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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칼럼-뜻이 좋아도 일에는 선(先) 후(後)가…

기자명 리영희
  • 사설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며칠전, '광주광역시 5·18사료 펀찬위원회'가 편찬한(5·18 광주 민중항쟁 사료집) 세권이 우송되어 왔다. 국회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1988년 6월서부터 몇 달에 걸쳐서, 전두환 군부 독재권력이국권찬탈의 음모작전으로 전라남도 광주시와 그 일대에서 진행한 무차별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서 진행했던 학살관련 고급 군인들에게 대한 조사회의록이었다. 방대한 조사기록이다.

한권이 8백쪽 안팎이어서 세 권을 겹쳐 높으니까 웬만한 대백과사전의 분량이다. 전두환·노태우 등을 우두머리로 하는 광주학살사건 당시의 방자한고위군인들의 야만적 행위는 대체로 지난 2년동안 진행된 특별법 재판의 현장방송과 신문기사를 구역질을 참으면서 보았던 그대로이다. 어쩌면 이럴수가 있을까?

2천5백쪽을 꽉 메운, 몇 달에 걸친 신문과 답변을 읽고나서 느낀 감상은한마디로 인간쓰레기들이라는 결론이다. '명예' ''염치 '정직' '책임감'을 생명으로 하는 것이 군대이고 '직업군인'이라고 외쳐댔던 그들이다. 그런데,특별재판의 전체과정에서 국민이 확인했듯이, 국회의사록의 어느 한군데서도 자신들이 마음먹고 저지른 학살행위에 대해서 떳떳하게 사실을 인정하는군인은 하나도 없다.

왕년에 총칼과 학살행위로 국가권력을 거머쥐고 천하를 호령했던 독재군부의 최상층부를 구성했던 그들의 답변은 하나같이, "모릅니다." "기억이 안납니다."이다. 광주라는 전라남도의 한 도시에서, 1980년 5월의 며칠 사이에군대에 의해서 2백60여명의 인간이 죽고 2천7백여명의 부상자가 난 것은 그들도 시인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안했습니다." "잊어버렸습니다.", "누가 했는지 모릅니다."로 일관하고 있다. 한심한 작태들이다.

한보사건으로 국가의 기틀을 멍들게 하고 국가의 기강을 병들게 하고, 전세계에 이 나라를 xdco로 웃음꺼리를 만든 정태수라는 사람은 "돈밖에 모르는 장사꾼"이다. 이 '장사꾼'이 신문과 재판의 자리에서 멀정한 두 눈을 지긋이 감고 "내책임 아니오", "기억이 안납니다", "모르겠습니다"를 되풀이한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이다.

정태수라는 장사꾼에게 '명예'나 '책임감'을 요구하거나 '청렴결백'같은 덕행을 기대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전두환이나 노태우를 비롯한 대한민국 군대의 대장·중장·소중·준장·대령들 가운데 한 사람쯤은 "내가 명령했오."라고 나설만도 하지 않은가! 실상이나 행동에서 깡패들과 추호도 다를바 없다. 오히려 깡패보다도 못한 파렴치범들이다. 국가의 대통령 집무실에 외국제 대형금고를 숨겨놓고, 사과궤짝으로 돈놀이한 꼴들을 보라! 국민에게 밤낮없이 입으로 '반공사상', '청렴결백', '민주주의' '솔선수범' 따위의 구호를 외치면서 뒤에서는 국민을 무차별 대량학살하고 더러운 축재를 일삼았던 것이다. 장사꾼 정태수보다도 추잡하고 깡패보다도 비열하다.

이미 특별재판 과정에서 구역질을 참으면서 보았던 이 나라 군대와 그 집단들의 타락성과 야만성을 2천5백쪽의 국회의사록에서 재확인하면서, 마찬가지로 인민에 군림했던 '대일본제축 황군' 군대의 제2차대전 전쟁범죄자들을 심판한 '극동전쟁범죄재판'기록을 읽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중국침략전쟁중 중국각지에서 저지른 대학살을 비롯한 야수적 만행들의총책임자격인 중국 중부지역군 총사령관 오까무라 육군대장이 피고인 석에불려나온다. 연합군측 전범재판 검찰의 한 사람인 키난검사가 묻는다.

"피고인은 그 당시 중지(中支) 방면군 총사령관이었습니까?"

"(힘없는 소리로)예, 그렀습니다."

"그 때 샹하이(上海) 지역에서 20만명으로 알려진 중국인 대량학살이 저질러진 일을 알고 있습니까?"

전 아시아를 호령하던 왕년의 대일본제국 육군대장이 답변한다.

"…에에 또… 그 비슷한 이야기는 들었으나, 에에 또… 기억이 확실치 않습니다."

벌떡 일어선 키난검사가 다구친다.

"예하 ○○사단에서 보고가 있었지요? 그랬지요? 대답하시오!"

"…예에 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예하부대들의 반인도적인 만행을 중지시키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법정 안을 둘레둘레 살펴보고, 천장과 마룻바닥을 한 번 씩 번갈아 쳐다본 다음, 중국 5억인을 그 이름 하나로 벌벌 떨게해던 '반공주의 천황주의'의 맹장 대일본제국 육군대장은 입을 연다.

"예에… 또, 그것은 에에 또, 사단장의 권한에 속한 문제로서, …에에 또저는 사단장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키난검사는 두 걸음 바짝 다가가서 묻는다.

"예하군부대들의 군기를 관리할 권한은 방면군 사령관에게 있지요? 안그래요?"

일본군 육군대장은 오른쪽 손톱을 깨물어 본다. 그리고 또 왼쪽 손톱도 깨물어 본다. 그리고는…

"…그것이 그런데, 에에 또…권한은 있지만 사단장들의 권한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에에 또……."

극동전쟁범죄재판 기록을 읽으면서 알게됐던 사실, 즉 인민의 통제를 벗어난 독재군대의 권력자들의 본질과 생태는 어나 나라에서나 다름이 없다는사실을 오늘 광주하갈 진상조사서의 방대한 기록을 읽으면서 재확인하게 된다. 소위 '군인정신' '용맹심' '정직', '염치', '명예심', …따위는 티끌만큼도 찾아 볼수 없다. 전과 몇 범의 잡범들만도 못하다.

광주시민 2백60여명에게 총을 쏘라고 명령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2천여명의 불구자와 부상자가 생긴 군사작전의 책임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책임자들은 "내가 아니다."와 "기억이 없다."로 일관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불교계의 일부에서는 대통령선거의 바람이 솔솔 불기 시작하자 전두환·노태우씨 등의 사면을 위한 움직임이 살금살금 일어나고 있다고들린다. 광주대학살과 계엄령으로 잡은 정권에서 쫓겨나 백담사로 도피했을때 각지방의 불교도가 떼를 지어 백담사를 찾아갔던 추태가 되풀이 되려는것 같다. 남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뜻은 바로 부처님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그런 불교도들이 할 일은 살인범자와 파렴치범의 사면청원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죄인으로서의 깊은 뉘우침과 피해자와 국가에 사과하는 마음을 일으키도록 애쓰는 일이다. 좋은 뜻에도 해야할 일에는 선·후의 순서가 있는 법이다.


리영희/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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