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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②

6세기 후반 명승들이 해외로 망명하면서 고구려 멸망 가속

수당과의 계속된 전쟁으로
국력 크게 쇠퇴 멸망 부추겨

중앙집권세력이 분화하고
불교도 큰 변화 소용돌이

연기법에 따른 귀족간 연대
권력다툼에 무너져내리면서
불교의 통합기능 작동 못해

스님들 국경 통과 용이했기에
국익 위한 활약도 두드러져

신라·백제·왜로 스님들 망명
포교와 정치적 측면 공존해

충주고구려비(국보 제205호). 문화재청 제공
충주고구려비(국보 제205호). 문화재청 제공

고구려는 광개토왕대(391〜413)를 거쳐 장수왕대(413 491)에 이르러 만주와 한반도의 북쪽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옹유하고 통치체제·문물제도가 완비된 대제국을 형성하여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6세기 중반기에 이르면 국내외의 정세는 크게 변하였다.

국내의 문제로서는 545년 안원왕(安原王)의 사후 왕위계승 문제로 귀족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중앙의 지배세력이 분열되기 시작하였으며, 대외적인 문제로서는 투르크민족의 일파인 돌궐(突厥)이 유연(柔然)을 쳐부수고 중국북방 초원지대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하여 고구려의 서북지방을 위협하게 되었다. 양원왕(陽原王) 7년(551) 신라가 한강 상류지역의 10군을 공취하던 해에 돌궐군이 침략해 신성(新城)을 포위했다가 이기지 못하자 백암성(白巖城)으로 옮겨 공격했다. 그러나 마침내 1000여급을 살획하면서 격퇴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나, 요동지방의 서부전선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 같은 내우외환으로 고구려의 방위력이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백제의 성왕(聖王)과 신라의 진흥왕(眞興王)은 공동작전을 전개하여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공취하였다. 이에 신라는 한강 상류 지역의 10군을 점령하고, 이어 한강 하류 지역을 점령한 백제의 군대를 쳐서 또 다시 축출한 뒤에 한강 유역 전부를 독점하였다. 이에 격분한 백제의 성왕은 신라를 직접 공격하였으나 도리어 관산성(管山城, 옥천)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120년간이나 지속되었던 두 나라 사이의 동맹은 마침내 결렬되기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두 나라는 백제가 신라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110여 년간 격렬한 전투를 계속하게 되었다.

한편 한반도의 남쪽 지역에서 신라와 백제가 격렬한 싸움을 계속하는 동안 대륙 지역의 국제정세에도 새로운 긴장이 조성되고 있었다. 중국에서 오랜 기간 분열을 계속해 오던 남북조(南北朝)를 589년 수(隋)가 통일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북방의 초원 지대에서는 돌궐이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여 수를 위협하게 되었다. 만주와 한반도의 북쪽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고구려는 이 돌궐과 연결하여 수에 대항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나제동맹의 결렬로 고구려와 새로운 동맹 관계를 맺은 백제는 바다 건너 왜(倭)와 통교하고 있었다. 이렇게 남북으로 연결되는 돌궐·고구려·백제·왜와 대항하기 위하여 수와 신라, 그리고 수를 이은 당(唐)과 신라의 두 진영이 악수를 하였다. 이 같은 남북세력 대 동서세력의 대립은 조만간 커다란 풍운을 불러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양대 진영의 대표자로 나서서 대결한 것이 고구려와 수의 전쟁, 그리고 고구려와 당의 전쟁이었다. 이러한 양자의 사생결단의 전쟁은 고구려가 멸망하고 삼국이 통일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고구려는 6세기 중반 이후 대내적으로는 중앙의 지배세력이 분열되고, 대외적으로는 외국세력의 압력이 가중되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자, 그때까지 국가의 발전과 왕권의 강화에 기여했던 불교도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불교계의 변화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수많은 승려들이 신라와 백제, 그리고 왜 등 외국으로 망명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가운데 특히 유명한 사건은 제24대 양원왕 7년(551) 혜량(惠亮)의 신라로의 망명과 제28대 보장왕(寶藏王) 9년(650) 보덕(普德)의 백제로의 망명이었다. 그리고 제25대 평원왕(平原王) 26년(584) 무렵 왜(倭)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혜편(惠便)을 비롯하여 그 이후 수많은 고구려 승려들의 일본지역으로의 망명이 이어졌다. 또한 6세기 후반기 이후 중국에서 활약하던 파약(波若)·인법사(印法師)·실법사(實法師)·지황(智晃) 등이 귀국하지 못한 것은 고구려가 수·당과 전쟁 중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백제에서도 6세기 중반 이후 수많은 승려들이 왜로 건너가고 있었는데, 불교의 구법과 전도라는 종교적인 포교 활동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점이 우선 고려되어야 하겠지만, 아울러 정치적인 망명 사유도 간과할 수 없다. 본고에서는 고구려 승려들의 국외 망명 사건 가운데, 특히 혜량의 신라로의 망명과 보덕의 백제 지역으로의 망명 사건을 중심으로 6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의 지배세력과 불교의 관계 변화, 나아가 국가발전과 불교의 관계 변화의 의미를 유추해 보고자 한다.

먼저 혜량은 양원왕 7년(551), 신라에 망명하여 최초의 국통(國統, 또는 寺主)이 되어 국가불교(國家佛敎)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혜량의 망명 사건은 ‘삼국사기’ 거칠부전(居柒夫傳)에서 자세하게 전해주는데, 그 전기의 내용이 거의 전부 혜량과의 관계 사실로 채워졌음이 주목된다. 거칠부는 내물마립간의 5대손으로서 진흥왕 6년(545)에는 왕명으로 국사(國史)를 편찬하였으며, 12년(551)에는 역시 왕명으로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침공하였는데, 거칠부의 군대는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상류 지역의 10군을 점령하였다. 거칠부는 그에 앞서 젊을 때에 승려가 되어 고구려를 정탐하려고 잠입하였다가 혜량의 불경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혜량의 도움을 받아 후일을 약속하고 귀국하였다. 그 뒤 고구려의 10군을 점령할 때에 노상에서 혜량의 무리를 만나 함께 귀환하게 되었다. 이때 혜량은 거칠부에게 말하기를, “지금 우리나라의 정사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얼마 되지 아니할 것이니, 귀국의 지역으로 데려가기 바란다”고 하였다. 거칠부는 수레를 같이 타고 돌아와 진흥왕에게 아뢰어 국통을 삼게 하고, 처음으로 백고좌회(百高座會)와 팔관의 법(八關之法)을 개설케 하였다. 이로서 혜량의 망명에 의해 고구려의 국가불교가 신라에도 전해져 실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이상의 내용 가운데 주목되는 사실은 2가지인데, 첫째는 승려의 행색으로 정탐하려는 목적에서 적국에 잠입하였다는 사실이다. 당시 승려는 국적을 초월한 존재로서 비교적 국경을 쉽게 넘나들었던 것으로 보이며, 삼국의 항쟁 가운데서 승려들은 그러한 이점을 이용하여 평화의 종교이기에 앞서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행위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예로서는 20대 장수왕 63년(475) 백제의 한성을 침공하기 앞서 승려 도림(道琳)을 첩자로 활용하였던 사실을 들 수 있다. 둘째는 고구려의 정사가 어지러워 멸망할 것이라는 혜량의 말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이에 대한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일본서기’ 긴메이천황(欽明天皇) 6년(545)조과 7년(546)조에서는 ‘백제본기(百濟本紀)’를 인용하여 23대 안원왕이 죽고 24대 양원왕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중부인(中夫人)이 낳은 왕자와 소부인(小夫人)이 낳은 왕자 사이에 왕위 계승을 놓고 그 외가인 추군(麤群)과 세군(細群)이 궁문에서 전투한 결과 세군 측의 사망자가 2000여인이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일본서기’에서 인용한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 3책은 백제가 멸망한 뒤 일본에 망명한 백제인이 지참한 기록에 의거해 편집한 역사서로 추정되는데, 그 가운데서 특히 ‘백제본기’의 내용은 정확한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로써 양원왕은 두 명의 왕비족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를 겪은 끝에 비로소 즉위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구려의 지배세력은 5부체제로 구성되었는데, 원래 각부는 독립된 국가들이었다. 국가체제의 정비에 따라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으나, 부족적인 전통이 완전히 청산된 것은 아니었다. 왕도 처음에는 5부의 대표자회의에서 선출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부족회의 전통은 후대에도 수상직인 대대로(大對盧)를 선거하는 제도로 남게 되었다. 3년마다 교체되는 대대로를 선출할 때에는 서로 전투를 감행하기도 하였으며, 국왕은 궁문을 닫고 지켜보다가 승리한 자가 맡도록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관등은 대대로 이하 14등급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가운데 1등급부터 5등급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까지의 고위 관등 소유자들로 구성되는 최고위 귀족희의에서 중요한 국사를 처리하였으며, 선출직인 대대로가 의장을 맡았다. 이로써 연맹왕국으로 출발한 고구려는 원래 공화제국가(共和制國家), 과두제국가(寡頭制國家), 또는 귀족제국가(貴族制國家)의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부족적 전통은 광개토왕대와 장수왕대의 전성기를 거치면서도 청산되지 않고 강인하게 남았고, 쇠퇴기에 접어든 시기인 안원왕의 왕위계승과정에서 귀족세력의 다툼으로 다시 폭발하게 되었다. 그러한 귀족세력의 분열은 고구려 말기 연개소문의 등장 때까지 계속 격화되어 가서 마침내 고구려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석존 당시 불교교단의 이름인 상가(saṃgha)는 원래 공화정체의 국가, 또는 동업조합으로서의 상인조합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석존은 국왕의 권한이 강화된 왕국보다는 공화국을 선호하여 자신의 교단의 이름으로 채용하면서 적극적인 지지를 표방하였다. 그리고 공화국을 모델로 하여 자신의 교단인 상가에서 평등한 관계와 민주적인 운영 방식을 통하여 구성원간의 완전한 화합을 추구하였다. 또한 석존은 상가의 운영원리로서 연기법을 제시하였는데, 이 연기법은 존재의 관계성(關係性)의 법칙, 또는 상의성(相依性)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관계를 가짐으로써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그 관계가 깨어질 때 존재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고대국가의 발전과정에서 부족회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부족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국가정신 수립의 철학적인 기반을 마련케 한 것은 바로 이 불교의 연기법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사학계에서는 고대국가의 발전과정에서 불교의 역할을 연기법 대신에 업설(業說)과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사상에서 추구함으로써 귀족들의 신분적 특권을 인정해 주는 이론으로서 환영받게 되었다는 주장이 정설화되었다. 그러나 고대국가의 발전과정에서 부족의식의 극복과 국가정신의 수립이라는 문제에 비하여 귀족들의 신분적 특권을 인정하는 문제는 부차적인 의미에 불과하다. 더욱이 불교사상 자체 면에서도 근본교설인 연기법에 비하여 업설과 윤회전생설은 브라흐만의 전통과 힌두교의 사상에서 불교가 받아들인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결론적으로 삼국 가운데 가장 선진이었던 고구려에서는 광개토왕대·장수왕대의 전성기를 지나 6세기 중반 쇠퇴기로 접어들면서 귀족세력의 분열과 대외적인 압력의 가중으로 인하여 불교의 연기법이 더 이상 통합과 조화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고, 혜량 같은 명승들이 다른 나라로 망명해 가게 됨으로써 국가의 멸망을 초래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45호 / 2018년 6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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