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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수용의 문제점(3)

기자명 고재석
  • 교계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특정 장르·작가에 편향 불교소개는 낭만적

(2)고등 국어의 경우 우리는 앞에서 정치적 외압으로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잠복한 대신 문학의 자율성이 강화된 중등 국어의 편찬 양상을 살펴본 바 있는데, 이는 국어 생활의 이모저모, 문장도, 현대시조, 고전의 세계, 국어에 대한 이해, 계절의 감각, 장편소설로 구성된 《고등 국어》 1(문교부, 1959)의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문학이 즐거움을 주는 활동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한 문학적 독서와 문학적 논의의 목표에 대한 어떤 설명도 완전한것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이런 편성의 제목에 굳이 이의를 제기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준, 모범, 원칙, 평균 등의 덕목을 갖추어야 할 교과서가 지나치게 특정한 작가나 장르를 선호하여 중심을 잃고있을 때 과연 그 교과서는 가장 교육적이면서 동시에 재미있고, 나아가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는 지침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까. 더구나 만일이런 평향적인 편성 때문에 학생들이 문학과 삶, 문학과 역사 또는 전통의관계에 정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그 문제의 심각성도 결코 적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우려는 가령 2장 `문장도'에서 잘 드러난다. 시조 작가이자 국토 예찬론자인 이은상의 문학적 공적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같은 장에서 그가 `이은상의 문장도'와 `나무국토대자연(南無國土大自然)'을 싣고 있는 점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뿐만 아니라 정비석은 《고등 국어》 1과 2에 `들국화'와`산정무한'을 싣고 있으며 노천명 같은 시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혹시이런 병폐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학연과 혈연, 지연 나아가 문단적 이해에 얽힌 결과가 아니었을까. 그런가 하면 지나치게 시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이 역시 편협한 선호의 결과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물론 시속에서 시조가 우대받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니다. 시조는 우리의 전통 문학양식이며 그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우대받을 조건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사설시조의 파생과 신시의 확립으로 시조가 역사적 표현양식이 되었다는 문학적 현실이 무시된 채 지나치게 우대만 하다보니 무리가 따른 느낌이 없지도 않다. 김상옥의 `십일면관음'의 경우 이런 우려를 혼자 감당해야 할 만큼 뒤떨어진 작품은 아니지만 이런 느낌을 말끔히 지워주고 있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석굴암의 십일면관음을 노래한 이 시조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오줏이 연좌(蓮座) 우에 발돋움하고 서서
속눈섶 조으는 듯 동해를 굽어보고
그 무슨 연유(緣由) 깊은 일 하마 말씀 하실까

몸짓만 사리어도 흔들리는 구슬소리
옷자락 겹진 속에 살결이 꾀비치고
도도록 내민 젓가슴 숨도 고이 쉬도다

전란의 비극과 혼란을 딛고 다급하게 외국의 문물을 수용해야 했던 당시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렇게나마 석굴암을 예찬하고 노래한 것만 해도 대견한 일 -이밖에 현진건의 `석굴암'도 실려 있다.-이기는 하지만, 이제 비로소 우리국토 그 자체가 박물관이라는 의식이 국민들 사이에서 싹튼 것과 비교하면여전히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은상의 `나무국토대자연'은 아직 진정한 의미의 나무국토(南無國土)가 아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국토와 역사, 문화와 예술, 사상과 학문에서 불교는 이미 특정한 종교의 영역을 초월한지 너무나도 오래이건만…. 이밖에 요즘 중학 국어에 수록된 방정환의 `어린이 예찬', 민태원의 `청춘 예찬', 이양하의 `신록예찬'이 실려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찬해야 할 우리 불교는 여전히 화석화된 전통과 애상적인회고주의의 대상으로 외롭게 방치되었던 것이다.

《고등 국어》 2 (문교부, 1959)는 보다 문학적인 자율성이 강화된 특성을 갖고 있다. 말하기와 쓰기, 수필·기행, 근대시, 영화와 연극, 독서, 고전, 국어 문자의 변천으로 이루어진 편성 세목을 보더라도 그렇거니와, 특히 2장근대시의 경우 서정주의 `시의 운율', 박용철의 `시적 변용에 대하여', `근대시초', 이헌구의 `시인의 사명'을 싣고 있어 더욱 그렇다. 그리고 5장 독서에 양주동의 `면학의 서'와 유진오의 `다독과 정독'을 싣고 있는데 이는 편자들이 문학작품에 대한 정서적 참여의 기회를 보다 많이 제공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작품이 우리의 인식을 확장하고 경험을 구조화하는 기능을 가진다면 이 편성 세목은 이에 걸맞은 체제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더구나 3장 `근대시초'에 실린 시인의 면모를 볼 때도 이런 긍정적 평가는 너무 지나치지않다고 생각된다.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 유치환의 `깃발',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김소월의 `진달래꽃', 김동명의 `파초',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광섭의 `마을', 노천명의 `푸른 오월', 이육사의 `광야', 윤곤강의 `나비' 등을 보면 골고루 그 시기를 대표할 만한 시인의 작품을 선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 전통문화, 특히 불교를 소개할 때 여전히 낭만적 회고주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과거에 친일 행각을 한 작가들의 작품을 무비판적으로 싣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그리고 지나치게 전통 서정시 일색으로 꾸몄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먼저 그 대표적인 예로 이광수의 `산거일기'를 들 수 있다. "이광수는 만지면 만질 수록 그 증세가 덧나는 그런 상처와도 같다. 한국 현대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지만 그의 친일로 한국정신사에 역시 감출 수 없는흠집을 만든 사람이 바로 이광수인 것이다"라고 김현이 말했듯이 이광수의 문학과 행위는 가능한 한 엄격하게 분석하고 비판하여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많은 평자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의견이다. 그러나 당시 교과서는 이런 공통된 합의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그의 글과 공적만을 실었다. 더구나 그가 만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쓴 `산거일기'를 실음으로써 불교는 오로지 몰주체적인 자비의 정신으로 이루어진 종교로 오해받기 쉬웠다. 한용운이 불교의 자유주의는 남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것으로 한계를 삼는다고 했듯이, 자비란 엄격한 자기 비판과 참회의 나날을 보낸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적극적인 선이지, 모든 죄를 무비판적으로 용서하고 수용하는 화해의 도가니만은 아닐것이다. 불교를 만일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다운 자비의 정신을 오도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니, 교활한 사람들이 불교의 자비 정신 뒤로 숨고 자신의 죄업을 은폐하는 것이 아닐까. 그의 `산거일기'는 이런 불교의 자비와 징벌의 경계를 모호하게 얼버무린 느낌이 강하다. 환옹대사(幻翁大師)가 보여준 무심무욕의 경지를 예찬한 부분과 장남 봉근의 죽음을 애도하는 대목으로 이루어진 이 일기에서 그는 불교의 정신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중생은 슬픈 존재다. 그 중에서도 앓고 죽는 양이 차마 볼 수 없도록 슬프다. 나고 죽는 것이 모두 헛것이요, 꿈이라 하더라도 슬프기는 마찬가지다.

선을 하고 앉았느라면 마음에 오고 가는 끊임없는 생각들이 모두 싱거운 것뿐이다. 아무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몇 겁(劫)을 앉아도 부처의 경지가 아니 나타나서 애썼다는 옛 부처의 심경도 이런 것인가?

시각형 지식인 이광수에게 불교는 여전히 관념적인 도피처의 하나였던 것 같다. 끝없이 자기를 합리화하며 과대망상 속에 살았던 그에게 불교는 무와 꿈이라는 환상으로 다가섰던 것은 아닌가. 그러나 선은 영혼을 해방하는 형이상학적인 기술이며 중생은 슬프기 때문에 더욱 소중한 또다른 나이며 부처이다. 그가 바라마지 않았던 무욕과 무심의 경지는 자기를 남의 위에 놓고 남에게 은혜를 베풀려는 시혜적 태도-교만과 자기 희생의 정신이 뒤얽힘-의 소유자가 다시 한 번 보여준 태도의 변신이었을지도 모른다. 불교는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정신을 함께 갖추었을 때 비로소 그 꽃을 피워 보여준다.

이렇게 이광수의 공적과 과실에 분명한 선을 긋지 않고 오로지 불교에 귀의하여 참학하는 모습을 담은 글만 실은 것 역시 교과서 편집자들이 갖고 있던시각형적 사고 나아가 몰주체적인 역사의식의 소산인지도 모른다. 노천명의시를 거듭 싣고 있는 것 또한 이런 결과의 하나로 생각된다. 만일 학생들이노천명이 1942년 2월 싱가포르가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그 감격을 이렇게 노래한 것을 안다면 그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동아 침략의 근거지
온갖 죄악이 음모되던 불야의 성
싱가포울이 불의 세례를 받는
이 장엄한 최후의 저녁
싱가포울 구석구석의 작고 큰 사원들아
너의 피를 빨아먹고 넘어지는 영미(英米)를 조상하는 만종을 울려라

어디 이런 경력을 가진 작가나 노천명이 이광수뿐만이었겠느가. 그러나 적어도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서만은 이에 대해 뚜렸한 비판의식을 내세우고이에 걸맞은 작가와 작품을 선정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요구인 듯하다. 아니 오히려 때늦은 감이 없지 안은 요구이자 논리라고 생각한다.

한편 앞의 교과서보다 3년 전에 나온 《고등 국어》 2 (문교부 1956)에서는전통문화에 대한 글들, 가령 손진태의 `고구려의 민족사상', 고유섭의 `미에대하여', 윤희순의 `담징' 등이 실려 있어 다행스러우나 그보다 뒤에 나온《고등 국어》 3(문교부, 1963)에서는 이런 전통 지향의식이 많이 사라진 느낌이 든다. 현대 생활과 국어, 단편소설, 문학과 인생, 우리말과 글의 옛 모습, 국어의 장래, 우리의 고전문학, 국문학의 전통으로 구성된 《고등 국어》3에서 불교에 대한 글은 거의 없는 것이다. 문학작품들은 내포적인 의미에서불가피하게 도덕적이며 자신의 삶을 인도하고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방법에관계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국어교과에서 올바른 가치관과 역사 인식, 그리고 전통의식의 함양을 요구하는 것은 특정한 종교의 옹호를 위한 군색한요청인 것만은 아닌 것이다.


고 재 석/동국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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