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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불교(17)-달라이 라마의 티베트 해방운동과 불교원리(2)

기자명 박경준

달라이 라마의 사회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는 모든 인류의 평등이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몇 가지 불교 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물론 이것은, 모든 존재가 궁극적 완성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다는, 불성론(佛性論)의 당연한 결과이다. 이것은 또한 마음의 본질에 대한 논의 속에 이미 내포된 것이다. 전통적인 티벳 불교 심리학에 따르면, 모든 사람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명석하고 인식력을 갖추고 있으며, 가장 신비한 단계의 인간은 물론 붓다까지도 모든 생각의 바탕은, 평상시에는 거친 정신 작용 아래 감추어져 있다가 죽음의 때가 되면 스스로를 드러내는 극히 미세한 정신 단계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다고 한다. 정신의 정화 과정의 정점인 깨달음의 단계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살아 있는 존재 속에 머물고 있는 이와 같은 극히 미묘한 정신인 것이다. 불성론과 정신의 본질에 관한 사색이라는 두교리는 모든 존재에 대한 평등의 원리에 형이상학적 기초를 제공한다. 어쩌면 이러한 사상의 가장 중요한 `윤리적' 원천은, 달라이 라마 사상의 많은 부분에서 끊임없이 전통적 기반이 되어주고 있는, 8세기 인도의 산티데바(Santideva;적천(적천)) 성인이 지은 <입보리행론(입보제행론 Bodhicaryavatara)」에 두고 있는 것 같다. 특히 그에게 영감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선정에 관한 부분인 제8장으로서, `나와 남을 서로 바꾸는' 방법이라고 알려진 `보리심(菩提心)선정'이라는 특수한 형태가 설해져 있다. 특히 이것은 나와남을 실질적으로 바꾸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나와 남의 평등이 상세히 설명되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혐오한다는 점에서 평등하다. 산티데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없애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고통은 내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을 내 몸처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과 남들이 모두
행복을 바란다는 점에서 모두 같다면
어떻게 나와 그들이 다른 것일까?
왜 나는 `나의'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일까?

또 나 자신과 남들이 모두
고통을 싫어한다는 점에서 모두 같다면
어떻게 나와 그들이 다른 것일까?
왜 나는 나 자신만을 보호하는 것일까?

이러한 나와 남의 평등이라는 문제는 달라이 라마의 저술에서 가장 흔한 주제로 다루어진다. 상호의존성의 원리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관념의 현실적인 결과가 강조된다. 따라서, "우리는 똑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 나는 행복을 원한다. 그리고 당신 역시 행복을 원한다. 그러한 상호 인식 속에서 서로를 향한 상호 신뢰와 존경심을 구축할 수 있다. 그로부터 협동과 조화가 가능하며, 또한 그로부터 많은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 평등의 원리는 피상적인 문화의 차이와, 우리의 기본적인 인간성의 통합을 강조하는 일이 많다.

"해외에 다니는 동안, 나는 서양과 동양, 특히 서양과 티벳을 구별짓게 하는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각각의 고유한 생활 방식과 행동 양식을 만들어내는 다양한 문화적˙역사적˙지리학적 배경이라는 말로 이러한 표면적인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내가 더욱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처럼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의 통합이다. 그 통합이라는 것은 행복을 바라는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를 말한다…"

이러한 인간 평등의 원리가 또한 그대로 인권에 대한 철학적 기초가 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행복을 바라고 고통을 피하려는 우리의 욕망은 `더 이상의 증명이 필요없이' 자증적이라는 점에서 철학적인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존중되어야 할 인권과 평화의 기반 역할을 평등이 하는 것처럼, 차별(넓은 의미에서 이것은 편견 뿐만 아니라 단순히 차이점을 강조하는 행동도 포함된다)은 분쟁과 혼란의 원인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사회문화적˙이념적˙종교적˙인종적˙경제적 차이는 피상적이며 인위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그러한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불화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철학적 가르침은 목적도 아니고 목표도 아닐 뿐더러 여러분이 받들어야 할것도 아니다. 목표는 다른 사람을 돕고 그들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며 그러한 생각을 지지하는 철학적 가르침만 필요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철학적 입장의 차이로 서로를 비판하면서 논쟁을 벌이게 된다면 그런 철학은 쓸모없는 것이다."

그리고 세속적 차원에서는,

"또한 정치 세계에서는 인종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거나, 이념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거나에 관계 없이… 아무리 작은 차별이라도 걷잡을 수 없는 문제를 만들어낸다. 우리의 조국티벳도 마찬가지여서 문화혁명 때 등장한 우리의 거대 이웃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우리의 특정한 태도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사고 방식 때문에 우리가 반드시 직면해야 할 기본적인 문제들 이외에 더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념이나 종교, 문화 등은 인간의 구성체로서 인간을 위해 봉사하고 인간에게 행복을 안겨다 주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그것이 고통의 원인이 된다면, 우리는 자신에게 쓸데없는 탐욕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탐욕이란 자연 재해와 달리 우리가 제어할 수 있다. 실천의 측면에서 이러한 고통은 인간의 차이를 강조하기 보다는 인간의 평등을 강조함으로써 제거될 수 있는 것이다.

덕에 대한 사랑과 비폭력의 실천

모든 인간은 물론 모든 존재에까지 미치는 보편적인 사랑의 원리를 표현하기 위해서 세계의 많은 종교들이 택한 필수적인 방법이 바로 적에 대한 사랑이었다. 특히 억울한 박해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윤리적 원리라고 할 수 있는데, 중국의 지배 하에 있는 티벳도 물론이다.

인간의 차별과 마찬가지로 적이라는 것도 인생에서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달라이 라마의 저술에서도 적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때로 어떤 상황에서는 공격적인 반응을 하는 데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소박하고 정직한 사람이고 또한 행동도 그렇게 한다면 누군가 당신을 이용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러한 상황에서는 반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나쁜 감정 없이 반발해야 한다. 내심으로는 관용과 연민, 인내심이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외부 환경에 따라 때로는 평화롭게, 또 때로는 그렇지 않게 다양한 유형의 반응이 요구된다. 그러나 가능한한 외부 표현의 다양성에 관계없이 늘 간직해야 할 것은 내면의 동기를 긍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일이다. 외부적으로 공격적인 태도가 필요할 때라도 내면의 동기는 사랑과 연민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사실, 사랑을 시험하기에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적에 대한 사랑이다.

"가까운 사람들과 연인에게만 제한되어 있는 사랑은 언제나 무지와 집착으로 변색되기 마련이다. 여기에서 주장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손해를 깨쳤던 사람에게까지 미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특히 <입보리행론〉제6장(인(忍)의 장)을 바탕으로 한 달라이 라마의 분석을 보면 적에 대한 적절한 반응은 감사라고 한다.

"누군가 우리의 잘못을 공개하고 비판하는 때야말로 우리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그것을 해결 할 수 있는 기회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적이 가장 훌륭한 우리의 친구인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필요한 내면의 힘은 물론, 다른 사람에 대한 관용과 존경을 제공해 준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화를 내지 말고 존경하고 감사해야 한다."

따라서 적이란 인내심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적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단순한 교리 상의 원리가 아니다. 달라이 라마는 최근 그의 자서전 《망명 속에서의 자유》에서, 이것을 중국의 경우에 적용시켰다. 여기에서 그는 최근 중국에 대항하여 티베트 사람들이 행사한 폭력을 비판하였는데, 물론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인권 탄압도 비판하기는 하였지만 그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일부의 행동 때문에 티베트 사람들이 당한 것처럼 중국 대중들이 그들의 기본적인 인권을 빼앗기는 일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보편적 사랑에 대한 달라이 라마의 의견 때문에 당연히 그의 주장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수단으로서의 분노와 폭력이 절대로 효과가 없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분노에서 발생한 폭력은 기껏해야 문제에 대한 단기간의 대응일 뿐이다.

분노, 질시, 성급함, 미움 등이 실제로 문제를 만들어 내는 것들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있으면 절대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일시적으로는 성공할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미움이나 분노는 더 큰 어려움을 만들어낼 뿐이다.

화가 나면 모든 행동이 성급해진다. 연민과 진지함, 정당한 동기를 가지고 문제를 대면한다면 시간은 많이 걸리겠지만,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더 나은 해결책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비폭력 사상의 교리적 근거는 특히 불교의 `율장(律藏)'문학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는 승려 규율의 집성체이다.

전인류적 책임감과 연민

사회개혁을 위한 달라이 라마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는 아마 전인류적 책임감과 연민일 것이다. 사랑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가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려는 것이라면 연민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제거해 주려는 것이다. 이 두 마음은 `수승한 마음'이라는 제3의 원리와 함께 다른 사람들을 해방시키겠다는 책임을 떠맡음으로써, 보리심, 즉 감정을 지닌 모든 존재를 위하여 깨달음을 얻겠다는 보살의 마음을 발생시키는 주요한 세 가지 원인이된다. 보리심이라는 교리를 둘러싼 논쟁을 통해서 우리는 연민에 관한 가장 폭넓은 티벳 불교의 논의를 살펴볼 수 있다. 게다가 이것은 연민이라는 주제에 대한 달라이 라마의 주장의 교리적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보리심이라는 개념이 그의 사회개혁을 위한 철학에서 보편적인 원리로서 소개되지 않은 이유는 분명하다. 보리심이라는 사상이 확실한 불교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는 그가 신봉하는 원리들은 `지금 당장' 세계 어느 곳에라도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늘 강조해왔다. 달라이라마에게 자신의 입장을 보편적으로 만든다는 일은 그것들을 어느 정도 종교적 이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으로서, 다시 말하자면 종교적으로 중화시켜 가능한 한 전세계에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겠다는 의미이다.

"친절한 마음을 기르는 일에는, 일반적으로 이것과 연관되기 마련인 감상적인 신앙심이 포함되지 않는다. 이것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종과 종교, 정치적 성향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보리심을 이해하려면 인간의 완성이라는 특별한 불교적 개념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제외된 것처럼, 이것 역시 특정 종교의 기반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개념이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의 사회 개혁을 위한 철학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사랑˙연민˙전인류적 책임감이라는 달라이 라마의 주장의 일반적인 개념들은 보리심 논쟁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현실성과 세속적인 느낌마저 든다. 대승불교 실천의 가장 완벽한 동기라고 생각되는 것이 바로 동정적인 태도, 특히 보리심이다. 달라이 라마의 사상에서 적절한 동기라는 개념 또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윤리적으로도 어떠한 행위가 선인가 그렇지 못한가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은 바로 동기이다. 연민을 동기로 하는 행위라면 선이다. <입보리행론〉의 비유를 들자면, 보통의 쇠붙이를 금으로 바꿀 수 있는 연금약처럼 연민은 세속의 행위를 해방을 향한 행위로 바꾸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정치도 적절한 동기만 부여된다면 고결해질 수 있다.

"때로 우리는 정치를 더럽다고 비판하면서 우습게 생각한다. 그러나 제대로 바라본다면 정치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정치는 인간 사회에 봉사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성실과 정직이라는 좋은 동기만 있다면 정치도 사회에 대한 봉사 수단이 된다. 그러나 이기심이나 미움, 분노, 질시 등이 동기라면 더러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리의 힘

고대 인도에서는 전 지역에, 힘이란 진리로부터 나온다는 전통이 있었다. 진리는 그것을 말하는 사람을 보호하고 부정을 정의로 바로잡는 힘이 있다.

<라마야나 인도 고전의 서사시〉에서 시타는 불공정한 간통 혐의에 대항하여 자신의 입장을 진술하고 불 속에 뛰어 들어 자신을 지킴으로써 그의 남편인 라마에 대한 정절을 증명한다. 이러한 진리관은 불교 전통에도 나타나며 티베트 해방 운동에서도 재미있는 표현들을 찾을 수 있다.

1960년 달라이 라마는 `진리에 호소하여 삼보의 자비력을 기원하는 기도문' 이라는 짧은 글을 지었다. 이것은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진리의 힘을 빌어 그들이 바라고 있는 모든 이의 행복과 티베트 해방이라는 목적을 이룰 수 있게 해 달라는 글이다. 지금은 주로 붓다의 말(역자 주:경전)이라는 진리에 호소하지만 달라이 라마 자신의 기도문도 진리의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다. 그러므로 달라이 라마는 바로 첫 구절에서 삼세의모든 부처님에게 기원하며 "부디 저의 고뇌에 찬 진리의 말씀을 들어 주십시오"라고 빌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주어진 현실 상황에서 억압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해결책인 동시에, 그 해결책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한 진리는 악을 극복하고 억압자체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다. 진리는 말 자체로도 피억압자들을 해방시켜 줄 수 있는 힘이 있다.

달라이 라마의 많은 저술에서 진리는 사람들의 의지와 결부되어, 권력과 정부의 선전과 맞붙는 일이 많다. 그러므로 그가 최근 자서전에서 "정부가 하는 일과 무관하게 인간의 정신력은 언제나 살아 남는다"고 한 말 속에는 진리라는 것이 제도적인 권력과 힘보다 더욱 강력하다는 의미를 어느 정도 담고 있다. 이것은 티베트의 경우에 적용시켜 보면 중국의 지배에 있는 티벳사람들은 결코 희망을 잃지 않을 것이며, 비록 그들의 수가 적고 상대적으로 군사력이 약하지만 몰리력보다 훨씬 강력한 힘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박경준/동국대 불교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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