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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청도 박곡리사지

기자명 임석규

‘세속오계’ 산실 가슬갑사 비롯한 다섯 개 갑사 중 한 곳 추정

오갑사, 대작갑사 중심으로
동서남북 4곳에 사찰 건립

오갑사 관련 중요 인물로는
세속오계 제정한 원광 스님

청도군, 가슬갑사를 비롯해
오갑사 찾으려 꾸준히 노력

운문사의 전신 대작갑사와
천문갑사 외에 위치 못찾아

청도 박곡리사지 특히 주목
여래좌상 등 신라불상 남아

소작갑사지의 후보지 추정
고려후기까지 운영된 듯

청도 박곡리사지 전경.

1718년에 간행된 ‘청도군 호거산 운문사사적(淸道郡虎踞山雲門寺事蹟)’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18년(557)에 한 신승(神僧)이 북대암 옆 금수동의 작은 암자에서 3년 동안 수도하여 도를 깨닫고, 도우(道友) 10여 인의 도움을 받아 7년 동안 오갑사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오갑사는 대작갑사(현 운문사)를 중심으로 해서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현 대비사), 남쪽에 천문갑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총칭하는 것이다.

오갑사와 관련해 가장 주목해야 할 인물은 원광법사이다. 원광 스님의 속성은 설씨 혹은 박씨라고 하며, 신라 왕경인이다.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삼국유사’나 ‘해동고승전’ 등에서 “성품이 허무와 정적을 좋아하고 말 할 때는 항상 웃음을 머금으며 얼굴에 성내는 기색이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도량이 넓은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스님은 25세에 중국 진나라 수도 금릉(지금의 남경)으로 유학을 떠났었는데, 어느 날 장엄사 승민 스님의 제자에게서 법문을 듣고 감화되어 진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승려가 되기를 청하였다. 일반 유학생에서 유학승으로 신분이 바뀐 것이다.

불상 전경.

원광 스님이 신라로 돌아온 것은 신라 진평왕 22년(600)이었다. 이때 삼국은 항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때였다. 그는 귀국 직후 왕경에 머물지 않고 왕경과 떨어진 곳이기는 하지만 전략적 요충지인 청도의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점찰법회를 열고,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제정하였다. 전자는 일반 백성을 위한 것이고, 후자는 신라 청년들에게 내려준 계율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세속오계는 신라 화랑도정신의 근간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가슬갑사는 화랑도 이념의 산실이 된 것이다. 운문사 사적비에 의하면 오갑사의 제1중창주는 원광법사라고 되어있다.

삼국통일의 정신적 근원지인 가슬갑사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후삼국 때 이미 폐사되었으며 사찰에 있었던 기둥들이 모두 대작갑사로 옮겨졌다고 한다. 통일신라 이후 어떠한 기록에도 보이지 않아 가슬갑사는 폐사 이후 중창되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일연 스님도 그 터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대략적인 위치만 기술하고 있다.

그동안 청도군은 가슬갑사를 포함한 오갑사를 찾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1970년도에 이미 ‘운문산사적개발위원회’를 만들어 가슬갑사지를 찾고자 하였으며, 그 후 청도군의 주도아래 가슬갑사지를 찾기 위한 본격적인 학술조사가 시작되었다. 사적개발위원회가 발행한 보고서에 의하면 1973년도에 2차례 조사했으며, 그 결과 건물 초석으로 사용되었을법한 석재들이나 장대석들이 상당수 남아있는 ‘안삼계리 초석군’을 가슬갑사지로 비정하였다. 이어서 1993년 경북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이 실시한 2차 조사에서는 바깥삼계리 유적을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였다.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이어 3차로 가슬갑사지를 조사한 곳은 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학연구소이다. 불교사학연구소는 기존 경북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이 제기한 바깥삼계리 유적이 가슬갑사지라는 주장을 지지하였다. 이후 1998년 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학연구소와 동국대학교 박물관이 함께 바깥삼계리유적을 발굴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가슬갑사지의 흔적을 찾지는 못하였다.

불상 광배.

오갑사 중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곳은 현재 운문사의 전신인 대작갑사와 운문면 신원리에 있는 천문갑사 뿐이고, 다른 갑사들은 앞의 가슬갑사처럼 위치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에 있는 절터에 통일신라 때 조성되었다고 생각되는 불상과 대좌, 그리고 광배까지 남아 있어서 운문사 사적에는 대비갑사라고 되어있지만 ‘삼국유사’의 내용대로 하면 원래 ‘소작갑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 아닐까 주목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소작갑사’의 위치 또한 박곡리의 이 절터를 비롯해 총 세 곳이 가능성 있는 곳으로 언급되어 왔다.

먼저 1993년도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펴낸 ‘가슬갑사지 지표조사 보고서’에서는 ‘운문사사적’에 언급된 ‘대비갑사’의 위치를 토대로 이 절터, 이 절터에서 1㎞ 떨어진 ‘베틀바위 부근 사지’, 이 절터에서 1.5㎞ 떨어진 ‘오봉리사지’를 ‘소작갑사지’일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추정하였다. ‘베틀바위 부근 사지’는 박곡리 산81번지 일원인데, 우리 연구소에서 2012년 펴낸 ‘한국의 사지’에 ‘소작갑사지’로 보고된 바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불상대좌의 지대석과 하대석, 석불좌상의 하반신이 남아 있고 선문 와편 등이 산재되어 있다. ‘오봉리사지’는 오봉리 1114-1번지 일원이다. ‘한국의 사지’ 보고서에 의하면 과수원 내에 석탑재 1매가 있고 당초문, 연화문 와편 및 선문 와편 등의 유물이 산재되어 있다고 한다. 이들 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소작갑사지일 가능성이 있는 세 곳의 절터 모두에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고 보이는 비슷한 유물이 출토되고 있고, 또한 석탑, 불상 등의 소재문화재도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등 유적의 성격이 거의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현재로서 지표조사 결과만을 토대로 소작갑사의 위치를 명확하게 비정하기는 어렵다.

경북 청도 박곡리 석조석가여래좌상. 1918년 촬영.

한편, 이 절터의 불상과 탑에 대해서는 1918년에 조사가 이루어진 바 있다. ‘대정칠년도고적조사보고(大正七年度古蹟調査報告)’에는 ‘금천면 박곡동 석불병석탑(錦川面 珀谷洞 石佛竝石塔)’에 대한 간략한 조사 내용과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이 사진자료에 의하면 불상은 보호각 내에 봉안되어 있었고, 대좌와 광배, 불신 모두 온전한 모습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박곡리사지의 영역은 운문산 북쪽 계곡부에 있는 미륵댕이마을 일원이다. 미륵댕이마을은 동쪽 운문산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르는 계곡을 따라 펼쳐진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동쪽 계곡 상류에는 대비저수지가 있으며, 대비저수지의 남쪽 끝에 현 대비사가 있다. 또한 이 절터에서 동쪽 능선 너머에 있는 천문지골의 하류에는 운문사가 있다. 앞서 언급한 ‘베틀바위 부근 사지’는 이 절터 북쪽 계곡 중턱에 있으며, 약 900m 가량의 거리를 두고 있다.

사역의 중심은 현재 불상이 봉안되어 있는 박곡리 651번지이다. 현재 불상 보호각은 ‘미륵당’으로 불리고 있으며, 담장 내에 보호각 1동과 석탑이 있다. 마을 주민(80세, 마을 거주 70년 이상)의 전언에 따르면 사찰은 오래 전에 폐사되었고, 마을이 들어서면서 그 흔적이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또한 불상은 일제강점기 후반 무렵 화재로 인하여 인접 민가가 불에 타면서 손상을 입었다고 한다.

청도 박곡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03호)은 보호각 내에 봉안되어 있으며, 전체 높이는 289.5㎝이다. 불상은 화재로 인하여 두부의 윤곽만 남아 있고, 대좌 상대석도 크게 파손된 상태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불상은 1918년도에 조사되었는데, 당시 촬영한 사진을 보면 불상은 보호각 내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두부에는 이목구비의 윤곽과 나발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고 대좌 상대석은 중앙에 원형화문이 장식된 단판 연화문을 이중으로 두른 형태였다. 또한 배후에는 화문과 화염문으로 장식된 주형광배가 세워져 있었다. 이 주형광배는 현재 망실되었고, 보호각 바깥에는 이 광배와는 다른 광배가 있어서 이 절터에 불상이 한 구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경북 청도 박곡리 석조석가여래좌상 대좌. 1918년 촬영.

불상은 일제강점기 사진자료를 참고하면, 얼굴은 방형에 가까운 형태이고, 좁은 이마의 중앙에 백호공이 있었으며 눈썹은 호형의 곡선을 이루며 길게 새겨져 있고, 가늘게 뜨고 있는 눈 밑에는 호형의 눈밑 주름이 표현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이 사진을 촬영했던 당시 이미 코와 입은 마모된 상태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오른손을 무릎 위에, 왼손을 복부 위에 둔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으며, 다리는 결가부좌하여 양 발을 노출시키고 있다. 대의는 오른쪽 어깨를 노출시켜 편단우견으로 입었다. 양 다리 사이에는 부채꼴형 옷주름이 표현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도 이 부분은 파손된 상태였다.

대좌는 상·중·하대가 모두 남아 있지만 온전하지 않다. 현재 하대석은 하부 팔각의 단 위에 복련의 연화좌만 드러나 있는 모습이며, 그 이하는 바닥면 아래에 매몰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조사자료에도 하부는 조사되지 않아 지대석 등의 유무는 알 수 없다. 중대석의 상부를 비롯한 여러 부분에는 화재로 인한 균열이 있고, 표면이 떨어져 나가는 엽상박리가 진행되고 있다. 상대석은 원래 원형의 앙련좌였으나, 현재 외연의 대부분이 파손되었다.

이 불상은 현재 화재로 인한 심한 손상을 입은 상태이지만, 원래 불상의 모습은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66호), 경주 안계리 석조석가여래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2호), 합천 청량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65호) 등과 유사한 양식을 갖추고 있고 규모 또한 안계리상과 유사하다. 이로 보아 불상의 제작시기는 8세기 후반 이후일 것으로 추정되며, 8세기 경주 중심의 불상양식에서 9세기 경북지역 불상양식으로 지방화되는 과도기의 양식적 특징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석탑은 상층기단과 별석괴임, 1층 탑신부, 2층 옥개석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기단은 지대석과 면석, 갑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래 3층의 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탑은 1993년에 수리되었는데, 부재를 모두 해체하여 지대석의 형태를 바로잡고 지표에서 약 15㎝ 가량 들어올려 복원하였다고 한다.

박곡리사지는 현재까지 그 위치가 명확히 비정되지 않은 ‘소작갑사지’의 후보지 중 한 곳으로, 산포유물과 소재문화재 등의 양상으로 보아 통일신라 8세기 이후에서 고려후기까지 사찰이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가슬갑사지를 비롯한 오갑사의 위치를 찾고자 여러 차례의 지표조사와 학술조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발굴조사 등의 정밀조사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여서 아직까지 명확한 위치 비정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향후 이 절터를 포함한 운문산 일대 불적의 정밀학술조사가 다시 진행된다면, 중요지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장 noalin@daum.net

[1442호 / 2018년 6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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