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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정론-무자비 시대의 자비의 불교?

기자명 허우성
  • 사설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타인의 불행에 동참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는가? 불교는 그 힘을 비라 한다. 그 능력은 육신의 욕망, 즉 감각의 쾌락을 극복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작동한다. 이 사실을 필자는 삼풍참사의 경험에서 새삼스레 깨달았다.

참혹한 사건의 중계 방송을 시청하다보니, 어느듯 스포츠 중계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어 갔다. 왜 그럴까? 그 사건의 중계방송이 지닌 생동감, 스릴, 흥미, 기록경신에 대한 기대, 경쟁심의 격돌 등 스포츠와 유사한 요소 때문이다. 인간의 생사와 관련된 중계방송이니 스릴은 스포츠보다 더 짜릿했다. 우리는 비의 힘을 상실하고, 그 사건은 참혹성과 비극성을 잃었다. 오락과 스포츠가 주는 흥미와 흥분에 부단히 노출되어 있는 현대인은 타인의 비극에 동참할 수 있는 능력을 뿌리채 위협당하고 있다. 오락과 스포츠가 비를 앗아 간다는 점은, 곧 자비가 깨달음과 하나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상기시킨다. 비지가 하나라는 가르침에 따르면, 감각적 욕망을 부지런히 준동시키는 이 시대는 그 성격상 무자비할 수 밖에 없다.

불교는 비극의 뿌리에 욕망과 무명이 있다고 말한다. 연기론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욕망 주체는 눈, 귀, 코, 혀, 몸, 뜻이라는 육입처를 통해 욕망의 세계를 지어 간다. 뜻이란 것도 오관에서 받아들인 자료를 기초로 삼을 따름이다. 대상을 만나게 되면, 즐거워하고, 사랑하고, 집착하고, 그 집착을 키우고, 어떤 결과를 낳는다(생, 예를 들면 성행위).

생긴 것은 쇠퇴하고 사라져 간다. 세계를 만드는 힘이 행이고, 그 행이식을, 식은 명색을 낳는다. 그런데 행의 조건은 무명이라는 연기계열의 첫고리이다. 불교가 연기론을 통해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첫째 바로 보라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지 개인적인 것을 섞지 말라는 것이다. 비극은 비극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인과의 범위를 벗어나지 말라는 것이다. 자치가 가능한 영역은 엄밀히 말한다면 5~6자 정도의 내 몸밖에 없다. 완벽한 자치는 바로 해탈이며, 그것은 비를 수반한다. 셋째, 감각을 잘 보호하라는 것이다.

현대문명은 그런데 이들 가르침을 그 근원에서부터 전복시켜, 우리를 내면보다는 바깥으로 끌어가고, 깨달음이라는 자치보다는 종속을 초래하는 감각적 쾌락으로 이끈다. 결과적으로 이 시대를 무자비하게 만들고 있다. 뉴미디어와 멀티미디어를 보자. 사람들은 과학과 기술의 언어가 우리를 지배한 지 오래되었다 하고, 그 예증으로 뉴미디어와 멀티미디어의 홍수를 꼽기도 한다. 그런데 뉴미디어, 멀티미디어로 불리는 대중매체들은, 적어도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욕망을 부단히 부추기는 것들이다.

뉴(new) 미디어는 새로운 방법으로 감각을 자극한다. `새롭다'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보다 자극적인 것을, 보다 오래, 함께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멀티(multi)미디어는 어떤 내용을 둘 이상의 감각기관에 동시에 호소하여 보다 강력하게 전달하려는 것이다.

이 시대를 무자비하게 만드는 또다른 요소로 자본주의가 있다. 그것은 자기 이익의 추구를 고의 근원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이용하고 부추겨 세계 일등이 되자고 선전한다. 그 이익 추구의 대표적 방편으로 광고가 있다. 광고란 부단히 감각기관을 폭격하여 우리를 특정한 상품으로 유도한다. 성공적인 광고는 그 상품을 갖지 않으면 불행해진다는 생각을 심어 주어야 한다. 광고는 감각 위에 작용하면서 자치를 부단히 위협하는 이 시대의 불안한 징표의 하나이다.

과학과 기술, 그것들의 자본주의와의 결합, 이 두가지를 근간으로 삼아 이뤄진 현대문명의 감각적 쾌락을 한없이 부추기는 한, 이 문명은 대중성, 정당화, 그것이 약속하는 행복이 무엇이든 인간을 무자비하게 만든다. 감각적 쾌락에 수반되는 이런 무자비성은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런 만큼 자신이 만들어 낸 문명에 대하여 우리는 무지하다. 과학과 기술로 대표되고, 뉴와 멀티를 상징으로 갖는 이 문명을 움직이는 힘의 정체를 우리는 모르며, 그 힘이 데려다 줄 종착지도 모른다.

현대문명이 그 안에 무자비와 무명을 동반하고 있다는 말은, 예전보다 불교수행이 더욱 어려워졌음을, 세속에서의 불교 포교는 왜곡을 초래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과학과 기술이 만든 이런 환경은 그런데 불가피한 운명이다. 무자비의 이 시대에 불교는 진정 자비를 가르칠 수 있는가?


허 우 성 <경희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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