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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천과 불영사

기자명 박제천
  • 불서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잊지 못할 산사의 하룻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2월, 무슨 까닭인지 무조건 절에 가서 공부룰 하겠다는 생각에 빠졌다. 조계사에 무턱대고 전화를 걸어 울진에 있다는 절이름만 알아둔 채, 무작정 길을 떠났다.

서울 태생인데다 시골에 친척도 없기에 처음으로 객지에 나서는 길이었다. 중앙선을 타고, 미지의 절로 가는 마음은 사뭇 설레었다. 절집의 생활이 어떠한지도 모르고, 그곳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길떠남의 환상에 빠져들었다. 때로는 망명객처럼 비장하기도 했고, 때로는 금의환향의 꿈에 홀려 콧노래를 불렀다. 순간순간 천변만화하는 심정이어서 다잡을 수도 없었다.

울진에 당도해서는 먼저 졸업생 명부에 찾아둔 동창 집에 사전 연락도 없이 들이닥쳐 하룻밤 잠을 자고는 그에게 절로 가는 길을 물었다. 차편을 찾기보다는 한두 시간 산길을 가면 바로 불영사가 나온다는 동창의 말을 듣고는, 더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실행에 옮겼다. 참으로 무모한 일이었지만, 그 정도로 앞뒤 생각 없이 마음대로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천둥벌거숭이였다. 이윽고 산길로 접어든 지 꽤 오래 되어도 산길은 깊고, 인적조차 없었다.

절이 나타날 낌새도 없었다. 절에서 점심을 할 요량이었으므로 따로 도시락을 챙기지도 못했었다. 비상으로 갈무리해둔 술로 겨우 시장끼를 지운 채 계속 산 속으로 들어갈 따름이었다. 길을 못찾으리라는 걱정 따위에 시달리기커녕 주흥이 도도해진 채 오히려 깊은 산속의 적막을 찬탄하며, 시끄럽고 더러운 서울 생활의 탈출을 자축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이 다니던 길은 이미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담배를 피며 쉬었던 자리에 되돌아와서 내가 버렸던 담배꽁추를 확인하고서는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아 버렸다. 그때의 참담한 심정은 지금도 돌이켜보고 싶지 않다. 그날 새벽 2시나 되어서야 그야말로 악전고투 끝에 절을 찾았고, 불목하니의 방에 인도될 때는 엉금엉금 기어들어갈 정도로 지쳐버렸다. 굶주림과 비에 젖어 입조차 얼어버린 나를 더욱 기막히게 만든 일은, 그곳에서는 이제 학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청천 벽력과 같은 선언이었다. 방침이 바뀐 지 벌써 한달이나 지났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햇빛이 화려하게 물들인 계곡의 아름다움을 등에 둔 채, 나는 다시 절을 찾아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불영사에서의 일박은 내 마음에 평생 지워지지 않는 불도장을 커다랗게 찍어준 셈이었다.



박제천 (시인, 문학동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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