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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정론-"민족을 부끄럽게 만들지 말라"

기자명 이선복
  • 사설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고속전철 경주통과 문제를 두고 사회각계각층의 양식있는 식자들은 세계적 웃음거리가 될 이 무지몽매한 사업을 조속히 철회하길 바라고 있다. 고속철도를 무슨 일이 있어도 유치시켜야만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일부 경주시민들 역시 과연 경주가 사는 길이 무엇이며, 후손에게 무엇을 남겨줄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곰곰 생각해 주길 바란다. 경주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문제의 단초는 정부가 제공한 것인 만큼, 이를 해결할 책임은 정부에 있다.

지난 정권말, 경부고속전철을 건설키로 하며 정부는 무슨 이유에선지 전철이 경주시내를 통과토록 노선을 결정했다. 학계에서는 전철이 경주를 지나간다는 것은 보도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전철이 선도산 아래를 고가로 지나고 남산 코앞에 역사가 만들어질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작년 3월, 노선구간에 대한 자문을 위해 고속전철건설공단이 마련한 자리에서 이런 설명을 들은 학계인사들은 그저 아연할 뿐이었다. 만약 현재의 계획대로 전철이 건설된다면, 경주는 더 이상 천년고도의 역사도시가 될 수 없다.

고속전철노선 주변에는 이미 수많은 문화재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문화재들이 입을 피해도 피해지만, 이보다도 더 큰 일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에 학계는 현재의 계획에 대해 발벗고 나서 반대를 펴왔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속전철건설은 산과 들의 모습 그 자체가 문화재이며 우리 민족의 영화를 말해주는 경주의 역사경관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말아버릴 것이다.

생각해 보라. 경주시내와 그 일원이 거대하고 흉칙한 콘크리트구조물로 두동강나고 그 위로 쌩쌩 총알같이 기차가 달리는 모습을. 더구나 남산 아래 역사가 들어서게 되면 그 일대는 거대한 도시로 변할 것이 틀림없는 일이다. 땅 가진 사람들이야 횡재할 일이겠지만, 그런 모습으로 추악하게 변한 경주가 우리 민족 모두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며 무엇을 배우고 느끼겠는가?

그렇다면 전철을 지하에 건설하면 될 것 아니냐고 건설교통부에서는 말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것도 참으로 딱한 소리다. 지하에 건설한다고 해서 저 멀리서부터 암반층을 뚫고 선로를 만들고 지하 수십미터 깊이에 역사를 만들겠다는 얘기가 아니다. 노선을 지하화해도 어차피 역사는 지상에 만들어지게끔 되어 있고, 지하화란 지하철 공사하듯 다만 철도노선이 지상에서 보이지 않게끔 땅을 파 만들겠다는 얘기일 뿐이다. 노선을 지하화한다면 필경 지상에 노선을 설치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면적의 땅을 파야만 하고, 그렇다면 훨씬 더 많은 양의 문화재를 다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신문을 보니 학계가 요구하는 대로 경주를 우회하는 방향으로 철도노선을 놓는다면 공기가 3년 더 필요하고 설계비용도 2백억이 더 들기 때문에 그렇게할 수 없다고 한단다. 이 말이 참으로 아둔하고 한심하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만약 원계획대로 공사를 강행한다면 공기가 3년은 커녕 30년이 연장될지도 모르며, 비용도 2백억원은 커녕 2천억이 더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점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노선을 지하화하겠다는 얘기와 마찬가지로 이런 소리는 경주시내는 어디를 파더라도 문화재가 발견되는 곳이라는 점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멍청한 발상일 뿐이다.

문화재 부존가능성이 가장 희박한 경기도구간에서도 문화재조사로 인해 한 공구의 작업이 1년 이상 지연되고 있고, 이 구간에서 문화재조사가 끝나려면 내년말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렇다면 경주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문화재조사를 위해서는 공사구간의 모든 흙을 일일이 손끝으로 다 파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로 인한 공기지연과 추가비용부담에 대해 관계자들이 조금이라도 관심을 쏟고 있다면 이런 말은 감히 입밖에 낼 수 없을 것이다.

경부고속전철의 경주통과가 꼭 필요한 일이더라도 현재의 계획은 실행해서는 안되는 무모하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경주를 지나야만 한다면 우회해야 할 것이다. 또 무지스럽게도 현재의 자리에 경마장을 지을 것이 아니라, 꼭 지어야만 한다면 멀리 떨어진 곳에 고속철도역사와 그 주변의 신도시와 연계해 지어야만 마땅한 일이다. 대부분의 경주시민들에게도 고속전철과 경마장은 결코 큰 혜택을 주지 않을 것이다. 이따위 무모하고 무지한 계획이 세워졌고 왈가왈부된다는 점이야말로 문화민족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이 선 복 <서울대 교수.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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