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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칼럼 - "고정 간첩 5만"의 유령

기자명 리영희

세상에 바람 좀 잘 날은 없을까?

요새같이 세상이 떠들썩하고 민심이 흉흉해서야 사람이 한 시인들 마음놓고 살수가 있나! 이 나라 백성들에게는 하루일 끝나고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어가는 것도 바랄 수 없는 사치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정말로 한심한나라이고 불쌍한 백성이라는 생각이 하루에 백번도 더 든다. 왜들 이럴까?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지난여름에는 무슨 잠수함이 동해안에 나타났다고 가을 겨울을 이어서 강산에 피비린내가 떠돌고 포성이 울리고 화약 냄새가 자욱하더니, 다음에 사이비 종교 교주가 세상 사람들을 분노에 떨게 한 것도 부족해서 총을 훔친 군인들이 우리를 튀어나온 짐승처럼 날뛰는가 하면 "장발장"을 흉내낸 장기수탈출로 전국 방방곡곡에 설치된 검문소를 지날 때 마다 나는 "무죄"를 입증해야 한다. 이 나라 국민 모두와 누구나가 잠재적 흉악범이나 도피자라는 전제하에서 매일 매일을 살아야 하니 이게 어찌된 사회인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몇 달 동안 계속된 안기부법, 노동법 개악에 따르는 아비규환이 한물가는가싶더니, 이번에는 북한인들의 일가족 탈출 소동과 거물 망명객이 몰고온 국제적 충격으로 들끓고 있다. 그 때문에 해방 이후 반세기의 대한민국 역사상가장 파렴치하고 가장 추잡하고 가장 음흉하고 가장 뻔뻔스러운 정치권력과돈이 결탁한 소위 "한보사태"라는 천인공노할 권력자들의 부정, 부패 사건소동은 우물주물 백성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한보사태로 궁지에 몰린 권력자들에게는 마치 구세주처럼 나타난 것이 10여년전에 이 나라에 들어와서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의 관리 보호하에서 있는 듯없는 듯 유령처럼 존재했던 이한영이라는 젊은 북한인의 피격사건이다. 이건또 무슨 날 벼락이냐? 이 나라의 매스컴은 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밤과낮을 이어서 중국의 수도 북경에서 북한 거물 황장엽 망명사건,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이한영 북한 귀순인 피격사건을 가지고 그들의 특기인 소설을쓰고 픽션을 만들어 내느라고 세상이 온통 시끄럽다.

지구의 종말이 닥친 것 같은 정부와 매스컴의 소동으로 정작 밝혀져야 할 "한보사태"의 흉하고 추한 정체가 안개 속으로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그자리에 과거에 이럴 때마다 모습을 들어냈던 낯익은 유령이 또 나타났다. "남한 고정간첩 5만명!" 또는 "3만 5천명!"

뭐라고? 그것은 국가의 존망에 관한 문제이다. "고정간첩"이 5만명이라면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그 5만명이 그 동안에 가령 각기 다섯명씩의 간첩을만들었다고 가정한다면 북한의 간첩이 25만명이나 있다는 계산도 가능하다!황장엽 망명 사건과 이한영 피격사건으로 남한사회가 느닷없이 온통 북한간첩의 소굴인 것처럼 정부기관들과 여당, 공안당국들이 야단이다. 그것이 정말이라면 정말로 야단이다. 그런 발표와 주장의 10분의 1이 정말이라도 야단이고, 100분의 1일 정말이라도 야단임에는 변함이 없다. 심지어 5만분의 1이라도 역시 중대사이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그런데 해방후 50여년 동안, 더욱이 지난 역대 군사정권 시대에 국내 정세가정권이나 지배집단에 불리하게 전개될 때면 의례 그와 비슷한 발표나 주장들을 자주 들은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야당과 시민 단체들 그리고, 평소에는 경찰, 검찰, 안기부 등의 이같은 발표문을 오히려 몇배씩 "부풀리기"를해온 권력지향적인 소위 "언론기관"들조차 이번에는 반응이 사뭇 다른 것 같다. 그들은 이렇게 질문하고 있다.

"그렇다면 안기부나 경찰은 그 동안 뭣을 하고 있었는가?""매년 수 천억원의 예산을 쓰고 국회(국민의 대표기관)에서 그 명세도 밝히기를 거부하는 안기부는 그 막대한 예산을 어디에 썼는가?""5만명의 고정간첩이 있다면서 왜 체포하지 않고 국민에게 겁을 주기만 하는가?"

"대통령선거의 해에 선거용으로 조작된 유령은 아닌가?"

"안기부법 개악을 강행하려는 정치적 의도와 무관하다 할 수 있는가?"

"황장엽이 그렇게 말했다는데 그의 망명동기에 관한 자술서라는 것은 공개하면서 황이 고정간첩에 관해서 기술했다는 것은 왜 공개하지 못(안) 하는가?"…등등이다.

이런 궁금증에 대한 정권측의 해답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5만명 고정간첩" 소동은 안기부가 10여년 동안 보호, 관리해온 미스테리의귀순자 이한영씨의 피격사건을 계기로 국가적 위기상황으로까지 증폭되고 있다. 경찰 정보 당국은 이한영씨가 총맞고 쓰러질 때 두 손가락을 뻗쳐보이면서 "간첩"이라고 말한 것을 들었다는 아파트 남성화(43) 여인, 박종은(46)씨, 그리고 경비원 김제희(60)씨의 말을 "확고한 증거"라고 주장하고 그렇게발표했다. 매스컴도 그렇게 대대적으로 떠뜰었다. 우리도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고정간첩 5만명이라는 위협!

그런데 이건 어찌 된 셈인가? 오늘 신문을 보니 그 "증인"이라는 사람들이경찰의 주장과 발표를 부인했으니 말이다. 그들은 신문기자회견에서 "경찰의조사과정에서 `간첩이다'라고 들었다고 말하라기에 그렇게 진술했다"고 폭로했다.

이런 일을 두고 귄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해괴한 일이 총탄을 분석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결과도 경찰이 주장한 "간첩용 권총"의제원과 다르다는 사실을 밝혔다. 미스테리의 귀순자 이한영씨의 그간의 행적과 사생활이 난잡했던 여러 가지 사실과 그를 관리해온 안기부와의 관계가최근 좋지 않았다는 사실들도 신문기사로 드러나고 있다. 이거야말로 007같은 이야기다.

범인은 누구일까?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왜 갑작이 고정간첩 5만명설이나왔을까? 왜 하필 이런때에 이런 소란일까? 이 나라의 국민은 언제나 평안한 믿음으로 밤잠을 잘 수 있으려나? 답답한 마음으로 자문자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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