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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식과 정취사

기자명 홍윤식

생사의 기로 함께 한 암자

‘고향’이라는 단어만큼 푸근함을 전하는 말이 또 있을까.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담고 있는 고향은 언제 떠올려도 흐뭇한 미소와 따뜻함이 느껴지는 하나의 정토인 듯 하다. 나의 고향은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명 모례리다. 지금이야 관광코스도 개발되고 이런저런 볼거리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지역이지만 어린 시절 우리동네는 그야말로 산골짜기 시골이었다. 그런 시골 동네에서 가까이 있는 사찰과 암자는 어린 우리들에겐 놀이터나 다름없는 친숙한 공간이 되어주었다. 특히 우리 집은 사찰과 어찌나 가까웠던지 새벽 예불소리며 종소리는 물론 염불소리와 신도들의 기도소리 까지도 고스란히 들려올 정도였으니… 조금 과장해 표현하자면 어디까지가 절이고 어디까지가 집 마당인지 소리만 들어서는 구분이 안될 정도였다. 아침에 들려오는 낭랑한 예불 소리와 해질녘의 종소리 속에서 어린 나는 자연스레 불자가 됐다. 고등학교 역시 해인사가 설립한 종립 학교인 해인농림고등학교(현재 동명고등학교)로 진학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불교와의 인연이 보통은 넘었음에 틀림없는 듯하다.

고등학교 재학시절이었다. 여름 방학을 맞아 오랜만에 집을 찾았는데 그날 따라 정취암에서의 기도 소리가 유독 끊이지 않고 들리는 것이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아직 애티가 묻어나는 어린 여자의 목소리는 그렇게 밤을 세워 가며 관세음보살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며칠이 지난 후 나는 그 목소리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린 16살의 소녀가 치병을 위해 드리는 간절한 기도소리였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그 간절한 기도의 목소리는 내가 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갈 때까지 근 한달 간이나 계속됐다. 그리고 그 후로도 오래 동안 그 소리는 내 기억에 생생히 남게됐다.

그후 세월이 흘러 내 나이도 마흔 줄에 접어들었을 즈음이니, 지금부터 어림잡아 20여 년 전이다. 나는 위암 판정을 받고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됐다. 지금도 암은 치료가 어려운 병이지만 당시 위암 판정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환자의 처지가 되어 입원하며 나는 관세음보살 한 분을 품고 들어갔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관세음보살에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 시절 들었던 그 소녀의 간절한 관세음보살 기도 소리가 그때까지도 내 마음 속 어딘가에 살아있었던 것이다. 입원해 있는 동안 암 환자를 상대로 집요하게 계속되던 타종교의 개종 유혹을 뿌리치고 오직 일념으로 관세음보살을 찾았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비교적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었으니 이 역시 관세음보살의 가피가 아니겠는가.

지금도 해마다 한 두 번은 고향을 찾는다. 그리고 그때마다 꼭 정취암을 참배한다. 어린 시절 내 눈에 정취암은 신라시대 때 창건했다는 동네 어르신들의 말씀까지 어우러져 더 없이 크고 웅장한 사찰로 비춰졌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보면 정취암은 그리 크지도 웅장하지도 않은 그저 작고 소박한 암자일 뿐이다. 새로 일으킨 불사들로 인해 눈에 익숙하던 정경들도 꽤나 많이 그 모습이 바뀌었다. 하지만 나를 불자의 길로 이끌고 생사의 기로에서도 질긴 희망의 끈을 내밀어 준 정취암의 그 ‘정취’는 반백의 세월이 넘은 지금도 변함없이 가장 푸근하고 따뜻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홍윤식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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