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견이란 '내가 부처의 경지에 이르렀노라'하면서 부처를 특별하게 여기는 소견이다. 그런데 만일 '본래의 자기'를 자각하여 부차가 되었다 하더라도 내가 부처가 되었다고 의식할 때는 이미 그 부처의 자리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을 믿는 종교에서도 아이스텔.엑그할트 같은 사람은 '신이라는 존재마저도 잊어버린 거기에 진정 신이 계시다'고 갈파하고 있는데 하물며 불교에서 '내 스스로가 부처다'하는 의식을 내게 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자아를 일으키는 것이니, 부처까지도 잊어버린 거기에 진정 부처가 있다는 것이 선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견이란 '내가 법을 얻었다'하는 집착이다. 옛 선지식들은 범부중생이 번뇌망상에 얽매어 있는 것을 쇠사슬에 얽매임이라 하였고, 수행자가 나는 부처의 경지에 이르렀다거나, 법을 얻었다거나 하는데에 막혀있는 것을 금사슬에 얽매임이라 하였다. 그것은 모처럼 애써 수행하여 훌륭한 경지에 들고, 바른 법을 얻었다하더라도 만일 거기에 조금이라도 착해 있다면 그것이 쇠줄이었던 금줄이었건간에 사슬이 되어서 그를 묶어 놓아 커다란 자유를 빼앗아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전스님이 "문수나 보현같은 대보살이라도 만일 조금이라도 불견.법견을 일으키기만 한다면 곧 스무방망이를 때려주리라"하니까 선듯 조주스님이 자신이 스스로 자기가 든 그 방망이를 맞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노장님이 바로 불견.법견을 일으키고 계시니까요. 그러니 방망이를 맞아야 할 분은 문수.보현보다는 오히려 노장님 자신이십니다."하는 투로 들어댔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남전스님은 "그래 내게 어떤 허물이 있다는겐가"하셨다. 조주스님이 곧 예배하자 남전스님은 설법하시던 법상에서 내려와 조실방으로 돌아갔다.
즉 남전스님이 "나의 어디에 불견이나 법견을 일으킨 데가 있다는 말인가"하시니, 조주스님은 '노장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허물을 아셨다면 그것으로 됐습니다. 그것이 바로 불견.법견이 싹 떨어져 버린 진짜 부처입니다'하듯 아무 말없이 절을 하였다. 그러자 남전스님은 '그대와 같이 눈밝은 인물이 있다면 내가 말한 불견.법견을 모두 털어버려야 한다는 설법이 다 공연히 쓸데 없는 것이었구나'하듯 법상을 내려와 당신 거실로 돌아가시고 말았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참선수행한다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 견성하여 눈맑은 스승에게서 인가를 받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수행정진하여 법을 보는 안목이 좀 열리거나 할라치면 무언가 엄청난 것을 얻었다고 자부하여 흔히 마음속에 불견.법견을 일으켜 거기에 취해있기 쉽다. 그러나 선종의 역대조사가 깊이 받들었던 <금강경>에서 '얻을 법이 없다'한데서 비추어 보도라도 스스로 법을 얻었다고 의식하였을 때 이미 어긋남이 십만 팔천리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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