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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쉬운 불교교리 - 불교와 회의주의

기자명 이병욱
  • 불서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고정관념 버리면 진리가 보인다

자장율사의 실수

자장율사가 남루한 차림에 죽은 강아지를 칡 삼태기에 담고서 나타난 문수사리보살을 알아보지 못했던 건 그만큼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예입니다. 사람의 외형은 그 사람의 내면과 연관관계가 있다는 그런 선입견 말입니다. 처음 만났는데, 꾀죄죄한 인상을 주면, 그 사람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기 어렵습니다. 그에 비해, 깔끔하게 입고 산뜻한 인상을 주면, 아무래도 호감이 가는 건 사람이면 누구나 가질 법한 감정입니다. 이런 생각을 자장이 했던 것인데, 이런 선입견을 가슴에 품고 사는 한, 진리를 볼 수 없다는 걸 자장의 일화는 일깨워줍니다.



성급한 판단은 금물

선입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선 해야 되는 것은 어떤 판단에 대해서 과연 그것이 옳은 것인지 판단을 유보하는 자세입니다. 남들이 다 옳다고 믿고 있지만, 과연 그게 정말로 그런 것인지 자신의 입장을 다시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아닌 걸 그렇다고 주장하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불교가 막 일어나던 기원전 6세기경에 판단중지를 가르친 스승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산자야 벨라티풋다입니다. 이 사람에게 내세가 존재하는가? 라고 물으면,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표현하지 않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답변합니다. 그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해 이렇게도 생각하지 않고, 저렇게도 생각하지 않으며, 다르게도 생각하지 않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지 않지도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빠져나가는 것이 뱀장어 같은 느낌을 줍니다. 뱀장어를 손으로 잡으려 하면, 미끈 미끈거려서 잘 잡히지 않는 걸 연상시킵니다. 이것이 특정한 것을 주장하지 않는 회의주의입니다. 이런 회의주의 도움 없이 세워진 강한 신념은 모래성과 같은 존재가 되기 쉽습니다. 마치 연애기간이 어느 정도 되어야 결혼해서 배우자를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급하다고 덥석 결혼하면 그 땐 물르기 곤란할지도 모릅니다.

미국을 테러로 공격한 집단의 정체에 대해 판단을 한다고 합시다.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사실로 인해서 오히려 자신의 시야를 가리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기보다는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 더 넓은 지평을 확보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얻은 정보에 중립을 지키고 냉정하게 바라보려는 자세가 판단중지의 입장입니다. 이 경우 결단성은 없겠지만, 섣불리 성급한 판단을 내리게 하는 위험에게 자신을 보호해주는 순기능도 있습니다. 전문가와 아마추어를 비교하라고 하면, 이 판단중지를 제대로 활용하는가 아닌가에 있다고 봅니다.



냉정한 중립자세

전문가는 어떤 판단을 내리기 전에 여러 정보를 가능한 한 모으고, 냉정하게 판단하려고 하지만, 아마추어는 몇 가지 정황정보만 있으면 그걸로 사실이 그렇다고 속단하고 앞질러 갑니다. 이렇게 앞질러 갈 때, 사람을 덮고 있는 무지의 베일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습니다. 판단중지는 진리가 무엇이라는 걸 가르쳐주지는 못하지만, 무엇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밝혀줍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이제 진리에 다가설 가능성은 훨씬 열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백지의 유익함

산자야의 제자 중에 부처님의 10대제자 중에서도 핵심적인 인물인 사리불과 목건련이 있었다는 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은 제자 250명을 거느리고 부처님께 귀의하였습니다. 이들이 불교의 이치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던 힘도 무엇이 진리가 아니라고 버릴 수 있었던 판단중지에 숙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아니고 저게 아니라고 버린 상태는 백지의 상태입니다. 백지에 글씨 쓰기는 쉬운 법입니다. 이미 노트에 뭐라고 잔뜩 써놨으면 그 때는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써야 하는데 그러자면 노력이 더 들게 됩니다. 그와 같이 판단중지를 통해서 잘못된 선입견을 버린 상태에서는 올바른 이치가 빠르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무상(無常)이고, 고(苦)이고, 무아(無我)라고 부정적인 표현을 자주 즐겨 쓰는 배경도 잘못된 선입견을 뿌리뽑기 위해서 입니다. 잘못된 선입견이 사라지면, 진리의 세계는 저절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판단중지는 불교의 세계로 들어오기 위한 중요한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병욱 (고려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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