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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는 대승 옷 입은 힌두교”

기자명 마성 스님
  • 기고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1

[기고]마성 스님, 김용표-진현종 씨에 반론

포용-관용성 때문에 순수불교 갈수록 희석

역사적 붓다 외면하면 외도로 빠질 가능성 높아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이 김용표 동국대 교수(본지 647호)와 불교저술가 진현종(본지 649호) 씨의 대승불교론에 맞서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의 주장(본지 648호)을 옹호하는 글을 보내왔다. 이에 대한 이견이나 반론이 있다면 다음 호에 게재한다.(편집자)



김용표 교수의 기고문을 계기로 시작된 이번 법보신문의 지상 논쟁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기대 이상의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는 토론의 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논쟁이 감정 대립이 아닌 예의와 격식을 갖춘 건전한 방향으로 진행될 경우, 토론 참여자는 물론 일반 불자들의 불교에 대한 안목을 넓히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리라 믿는다.

김용표 동국대 교수와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간의 주된 쟁점은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 그리고 신앙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필자는 여기서 주로 대승불교의 신앙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어보고자 한다.



한국불교는 타락한 대승불교

불교의 출발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이다. 후대 불신관(佛身觀)의 변천으로 다불(多佛) 다국토(多國土) 사상으로 전개되었지만, 대승불교의 모든 신앙형태, 즉 관음·지장·아미타불 등도 최종적으로는 역사적 붓다에 의존해야 한다고 본다. 만일 역사적 붓다로 회귀하지 않으면 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나거나 외도로 빠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불교의 정체성과 기준을 역사적 붓다와 초기불교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김용표 교수는 “신앙의 가치를 역사주의에 입각한 정법주의 잣대로 쉽게 비하할 수 없는 차원이 엄존한다”라고 했다. 또한 그는 “편협한 진리주장에서 벗어나, 대소승의 구분은 물론, 종교와 불교라는 개념에서도 벗어난 열린 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불교의 정체성을 희석시키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불교의 포용성, 관용성, 그리고 원융성 등으로 말미암아 순수한 불교의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인도의 후기 대승불교가 여러 가지 힌두교의 사상을 받아들임으로 해서 인도의 불교는 힌두교 속에 습합되어 버렸다. 또한 중국에서는 도교와 유교의 습합으로 중국화 되었고, 일본에서는 신도(神道)와 습합하여 일본화 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재래 무속신앙을 받아들여 불교의 무속화 혹은 무속의 불교화가 진행되었다. 그래서 어디까지가 순수불교인지 모를 정도로 희석되어 버린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처럼 변형된 불교의 형태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승불교라고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모든 문제가 파생되는 것이다. 현재의 한국불교 현상을 대승불교라고 보기 때문에 초기불교 지상주의를 경계한다는 논리가 전개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현재의 한국불교는 순수한 의미의 대승불교라고 보기 어렵다. 대승불교라는 이름을 띤 바라문교 혹은 대승불교라는 옷을 입은 범신론적 힌두교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의 극동지역 불교는 이미 원래의 대승불교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고 본다. 대승불교의 변형된 타락한 모습으로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대승불교의 전개과정에서 잡다한 신행들이 습합되어 본래의 순수한 대승의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흔히 대승불교에서는 기복신앙이 용인되는 것처럼 잘못 알고 있다. 원래의 대승철학, 즉 용수의 중관사상이나 무착의 유식사상 등은 물론 중국에서 태동한 선불교의 선의 절대경지에 기복이 발붙일 여지는 전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붓다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잊어버린 대승불교의 본래 모습을 되찾자는 것이다. 초기대승불교도의 주장도 붓다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부파불교의 타락한 형식주의에서 벗어나 붓다의 본뜻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중국에서 일어난 선불교도 당시 종파불교의 병폐와 비불교적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붓다의 본래 정신으로 되돌아가자는 혁신적인 운동이었다.



기복은 대승불교 아니다

엄격히 말해서 붓다시대의 불교를 100% 혹은 90% 순도의 순금이라고 한다면, 현재의 한국불교는 몇 퍼센트의 순도가 되겠는가? 완전한 순금일 때 황금의 가치는 더욱 빛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다시 100%의 순도로 되돌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불교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서 그 순도를 높이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한국불교가 순수한 대승불교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부에 존재하는 비불교적 요소들을 하나하나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원래의 대승불교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다시 초기불교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초기불교를 강조하는 것은 대승불교를 똑바로 잘 하기 위함이다. 이제 다시 붓다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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