘그 짓을 그만두고 다시 들어와 승려생활을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하는 충고를 받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참다운 사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인연이 약했고 스님 말씀처럼 덕이 박한 탓이었을 것이다. 스님에게 편지를 받던 날, 우직스럽게 곧이곧대로 시키는 일만 하던 사무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요즘은 무엇이든 빠른 세상이다. 재치와 재간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 저런 일을 도모하며 세상을 이끌어 간다. 그러나 그런 세상의 일도 실은 우직한 사람이 뒤에서 묵묵히 밀어주기에 이 세상이 움직인다. 공부를 하는 일이나 사업을 하는 일이나 어떤 일을 도모하는 일에 있어서 발랄한 상상력도 좋지만, 결국 결단을 밀고가는 뒷심은 그런 우직함이 아닐까 한다. 신앙생활이나 깨달음의 길 역시 잔재주로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실은 모든 일에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단순함과 우직스러움이 요구된다. 부처님 역시 우직스럽게 한 길을 가지 않으셨던가. 가벼운 재주만 평가받는 시대에 우직함의 아름다움에 머리가 숙여진다.

■약력

박일문 님은 1992년 대구매일신춘문예에 소설 ‘왕비를 아십니까’로 등단. 같은해 소설 《살아남은 자의 슬픔》(창과창)으로 오늘의 작가상 수상. 소설에 《아직 사랑할 시간은 남았다》(민음사. 1995), 《장미와 자는 법》(문학수첩. 1996), 《적멸》(민음사. 1998), 《달은 도둑놈이다》(민음사. 2000)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는 《함께 보낸 날들》(깊은샘. 1997)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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