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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성의 근대불교 인물탐구-8. 대중불교

기자명 허우성
  • 교계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불교는 출가자라는 소수의 엘리트를 위한 종교로 그칠 수는 없다. 일반대중은 보다 친근한 것과 실천가능한 것을 바란다. 이런 바람에서 대중불교또는 민중불교가 나왔다. 현재 대중불교의 수용주체가 주로 재가여성신도이므로 보살불교로 부를 수도 있다. 보살들에게 중요한 것은 산속에서의 도닦기나 무위행, 법맥이 아니라, 인과응보설에 기초를 둔 선행이다. 이 불교는 인간의 복과 명을 비는 기복불교적 성격을 띤다. 가장 많은 수의 불자를 거느린 유형일 것이다. 필자는 대중불교를 크게 두가지로 나눈다. 전통적인 관음신앙과 그것의 현대적인 모습이라 부를 만한 생활불교이다.


가)권법성(1914~)의 관음신앙

전통적 신앙관음신앙은 삼국시대부터 널리 보급되었던 전통적인 유형의 신앙이다. 권법성은 운동의 형태는 아니지만 이런 관음신앙을 계승하고 있는 것같다. 자서전이 출간된 이후 3년만에 40만부 정도가 팔려 나간 것을 보면 관음신앙이 상당한 호소력을 지닌 것임을 알 수 있다. 법성이 불교에귀의하게 된 동기는 구병과정에서의 관세음보살의 가피력에 대한 경험과 신앙이었다. 그녀는 관세음보살의 가피력에 대한 신비적 체험과 타력적 신앙을 가지고 있다. 병은 악업의 결과이며 구병은 참회를 수반한다는 인과응보적 윤리의식도 있다. 관세음보살은 종종 꿈에 나타나 길흉화복을 예견하고 경고하며, 도량이 들어설 터를 점지하기도 한다. 법성의 관음신상은 기본적으로 《법화경》의 `보문품'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관세음보살을 명호하는 사람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탐진치의 삼독도 녹인다. 또한 관세음보살의 자비와 공덕은 무량하여 몸으로 예배하고 공양하면 일체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고 고통도 제거해 주신다.


대승적 보살종교

법성은 부처님의 계심과 불보살의 은혜가 크심에 대하여 증언해야 할 사명감을 느껴 출가했다 한다. 이런 고백은, 법성 나름의 보살도, 대승적 정신, 중생제도의 표현이다. 두 번째 수필집인 《자네도 부처님 되시게》의출판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부처되기란 매우 쉬운 것이라는점을 말하고 싶다는 소망이며, 또 하나는 출가자들의 소승적 성격에 대한 비판이었다.

법성에 따르면, 소승불교와 다름없는 지금의 한국불교의 승려들은 구도를제일로 알아서 고통받고 있는 중생들을 품어 제도하는 일을 등한시해 왔다. 이제 이를 시정하여 대승적 견지의 새로운 종교 운동을 펴야 할때이다. 깨달음이 서방정토처럼 살기 좋은 곳을 이승에 건설할 수 없다면 다 소용없는 일이다. 법성의 글에는 수많은 중생의 소원과 그것들에 대한 관세음보살의 응답이 실려 있다. 그 소원에는 사자의 영혼을 위한 천도, 구병, 원수와 천마의 진압, 결혼, 취직, 아들 딸 얻기, 재물얻기, 평온, 일체장애의 극복등 흔히 경험되는 일들이다. 그 저서에는 양재초복이란 관음신앙의 근본이 잘나타나 있다. 법성은 삼세인과설을 신봉한다. 응보는 원인보다 상당히 늦어질 수 있으니, 착한 사람이 잘못되는 것은 전생의 업보이다. 응보의 과정에는 구원자로서의 부처님의 관여도 있다고 믿는다. 인과응보설은 환생에 대한 신앙으로 이어진다. 환생에 대한 법성의 여러 얘기를 문자 그대로 믿기어려운 점도 있지만, 윤회의 철칙을 알아 죄를 짓지 말고 이승에 살아 있을 때 최선을 다해 내생을 준비해야 한다는 윤리적 당부는 뚜렷하다. 소원성취
를 위한 기도는 불공을 수반하고, 소원성취는 불공의 결과로 본다. 여기서 우리는 불공과 공덕 사이에 존재하는 보상적 인과응보설에 대한 믿음과 한국불교 전체의 경제적 기초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개인적 가족적 윤리

법성과 그의 신도의 윤리는 매우 개인적이며 가족적이다. 자서전안에 `일제 때의 정신대', `침략자 일본인'과 `겨레의 앞날'이란 말이 있고, 수많은 역사적 정치적인 사건들도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사건에 대한 이해는 개인적이고 가족적인 수준에 머문다. 80년의 법난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선우도량의 구성원들이, 이 법난을 한국불교의 자주적 위상이나 역사적 사명의 결여를 심각하게 반성하는 계기로 삼은 점과는 큰 대조를 이룬다. 법성의 관세음보살은 집권층과 가진 자의 횡포가 만드는 정치적인 신음소리에 좀 어두운 것 같다. 또한 수많은 현몽 가운데서도 민족과 나라의 운명에 관한 꿈도 잘 보이지 않는다.


결론

법성이 대변하고 있는 관음신앙은 많은 보살들의 불교이해와 실천을 반영하고 있다. 그들은 소망하는 일체의 대상을 구하고 지키기 위해서 관세음보살을 호명하면서 기도하고 재를 올리도록 권유받고 있다. 개인적이며 구복적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관음신앙은, 불교를 일반중생의 가장 내밀한 소망을 들어주는 종교로 만든다. 조선에도 불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큰이유가 이런 신앙 때문이라는 주장이 옳다면, 또다시 탄압의 시절이 온다하더라도, 끝까지 견딜 수 있는 불교의 유형 중에 하나가 관음신앙과 같은타력적 기복적 불교가 아닐까? 박한영은 인문이 발달하고 사욕이 극복되어대동문명이 도래하면 복리와 소승적 이익을 강조하는 불교보다 해탈법과 이타법을 실천하는 사람이 많을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요즘의 관음신앙의 성행을 보면 그의 진보관이 반드시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관음신앙이 비록 대승이나 보살행의 이름을 빌렸지만 불교를 현세적 이익에 따라 지나치게 세속화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이런 신앙은 성철의 오매일여의 경지에서 보면, 세속화한 것이고 타협한 것으로 역행이 되고 만다. 순수선의 입장에서 타력적 신앙을 비판하고 무시하는 것보다 그 한계를 지적하고, 개인과 가정의 관심사에서 나라와 민족의 운명에 대한 관심으로 신앙을 확대할 것을 일러주는 것이 나을 것이다. 복지불교에로의 관심과 실천은 보다 열린 불교에로 인도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나)이지광(1950~)의생활불교

이지광은 무력한 한국불교를 힘의 종교로 만들어야 하겠다는 원을 가지고 있다. 고려 때 개경과 전국 각지가 부처님 전의 연등공양으로 불야성을 이루었듯이, 그런 불교의 성공을 오늘날 서울에 재현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는것 같다. 능인선원의 불교는 그 성공과 함께 포교의 실상과 그 문제점을 보여주고, 기독교의 득세와 공격 속에서 불교의 생존과 세력확장을 위하여 그것이 얼마나 현대화되고 세속화되어야 하는가? 현대사회에 불법의 변용의 한계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중대한 화두를 던져 주고 있다.

지광은 전통적 선불교의 교육이나 수련을 받은 흔적이 없다. 안거의 기록이나 특정한 법맥을 잇는다는 말도 없다. 강원도에서 태어나 학업을 위해상경하여 고등학교와 대학교육을 받고 신문기자를 지냈다. 그러나 해직기자가 되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그는 참담한 고난을 겪으며 삶과 권력의무상을 체험하고, 지리산과 태백산 등에서 수행을 거듭하다가 85년 서울의 아파트의 상가건물에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11년이 지난 1995년 법회에 참석하는 사람의 숫자, 불교학교의 활발한 운영, 사회복지법인 능인선원의 완공으로 도심포교의 성공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새 불교언어의 도입

지광은 불교가 변해야 한다고 본다. 그는 출가 이후 항상 "불교가 너무사회성이 약하고 또 힘이 없다"고 생각해 왔다. 수많은 십자가들이 서울을휩쓸고 있는데 `이뭐꼬'만 하고 앉아 있으라는 큰스님,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교리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 얘기들, 이 모두 문제이다. 절마다 신도들이 줄어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에 부처님의 진리가 손상되지않는 한에 있어 "현시대적 언어"가 필요하다. 만일 불교가 역사성과 시대성을 외면하고, 대신 기독교가 이 시대의 언어와 사회성으로 대중을 유혹하게 되면, 불교는 화석의 종교로 도태될 수밖에 없다. 진정한 불교는 `힘의 종교', `생활불교', `현대성을 갖춘 불교'여야 한다. 능인선원의 소명은 불법중흥의 대임을 성실히 수행하고, 불법의 맥을 잇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는데 있다. 여기서의 불맥잇기는 경허와 성철의 불조혜명잇기와는 달리 숫자와 세력, 단결된 행동으로 나타난다.


행동의 불교

재가중심의 불교는 전문 선사들의 불교와 다를 수밖에 없다. 참선만이 최상승일 수도 없고, 문자, 기도, 염불을 배격하는 태도도 바르지 못하다. 대승보살의 길도 있고, 기도도 하는 등 모든 도리를 다해야만 한다. 그것이 모두 불교의 참다운 도이기 때문이다. 재공양을 강조하기도 했다. 조상천도를 위해서는 우란분재를, 선망부모 영가님들의 왕생극락과 살아 있는 사람의 생전의 죄업을 미리 닦기 위해서는 예수재를 지내야 한다.

지광에게 불교는 행동과 보시행의 종교이고, 불자는 행동하는 진리의 표상이어야 한다. 이 사회가 혼탁한 이유는 행동하는 불자의 수가 적기 때문이다. 지광이 내세운 모토는 `행동하자', `실천하자', `기도하자'는 것이며행동, 실천, 기도가 실제 생활 가운데 펼쳐지지 않으면 모두 공염불에 불과하다. 그래서 지광의 불교는 생활불교이다.

지광은 선악을 분명히 나누어 선행을 권한다. 선악의 양면이 존재하는 현실세계에서 선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악이다.지광은 따라서 선악을 초월하는 깨달음의 세계, 즉 불사선불사악의 중도를 비판하며, 불교를 해탈도인의 불교와 일상인의 불교로 이분하고, 후자를 행동의 불교로 보고 있다.

행복론과 성공론으로의 불교

생활불교는 일상인에게 행복과 성공을 약속한다. 불교는 세속에서의 인생승리자가 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며, 불경은 행복론을 담고 있다. 해탈이나 행복은 순수선의 영원한 행복이 아니라 세속에서 발전지향적 인간이이를 수 있는 것이다. 지광은 《금강경》을 비롯하여 여러 경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소의경전으로 삼은것 같지 않다. 행복과 성공에 도움되는 말이라면 출전은 문제되지 않는다. 그는 또한 불경의 한 구절과 카네기(A. Carnegie:1835-1919)등의 이른바 성공적 인사들의 말을 나란히 인용할 수 있었다. 필요한 말이라면 문헌의 확인없이 석존에게 가탁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반성적 태도

지광은 현대를 인간의 능력이 자본으로 환산되는 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하고, 근면과 성실을 부의 원천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사회제반 양상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지닌 사람에게는 재물은 오지 않는다. 재화축적만이 아니라 그 재화를 사회환원하는 일, 분배 또는 보시의 면에서도 카네기는 모범이다. 그에게 카네기는 `진정한 의미의 부처님의 제자'였다. 선인선과의 불교전통적인 인과설이 이제 자본주의에 걸맞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잘 살수 있다"라는 슬로건을 바뀌었다. 부를 창조하고 불사를 돕는 사람이면 그는 훌륭한 불자로 불릴 가능성이 많다. 지광에 따르면, 부처는 근면 성실하게 끓임없이 부를 축적하고, 올바르게 활용하라고 말한 분이다. 불교가 가르쳐 주는 돈벌이의 길은, 부자될 마음을 가질 것, 돈을 중요하게 여길 것, 적은 돈이라고 허술히 대하지 말고 뭉쳐지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 등이다.


결론

행복과 성공을 초점으로 하는 생활불교는 현세이익적이라는 점에서는 전통적 관음신앙과 유사하다. 차이점은 조직과 단결에 대한 강조일 것이다. 최근 한국불교는 유례없는 교세확장을 이루었다는 일부 불교도의 자체평가에 지광불교와 같은 도심의 생활불교가 일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불교는 세속화의 위험 앞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지광 자신도 새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부처님의 진리가 손상되지 않는 한"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이런 조건은 충족되었을까? 순수선의 입장에서 이런 불교는 세속앞에 불교를 죽였다고 할 것이다. 지광불교의 타력적 성격과 기독교적인 색채를보면, 부처님, 관세음보살을 하나님으로 대체하더라도 의미가 잘 통할 것으로 보인다. 하필 불교를 믿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또는 부처를 배우는 것과 카네기를 배우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지광의 설법 가운데 불교는 개성적인 자기를 추구하는 종교라고 말하는대목도 있다. 또 부처님의 진리가 상대성의 타파였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순수불교를 지지하는 듯한 이런 구절들은 생활불교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나 고민은 없다. 현대사회에서의 행복추구라는 생활인의 요구와, 고전적인 가르침으로서의 불교 사이에 응당 존재해야 할 긴장이나 갈등이 잘 안보인다.


허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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