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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성의 불교학 이야기-안옥선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자비…]

기자명 김호성
  • 불서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서양 윤리학 이론에 비추어 본 동양의 윤리

-안옥선, <초기불교와 선진 유교윤리에 있어서 덕의 객관성>, 《미래불교의 향방》

여래의 방은 곧 모든 중생에 대한 큰 자비의 마음이다.
-《법화경》 <법사품> -

학자들의 세계인 학계(學界)에도 그 나름의 풍습이 있다. 그 중 하나가 '기념논총(記念論叢)'이다. 학덕(學德)이 높은 스승의 화갑·정년·고희·송수·추모 등을 위하여 제자와 후배들이 논문집을 만들어서 헌정하는 것은 미풍(美風)이리라. 그런데, 근래 들어 이같은 미풍으로서의 기념논총에 학문적 의의까지 담보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어서 주목된다. 작년(1996), 원광대 송천은(宋天恩) 총장의 화갑을 기해 '종교철학'주제의 학술회의를 개최한 뒤에 논총을 발간한 것이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미천 목정배(彌天 睦楨培) 박사의 화갑 기념논총 《미래불교의 향방》(미천 목정배박사恩法學人會 엮음, 1997) 역시 종래의 '기념논총'과는 다른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53인(人)의 필자들 중 전임강사 이상의 현직 교수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시간강사, 박사과정 수료생,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신진(新進)의 학인들이 논문을 제출하고 있는 것이다. 장차 미래 불교의 내일을 짊어질 소장(少壯)학자들의 향연(饗宴)이었다는 점에서, 《미래불교의 향방》은 가히 '미래불교학의 향방'을 가늠케 하고 있다.

중생·자비·윤리

정말, 궁금하다. 미래불교는 어떤 모습일까? 불교는 또 어떻게 변해갈 것인가? 불교의 두 축은 다르마(dharma : 法)와 사트바(sattva : 衆生)이다. 다르마를 지향하는 불교를 '아비다르마(abhidharma)'라 하고 사트바를 지향하는 불교를 '아비사트바(abhisattva)'라고 한다면, 미래불교의 모습은 아비다르마의 불교보다는 아비사트바의 불교가 될 것이다.[abhi는 '…에 대하여'의 의미. 관심의 지향성을 나타내는 접두어이다. 그것은 틀림없는 추세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미천 목정배 박사는 "Sattvaism"(p.10)이라 부르고 있다.

중생주의, 그것은 미래불교의 어쩔 수 없는 자화상(自畵像)일 것이다. 아비다르마의 입장에서 볼 때, 다소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불교에서 다르마의 깨침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화엄경》에서 보듯이, 중생에서 깨침으로 나아가는 길 역시 가능하기 때문이다. "중생이 있으므로 자비심이 있고, 자비심이 있으므로 보리심이 있고, 보리심이 있으므로 깨달음이 있다"고 한다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중생주의 불교(=화엄의 불교)'를 지향해야 하는 것 아닐까.

미래의 중생, 그들을 우리는 또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전통불교에서 중생과 만나는 방식은 언어를 통해서였다. 언어는 다르마와 사트바를 잇는 가교(架橋)였으며, 언어는 자비의 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래 불교에서도 여전히 언어는 그같은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언어에 의한 불교, 즉 이론으로서의 불교는 그 힘을 상당히 잃을 것으로 전망된다. 나는 두 가지의 새로운 언어가 요청되고, 또 각광받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문예(文藝)와 행위가 그 두 가지다. 미래 불교의 다르마는 문예와 행위라는 새로운 언어에 의지하여 사트바를 만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 볼 것은 행위라는 언어에 대해서이다. 다르마에 입각한 행위[如說行], 그것은 곧 윤리적 행위일 것이다. 이제 나는 불교의 사회화를 윤리적 행위를 통하여 이룩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미래불교의 향방》 중에서 제5부 '계율과 윤리'에 관심이 집중되었던 것도 바로 그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특히, 안옥선 교수의 <초기불교와 선진 유교윤리에 있어서 덕의 객관성>에 이끌렸다.

배움·지식·실천

솔직히, 안 교수의 논문 역시 어려웠다. 우선 장편(長篇)인데다, 논문의 문장 역시 다소 생소하였다. 오랜 시간의 유학으로 인한 탓이겠지만, 모국어 쓰기의 감각을 좀 잃어버린 것같다. 그런데, 그같은 이유들보다 그녀의 논문이 취하고 있는 전략(戰略)의 복잡함에서 어렵다는 인상이 심어졌던 것같다. 안옥선 교수는,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와 선진(先秦) 유교에서 말하는 인(仁)의 개념이 같다. 그리고 그 두 개념은 공히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는 윤리규범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초기불교와 선진 유교만 비교해도 좋으련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현재 서양윤리학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논의를 원용(援用)하면서, 스스로의 입각지를 얻고자 한다.

이같은 전략 때문에, 나같이 서양의 윤리학에 무지한 학인에게는 어려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그 책임은 나에게 있다. 나의 협소한 독서력(讀書力)에 그 1차적 책임이 있다. 그렇지만, 필자 역시 우리 동네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어서 각주(脚註)의 형식을 취해서라도 좀 친절히 설명해주었더라면 더 '자비'로왔을 것이다.

예컨대, '굿만(Goodman) 식의 다원적 세계관'(p.736)·'이상적 관찰자 이론'(p.753), 또 푸트남(Putnam)의 객관성(p.737.) 개념 등이 보다 자세한 안내가 필요한 부분이었다. 물론, 독자들은 다시 그들의 책을 읽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다시, 논문의 내용으로 돌아가 보자. 안옥선 교수는 왜 버나드 윌리암스(BernardWilliams)의 이론을 의용(依用)하고 있을까? 안 교수의 친절한 지도를 받기 위해서라도 내 이해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렇게 이해하였다.

서양 윤리학의 입장은 사실과 가치가 서로 다른 차원이라 보았던 것같다. 이를, 윌리암스는 '과학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으로 대체하고 있는데, 그렇게 대체해놓고 양자를 구분하는 준거로서 '수렴(convergence)'이라는 개념을 설정하고 있다. 과학적인 것은 "이념적으로 하나의 대답을 향해 수렴해 가는 것"(p.729.)이지만, 윤리적인 것은 그같은 수렴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실과 가치의 융화할 수 없는 대립에 대한 주장은 두 윤리체계 내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p.732.)

초기불교의 법(法 : 담마)이나 선진 유교의 도(道)는 모두 지식과 실천의 비분리성(非分離性) 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불교든 유교든 상관없이 동양의 배움[學] 개념은 앎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行]까지도 함께 말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양자의 비분리성은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유교의 '배움' 개념은 안교수가 언급하고 있는 바(p.735.)와 같으며, 초기불교의 '배움' 개념 역시 삼학설(三學說)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론적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김호성, 1992]

자비·인·덕

사실과 가치의 통합이라는 점에서, 두 윤리체계는 윌리암스의 그것과 다르다. 그렇지만, 윤리적 객관성과 관련해서는 두 윤리체계와 윌리암스는 입장을 같이하는 것으로 안 교수는 보고 있다.(p.732) 종래, 서양 윤리학의 입장은 가치는 주관적인 것이라 보았던 것이지만, 윌리암스는 "과학적 객관성과는 매우 상이한 종류의 도덕이나 덕의 윤리적 객관성을 고려하고 있다"(p.731)고 한다.

초기불교나 선진 유교의 윤리 역시 객관성을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안 교수는 보고 있다. 윌리암스가 '농후한 개념'으로서, 객관적일 수 있다고 제시하는 덕목들, 즉 용기·비겁·거짓말·감사 등은 일상적·구체적이다. 초기불교의 자비나 선진유교의 인 역시 일상적·구체적인 윤리덕목이라는 점에서 '농후한 개념'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갖고 있는 객관성을 탐구하기 전에, 초기불교와 선진 유교의 윤리개념, 즉 자비와 인이 어떻게 성립하고 발전하였는지를 살펴본다. 이들은 모두 자리(自利)를 근본으로 한 것인데, 그것이 확산되어 이타(利他)로 나아가게 된 것이라 한다. 여기서 '객관성' 개념은 자리와 이타의 공평성 속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또 "행동의 공평성 혹은 객관성은 자기위주와 타인위주의 양쪽 입장을 고려한 행동의 실현을 의미한다"(p.755)는 것이다. 여기까지, 즉 초기불교의 자비와 선진 유교의 인은 그 개념이 같다고 본다. 즉 자기희생적 자비와 인 사이에 차이가 벌어진 것은 대승불교에 이르러 불교의 자비개념은 변하였으나 유교는 변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암시하고 있다.(p.759) 이것이, 우리가 기다리고 있어야 할 다음 논문의 주제인 듯 싶다.

그런데, 동양의 윤리가 "열린 체계"(p.758)라는 안 교수의 결론에는 공감하면서도, 평자로서는 과연 초기불교의 자비와 선진 유교의 인이 같은가 하는 점에 의문을 제기해 본다. 불교는 무아·출가의 가르침이고 유교는 유아·재가의 가르침일진대, 어떻게 그 소출(所出)이 같기만 할 것인가? 또한 그 윤리공동체의 범위를 '모든 존재'(자비)와 '모든 사람'(인)으로 설정하는 것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차이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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