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듯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는 `죽음에로의 존재'인 인간이기에 신체적 건강과 물질적 풍요, 쾌락과 명예만으로는 완전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에 의해 실존적 불안과 허무감까지 제거할 수는 없으며, 따라서 그것들은 결코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가 없다. 타고르는 "죽음이 당신의 문을 두드릴 때, 당신은 무엇을 바치렵니까?"하고 묻고 있지만, 사실 지금 우리 모두가 숨막히게 좇고 있고 애타게 매달리고 있는것들 중 죽음 앞에서 의미를 갖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거의 대부분이 아마도 부질없는 것이리라. 그러기에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인간의 운명을 꿰뚫어 본 싯달타 태자는 그 서슬퍼런 권세와 꽃다운 사랑을 헌신짝처럼 버렸을 것이다. 태자는 목마른 사슴은 아지랑이를 좇지 말고 물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던 것이다.
종교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시지프스의 바위를 굴리며 죽음의 나라에 충성하는 삶으로부터 탈피하여 구제, 즉 `인생의 궁극적 가치와 의미'를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 궁극적 가치와 의미를 성취하기 위해서 종교는 `궁극적 실재'(Ulitmate Reality)를 지향한다. 릴케는 궁극적 실재의 개념을 그의 시 「가을」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잎이 진다. 멀리에선 듯 잎이 진다.
마치 저 하늘의 먼 정원이 시드는 듯,
거부하는 몸짓으로 잎이 진다.
그리고 밤마다 무거운 지구가 떨어진다,
모든 별들로부터 고독의 심연으로.
우리들 모두가 떨어진다. 이 손이 떨어진다. 그리고 보라 다른 모든 것들
을, 낙하는 모든 것 속에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이들 낙하를, 무한히
부드럽게 두 손으로 떠받고 있는
일자(Einer)가 있다.
물론 일자, 즉 궁극적 실재의 개념은 종교에 따라 사뭇 다르다. 하지만 불교를 위시한 모든 종교는 이 궁극적 실재의 빛에 의해 우리의 삶에 윤기와 푸르름을 더해 주고 수갈래로 어긋나 있는 일상을 하나의 통일된 고리에 꿰어준다. 더 나아가 자유와 책임, 권리와 의무가 티격대지 않게 하며 마침내 너와 나, 삶과 죽음, 그리고 존재와 무가 서로 손잡게 하는 것이다.
박경준 /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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