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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사람-⑪소요산 자재암

기자명 김장호
서울에서 의정부를 거쳐 동두천을 지나자 몇발 안가서 동쪽으로 거뭇하게 솟은 소요산을 본다. 높이래야 535.6m밖에 안되는 낮은 산인데도 둘레가 펑퍼짐한 들판이어서 그럴까, 그 돌올한 앉음새가 유난스럽다. 높임새는 한북정맥의 서쪽, 철원 보개산(947m)에서 두갈래로 뻗는 추가령지구대의 가운데를 꿰고 멧줄기상의 종자산(643m), 종현산(588.5m)의 남쪽에 솟았지만 윤두서의 《동국여지지도》에는 연천의 남쪽, 양주의 북쪽에 그려져 있다.

소요천을 끼고 품안으로 접어들면 이내 주차장, 그 앞에 소요산 자재암의 일주문이 막아서고 그 문루 안쪽으로 또 하나 경기소금강이라 쓰인 현판이 걸렸다. 거기서 쳐다보는 소요산은 과연 기암괴석으로 투갑을 해쒸운 험산그대로이다. 누가 이 산을 소요산이라 일렀을까. '소요'란 글자 그대로 마음 내키는대로 슬슬 거닐며 다니는 산책이나 산보를 두고 이름인즉, 어디이 깍아지른 험산을 그렇게 한갓지게 거닐수 있단 말인가.

바로 거기에 이 산에 처음 둥지를 튼 원효의 기백이 방불하다. 이해타산으로 영일이 없는 사람들의 눈으로야 한가해 보일망정 한가지 화두를 내어걸고 애오라지 외통수를 파고드는 정진을 오히려 책장소요라 일컫는 즉 서두르지 않는다뿐, 거기에는 이 산 된비알을 기어오르는 만큼의 피나는 아픔을 전제하는 것이다. 원효의 나이 그때 38세, 신라는 무열왕원년(654), 그전에 요석공주를 물리친 다음 혈혈단신 그때까지만 해도 고구려와 접경을 이루었던 여기 살벌한 산속으로 파고 든 것이다.

물론 지금 이 산에 남아 있는 원효의 자취는 바이 없다. 고려때 이규보도 그렇게 읊고 있다. "원효가 와서 암자를 겪었으나 그 영묘한 자취를 찾을길이 없다." 더구나 알 이는 알세라, 원효는 전국에 숱하게 발자취를 남겼으나 그 선후배가 되는 자장, 의상과는 딴판으로 그 모두가 초암으로 토굴이었던 모양으로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는 흔적이란 가뭇없다.

그의 족적의 한계선은 서쪽으로는 백제가 멸망한 연후 변산에 원효방을 엮어 거기 화쟁의 사상을 흩부렸던 일이요, 북쪽으로는 여태도 고구려와 뿔을 맞대고 있었던 여기 소요산까지 나아온 것이다. 그 대신 그는 오래 산속에 가람을 일구고 들어앉는 그런 권위주의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가 스스로 대승육정참회에서 실토하듯이 '비록 머무는 곳 없을지라도 머무르지 않는 곳 또한 없느니'그것이 곧 원효의 독자적인 신앙행적이었던 것이다.

한발 산에 들면 성해응이 지은 《동국명산기》의 기록이 거기 그대로 살아있다. "골짜기와 멧부리가 모두 돌이다... 그중 의상대가 제일 높아 거기 백운대가 있고 그 아래 중백운 또 그 아래 하백운이 있다. 폭포가 걸려있고 폭포 앞 사다리 위에 원효대, 원효대를 지나 소요사가 있다. 원효는 신라스님, 폭포 곁에 바위굴이 있고 거기 석간수가 졸졸 흐르니 그것을 원효정이라 한다. 중봉을 따라 동남으로 나가면 의상대로 오를 수 있다. 의상 역시 신라스님이다."

폭포 곁으로 원효대를 넘어서면 자재암, 그것을 소요사라 불렀던 것이니 이 산이름도 물론 거기서 비롯되었음이 분명하다. 《소요산영원사중건기》에 보다시피 소요사는 자재암으로 불리면서 황폐해진 중에 조선조 건국(1872) 수락산 흥국사의 제암스님이 여기를 찾아들어 중창하여 영원사라 했다가 한말때 의병대의 난으로 불타버린 것을 1913년에 복구하여 다시 자재암이란 이름으로 환원한 것이다. 근년까지 이 산에 깃든 사암들도 상당수에 달했던 모양으로 《동국여지승람》에 중대암, 백운암, 소운암, 그리고 《봉선사본말사기》에서 북사자암, 상대암 등 이름이 보인다.

그중 자재암의 앉음새는 참으로 절묘하다. 지금 골짜기 안에 파묻힌 꼴인데도 종일을 햇볕이 비쳐든 것이다. 사기에는 워낙 남남서방향으로 앉혔다고 하지만 이미 앞에 나한대, 의상대가 솟았는데도 해가 내내 그 봉우리 스카이라인을 스쳐갈 뿐이니, 여기와서 새삼 절의 앉음새에 대해서 무릎을 칠 판이다.

절 앞으로 가로질러 가파른 된비알을 통아오르면 비스듬히 낙낙장송이 활개를 펼쳐들고 서는 하백운대, 거기서 시계바늘방향으로 머리를 돌리면 중백운(500m), 상백운(530m), 나한대(510m), 의상대(532m), 공주봉(526m)이 기라성처럼 둘러쳤다. 뿐인가. 바위 서리서리 소나무 단풍나무가 어울려 수를 놓아가며 펼쳐드는 풍광은 소금강이란 이름도 오히려 모자랄 판이다.

물론 이 산 최고봉은 상백운 뒤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테두리 안으로 봉우리들을 섭렵하여 마침내 의상대에 오르면 그때 서해로 해가 저문다. 원효가 친히 명명한 것이 아니라 후세에 누가 그렇게 이름했을지도 모른다. 의상대는 원효가 앉았던 자재암 서쪽 머리에 오히려 두 사람 도반의 영원한 정표처럼 그렇게 의연하다.


김장호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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