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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가람-⑧신어산 서림사

기자명 김장호
  • 사설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산경표》는 그 이름이 보이지 않지만 거기 나열된 산줄기에서 미루면 신어산은 낙남정맥의 끝머리에 놓이는 것이 된다. 물론 그 남낙정맥이란 사천의 천금산, 삼천포의 와룡산, 고성의 무량산, 함안의 여항산, 창원의 불모산 등 경상남도 경역에 드는 낙동강의 남쪽을 동서로 뻗는 저산군을 이름이다.

그러나 삼랑진에서 대단원을 이루는 낙동강 분류에서 보면, 그 북동쪽 낙동정맥의 끝자락이 낙동강에 이르러 예리하게 이르러 예리하게 깎아질러 있으니, 그 건너 김해평야의 북단에 솟구치는 무척산(700.2m)과 신어산(630.4m)은 오히려 뿌리를 그 쪽 가지산맥 중에서도 밀양의 천왕산과 양산의 취서산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마치 중국의 산동반도와 황해도 옹진반도가 황해바다 밑으로 이어져 있듯이, 지맥이란 물줄기에 막히어 갈라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신어산은 낙동강 하구를 북.동.남으로 둘러치고 질펀하게 김해평야를 내다보고 앉은 놓임새라, 장장 5백30㎞를 흘러오며 자그만치 2만4천7백50㎢의 유역에 젖줄을 물려주고 있는 낙동강의 그 마지막 요충인 셈이다. 역사적으로 내다봐도 서기 532년 신라에 병탄되기 이전, 2세기에서 6세기까지 낙동강의 전유역을 석권했던 6가야연맹체의 그 큰 집구실을 한 금관가야의 빛나는 문화가 바로 이 신어산 발치아래에서 펼쳐졌던 것이다.

거기 가야땅에 불교가 바다건너에서 바로 건너온 것인가 하는데 대해서는 여태도 정론이 서 있지 아니하다. 김수로왕의 허황옥비가 실지로 아유타라는 인도땅에서 바로 건너온 것인가, 그녀를 수행해 왔다는 오라비 장유화상이 실재인물인가, 혹은 가까이 장유암을 비롯하여 심지어는 창년 화왕산 뒤의 관룡사까지 그 언저리 숱한 사암들이 모두 고구려를 거쳐 신라로 전해진 그 북방전래 이전에 이룩된 것인가 하는 의문들을 깨끗이 삭여줄 방도는 없다.

그러나 나중 임강사라 개명한 왕후사만 하더라도 《삼국유사》에 의하면 수로왕의 8대 손인 김질왕이 수로왕 내외가 합혼한 터에 원가 29년에 지었다고 전하니, 서기로 치면 452년, 신라에서는 눌지왕 36년, 그것은 고구려보다는 80년, 백제보다는 68년 뒤지만, 신라에 불법이 전해진 법흥왕 15년(528)보다 76년이나 앞선다. 더구나 그것이 《삼국유사》의 기록임을 감안할 때 불교의 이런 남방도래설을 아예 묵살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전설로야 지리산 불무장등 어깨죽지에 가앉은 그 칠불암에 가락국의 일곱왕자가 입산 수도했다느니, 생림면 무척산의 암벽에 둘러싸인 그 모은암을 역시 가락국의 왕자들이 이룩했다느니 하는 설화들이며, 혹은 또 지금 허비의 능묘곁에 서 있는 바사석탑의 그 바사석이 인도의 돌이라느니, 불무산용지봉 아래 그 장유암의 돌담 안의 사리탑이 가락국사 장유화상의 것이니라 하지만, 그런 사례들을 모두 허황한 날조로만 접워두어야 할 것인가 모를 일이다.

신어산에 관해서는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등에 그 산이름이 분명히 밝혀진 가운데 더구나 《여지승람》에는 거기 감로사, 구암사,십선사, 청량사, 이세사 등 불우들을 기록하고 있지만 지금 그 이름으로 전하는 절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지금에야 서림사, 동림사, 영구암, 천진암을 헤아릴 뿐이지만, 그 중에도 유서 깊기로는 역시 서림사와 영구암을 손꼽는다.

서림사는 《범우고》 《가람고》, 《대령지》등에 일찍부터 그 이름이 전하는 터요, 사기에 의하면 장유화상이 창건한 후 임진왜란 때 불타고 나중 묘존, 경화화상이 재건했다고 한다. 지금은 은하사라는 이름으로 속화된 느낌이지만, 한가지 모를 일은 그것이 서람사이기 이전, 혹은 이후에 《여지승람》에 기독된 그 감로사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여지승람》에는 그것이 신어산 동쪽에 있다고 했지만 지금은 남쪽에 놓였으니 그것만 착오가 질 뿐, 그 절이 끼고 앉았다는 옥지연은 《세종시록지리지》의 가야진 즉 낙동강 나루터를 가리킴이니 그것은 다름아닌, 《삼국유사》에 보이는 그 만어산의 오나찰녀와 왕래한 나중에 수로왕이 부처님의 법력을 빌어 다스렸다는 그 독을 품은 용이 살던 연못과 같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한참 공사중이라 거기 수미단에 새겨졌다는 쌍어문도 못본 채 절뜨락에서 쳐다보면 신어산은 그 높이와는 딴판으로 암봉이 숭숭히 노출된 기암괴석의 암산이요, 거기 또 노송이 우거져 한결 더 유현해 보인다. 그 돌올한 앉음새만큼 가파른 된비알을 기어올라 활짝 전망이 트이는 영구암에 이르면 가뜩이나 목이 탔던 탓인가. 거기 물맛은 더욱 차고 맑다. 그 이름도 영특스런 거북암자, 수로왕의 탄생지 구지봉이며 그 수로왕을 맞이할 때 불렀다는 '영군신가'의 그 '거북아 거북아'하는 그 거북들과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닐거라는 느낌이 든다.

벼랑을 끼고 돌아 정수리에 올라서면 그야말로 거북이 아니면 대어의 등에 올라앉은 느낌이다. 등뒤로 낙동강이 굽이치는 가운데 발아래 광활하게 퍼진 김해평야의 그 앞에 명지 삼각주, 그리고 그 너무 가이없이 트인 남해바다. 그 바다로 해서 불교가 전해졌다는 것은 그 바다 고깃떼가 이리로 헤엄쳐 오는 형상과 다를 것이 없다. 《묘범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의 한 대목에도 있듯이 '묘음관세음은 범어의 소리요 바다 건너오는 소리라.

그것은 세간의 잡음들을 갈앉히는 아름다운 소리'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서쪽 영운이 고개로 해서 분산성에 이르러 되돌아보면 신어산은 더구나 정상부위가 대지를 이루어 마치 한마리 고기가 하늘을 헤엄쳐 가는 형국이다. 낙동강 천리 기름진 물줄기와 남쪽바다 흑조를 타고 밀어닥친 묘음을 맞아들여, 그것을 다시 철등 당시로서는, 고급한 문물들로 빚어내어서는 일본을 비롯한 바다 밖으로 실어다낸 그 가야문명의 표상이 바로 앞에서 말한 두마리 물고기무늬가 아니었던가. 《삼국유사》의 기록으로는 마야사, 트리비다말인 그 물고기는 온 세계로 문화를 펴나가는 자유와 평화의 영원한 상징이었으니, 이 산 이름마저 그 신령스런 물고기였던 것이다.


김장호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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