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시간이다.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는다. 평화로움이 온몸을 감싸고 흐른다. 고요한 달빛이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기분에 젖어들게 한다. 어디쯤에서 들려오는 것일까. 슬픔을 토해내는 듯한 소쩍새 소리가 진한 그리움의 감정을 자극한다. 무심한 발걸음으로 천왕문 밖을 나섰다. 널따란 들판저편에 지리산 제일봉인 천왕봉이 묵묵히 자리잡고 있다. 영겁의 세월동안태고(太古)의 침묵으로 끝없이 출렁이는 힘겨운 중생살이의 파도를 지켜보며 천왕봉이 의연히 앉아있다. 어디에선가 영광과 좌절 그리고 아물지 않은 회한의 상처로 얼룩진 민족사의 신음소리가 울려온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런저런 상념들을 떨쳐내며 송림사이의 오솔길로 발길을 옮겼다. 저만치 2천5백여년전 초췌한 모습의 수행자가 맨발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 마을 집을 돌며 한끼 공양을 위한 탁발을 다니고 있다. 어느 바라문의 집이다. 바라문이 일손을 멈추고 말한다. "우리는 밭 갈고 씨 뿌린 다음 먹습니다. 당신도 밭 갈고 씨뿌린 다음 먹도록 하십시오." 수행자가 대답한다. "나는 황무지가 되어버린 마음의 밭을 지혜와 자비의 쟁기로 밭 갈아 우리 모두가 함께깨달음의 큰 삶을 살도록 한다오." 수행자의 이 말을 들은 바라문이 맛있는음식을 가득 담아 공양 올린다. 수행자가 정중하게 거절하며 말한다. "참된수행자는 설법하며 먹고 살지 않는다오. 여래를 제외한 그 누구도 붓다의 설법에 의하여 나온 이 음식을 소화시킬 수 없소. 지금 곧바로 생명이 없는 곳에 버리도록 하시오." 묵묵히 듣고 있던 바라문이 "세존이시여! 저도 당신의가르침을 따라 출가하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다. 붓다는 묵연히 허락한 다음 빈 발우를 들고 터벅터벅 돌아가신다. 부처님의 육성이 원형대로 간직되어 있다고 하는 잡아함경의 내용이다. 의연한 자세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인 법다운 삶의 길을 굳건하게 지키는 모습은 참으로 수행자답다. 구세대비의 정신에 따라 어리석은 한 인간을 깨우쳐 정법의 길로 안내하기 위하여 법답지 못한 공양을 정중하게 거절하고 기꺼이 하루 굶는 쪽을 선택하는 수행자의 모습은 실로 감동적이다. 이처럼 의연한 붓다의 모습에 겹쳐서 오늘의 수행자 모습을 하고 있는 최근의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지난해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에 올해는 `부처님 오신날' 준비를 일찍 하는 것이 좋겠다. 어떻게 하면 등을 더 많이 접수받고 수입을 더 올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서둘렀다. 등 만들고 접수처를 설치하고 신도들께도 등 접수 권선책을 보내고 부처님 오신날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하여 도량을 장엄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등접수를 받는 등 열심히 뛰어다녔다. `올해는 등이 몇 개나 접수될까' `돈이 얼마나 들어올까' `불황이라는데 등이 너무 적게 걸리는 것은 아닐까' `올해 수입이 작년만 못하면 어떻게 할까' 온갖 가정들을 하면서 초파일을 치렀다. 저녁때가 되어 식구들과 함께 전체 결산을본 결과 입금액이 작년보다 조금 적은 편이었다. 이젠 또다른 걱정들이 꿈틀거린다. `앞으로의 살림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기와 보수도 해야하고 직원들 월급도 주어야 하는데 어디에서 무슨 수로 해결을 할까' 결국 처음부터끝까지 돈걱정으로 일관하고 있고 돈 문제로 허둥대고 있다. 불교 본연의 사상에 입각해서 `정법의 길'을 지키기 위하여, 고통받는 중생들을 `정법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고뇌는찾아 볼 수가 없다. 자신을 더욱 지혜롭고 자비롭게 하고 실상사 신도 또는실상사를 찾아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법의 신앙심을 갖게 하고 새로운 자기변화를 이끌어 내도록 하기 위하여 올해 부처님 오신날을 어떻게 준비하고보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마음씀과 걱정은 자취도 없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등을 더 많이 달 것인가, 수입을 올리기 위해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경제적으로 좀더 풍족하고 여유 있는 삶을 위해 무슨 사업을 하는 것이 좋을까하는 등의 구상과 고민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경제문제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성스러운 절을 찾아 나선 수행자의 입장과 자세는 달라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에게 몇 가지 물음을 던지게 된다. 첫째, 성스러움을 추구하는 수행자의 모습을 하고있으면서 세속의 가치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필자의 모습에 대하여 오늘의 대중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둘째, 수행자의 모습만 하고 있으면 불교 사상과정신 그리고 그에 따른 윤리성의 확립을 모색하지 않아도 저절로 수행이 되고 종단과 불교를 위해 바람직한 존재가 되는 것일까. 셋째, 수행과 전법이안되고 불교집안의 갈등과 대립이 거듭되며 혼란과 타락이 심화되는 것이 정말 재정이 빈약해서 일까. 스스로에게 이런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모습과 한국불교의 현실이 서글프고 초라하기 그지없다. 분명 깨달음을 법칙으로 삼고 중생구제를 본령으로 삼아 살아가는 자라야만 수행자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오로지 법과 중생을 위하여 자신의 전존재를 바치는 삶을출가장부의 삶이라고 할 것이다. 이처럼 당당하고 훤출한 수행자의 모습을보여주지 못하는 오늘의 자신이 안타까움을 더하게 한다. 언제 어디에서나보는 사람 만나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과 감동을 줄 수 있는 수행자로 태어나기 위하여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는 길밖에 다른 묘책이 없을 듯 하다. 이렇게 마음을 정리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새벽달빛은 교교히 빛나고 지리산은 신비에 쌓인 채 예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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