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화엄석경 세미나 2. 화엄석경의 조성시기
화엄사 화엄석경 세미나 2. 화엄석경의 조성시기
  • 김복순 교수
  • 승인 2018.07.09 16:39
  • 호수 14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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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석경은 9~10세기 전문 각자승에 의해 조성됐을 것”

화엄석경 대상은 60화엄
60화엄 성행은 신라하대
석경, 글자수 49만7451자
전문 사경·각자승 등 필요
전문 각자승 집단 양성은
신라하대 헌강왕 이후 시기
김복순 교수는 “49만 7451자의 화엄석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사경, 각자 등 전문적인 집단이 필요했다”며 “그런 집단을 양성한 것은 신라 하대 헌강왕 이후 시기”라고 강조했다. 화엄사 성보박물관 제공
김복순 교수는 “49만 7451자의 화엄석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사경, 각자 등 전문적인 집단이 필요했다”며 “그런 집단을 양성한 것은 신라 하대 헌강왕 이후 시기”라고 강조했다. 화엄사 성보박물관 제공

화엄석경의 조성 시기는 7세기, 8세기, 9세기 등 여러 견해가 도출되어 있고 이에 대한 연구사 정리도 되어 있는 상태이다. 근래 제출된 견해로 화엄석경을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의 변상도와 비교하고 ‘금강경’ 석경과의 유사한 서풍을 들어 8세기 전반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여러 전거를 들어 8세기 전반으로 올려보고 있으나, 필자는 이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9~10세기 설을 주장하는 입장임을 밝혀두고자 한다.

신라에는 불교유입 이후 중국으로부터 많은 불경들이 들어왔다. 명관의 전래에 이어 자장의 전래로 대장경이 대부분 갖추어진 것이다. 이후로는 새로이 역출된 불경과 장소(章疏)만이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는 호국 공덕신앙의 측면에서 사경이 행해지고, 불탑에는 무구정광대다라니가 봉안되어졌다. 여기에 더하여 석경 형태로 불경을 전하려는 불사가 이루어졌으므로, 화엄석경을 조성한 이들의 출현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화엄경’ 사경과 ‘화엄경’ 석경의 비교이다. ‘화엄경’ 석경은 그 대상이 60화엄인 데 비해 사경은 80화엄이다. 또한 조성을 발원한 이를 보면, 석경은 미상인데 비해, 사경은 경덕왕 대에 황룡사에 적을 두고 있던 연기조사가 부모의 은혜를 갚고 법계중생이 불도를 이루기를 발원하며 사경한 것이다. 연기는 조사라는 호칭으로 볼 때 80화엄을 위주로 한 화엄종의 조사로 생각된다. 그것은 80화엄을 사경하였다는 점에서뿐 아니라, 80화엄의 소인 청량대소(淸凉大疏) 즉 ‘화엄경수소연의초’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 대각국사 의천이 화엄사에 머물면서 연기조사의 진영을 보고 찬시를 짓고, 그의 ‘신편제종교장총록’ 권1에 ‘화엄경개종결의(華嚴經開宗決疑)’ 30권 등 4종류의 저술을 싣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신라에 화엄종을 전래한 해동 화엄초조로 불리는 의상은 60화엄을 대상으로 한 교학체계를 가진 인물로서, 그의 저술인 ‘화엄일승법계도기’에 대한 그의 제자들의 주석서를 모은 ‘법계도기총수록’은 60화엄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60화엄을 텍스트로 하여 석각을 한 이 화엄석경은 의상 내지 그 제자들에 의해 조성되었을 것인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의 제자들이 신라 불교계에서 대덕(大德)으로 활약하게 되는 상황은 신라 하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하였던 것이다.

754년 연기에 의해 80화엄이 사경되고 난 이후, 신라 하대에는 60화엄의 사경이 이루어지고 있다. 민애왕 원년(838) 승 균량이 중심이 되어 선의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춘추지사(春秋之社)를 결성하여 사경을 하고 있다. 정강왕 원년(886) 7월5일에 승 현준이 주조한 춘추지전독회(春秋之轉讀會)에서 60화엄과 40화엄 양부의 사경이 10일 동안 10질이 이루어지고 있다.

9세기에 이르러 매우 속도가 빨라진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많은 사경수들을 동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화엄경’ 석경의 출현은 이러한 사상사적 토양과 환경에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통일신라시대의 장인 가운데 찬자(撰者), 서자(書者), 각자(刻者)에 대한 고찰이다. 신라는 신문왕 2년(682) 국학이 설립되고 경덕왕 6년(747)에 처음으로 전문국학박사를 두었다. 이들은 주역업(周易業), 상서업(尙書業), 모시업(毛詩業), 예기업(禮記業), 춘추좌씨전업(春秋左氏傳業), 문선업(文選業)으로 분류되어졌다. 문선에는 중국의 대표적인 금석문 자료가 게재되어 문선업의 국학전문박사는 금석문에 대한 지식의 체득이 필수였다. 이에 국학 소속의 제업(諸業)박사들은 서법(書法)과 금석학에 조예가 깊었고 이들의 활동으로 인해 당시 서법과 금석학이 풍미하게 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상문사에서 통문박사를 거쳐 한림학사들은 국왕의교와 조를 찬술하고 비석에 쓰거나 새기기도 하였다. ‘성덕대왕신종명’(771), 진주 ‘연지사종명’(833), ‘영천청제비 정원수치기’(798),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871) 등에 나오는 주종(鑄鐘)대박사, 사(史), 전자(鐫字)대박사 등의 배출이 주목되고 있다. 특히 사는 서사(書史)의 약칭으로 관련문서의 작성 및 필사, 전자 등을 담당하였는데, 이들은 고려시대에 개정전시과와 갱정전시과에 나오는 서학(書學)박사, 전서(篆書)박사, 서사 등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신라시대의 장인들은 매우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었는데, 현재 기록에 전하고 있는 신라 장인을 망라해 보면, 대개 목탑과 석탑을 만들던 장인, 종과 불상을 만들던 장인, 사경에 종사한 장인, 금석에 각자(刻字)를 한 장인과 각자승장(刻字僧匠) 등으로 분류된다.

‘화엄경’ 석경의 석수 출현 시기는 다수의 선사비문이 왕성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전후로 추정된다. 선사비문에는 각수 내지 각자승의 이름이 다수 출연하고 있어, 화엄석경을 각자했던 이들 가운데 특히 솜씨가 뛰어난 이들이 발탁되면서 그 이름이 기재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8세기에는 ‘감산사 아미타상조상기’의 사문 석경융과 대사 김취원이 서와 각을 맡은 것으로 보고 있다. 9세기 초에는 ‘고선사 서당화상비’의 각자로 음리화 삼천당주 급찬 ‘고금’이, ‘신생선사비’의 서자로 동계사문 ‘영업’이 나온다.

9세기 후반부터는 많은 장인들이 그 이름을 드러내고 있다. 즉 ‘적인선사비’의 서자로 요극일, ‘보조선사비’의 서자는 김원과 김언경, 흥륜사승 석현창이 각자를 하였는데, 김원은 구양순체의 해서, 김언경은 왕희지체의 행서를 구사하였다. ‘홍각선사비’는 사문 운철이 진우장군 왕희지서를 집자하였고, 거성현의 최경이 비액의 전액(篆額)을 쓰고 보덕사 사문 혜강이 각자 하였다. ‘진감선사비’는 최치원이 찬하고 전서의 제액과 비문글씨도 썼는데, 승 환영이 각자 하였다. ‘낭혜화상비’는 서자로 최인연이 나온다. ‘원랑선사비’는 오등산 보리담사 석가사문 순몽이 서자로, 대통 원랑선사의 문하승 진윤 등이 각자 하였다. ‘수철화상비’는 문하제자 비구 음광이 새기었다. ‘대숭복사비문’은 수 환견 등이 각자로 나온다. ‘해인사묘길상탑기’는 대장(大匠) 승 난교가 쓴 글씨를, 걸사 석의가 지석을 필각 하였다. 그런데 ‘해인사묘길상탑기’와 ‘오대산사 길상탑사’는 모두 승 석희를 서자로 보기도 한다. ‘지증대사비문’은 분황사 승 혜강(慧江)이 나이 83세에 글씨를 쓰고 아울러 글자를 새기었다. ‘진경대사비’는 문하승 행기가 서자, 전액은 최인연이 쓰고 문하승 성휴(性休(林))이 각자하였다.

9세기 후반부터의 서자로는 요극일, 김원, 김언경, 운철, 최경, 최치원, 최인연, 순몽, 석희, 혜강, 행기 등이, 각자로는 석현창, 혜강, 환영, 진영 등, 음광, 석의, 성림(휴)이 나온다.

서자와 달리 각자는 대개 승자들로서, 혜강은 보덕사 사문에서 분황사사문으로 옮기면서 83세까지 각자를 한 것으로 나오고 있는데, 그는 문하에 많은 승장들을 배출하였을 가능성이 보인다.

화엄석경의 전체 글자 수인 49만 7451자를 각자하기 위해 필요한 전문적인 각자승의 수는 집단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80권 ‘화엄경’이기도 하지만, 사경을 하는데 만도 11명의 사경사가 6개월 14일이 걸렸다. ‘백지묵서화엄경’의 발문에 의하면 사경의 기본업무를 담당한 지작인(紙作人)과 경필사(經筆師)는 4두품으로 전라도 출신의 차촌주(次村主)였고, 5두품의 경심장(經心匠)과 불보살상필사(佛菩薩像筆師)와 6두품의 경제필사(經題筆師)는 왕경에서 온 이들로 경을 장정하여 마무리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렇게 사경을 하는 데에도 그 작업을 세분하여 각기 그 일을 책임 맡아 하였다고 본다면, 화엄석경의 경우 역시 그 작업에 있어 돌을 다듬는 이와 글씨를 쓰는 이, 새기는 이, 불보살상을 새기는 이, 불전에 장엄을 하는 작업을 맡았던 이 등 그 작업이 매우 분화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경우에도 대부분의 일은 그 지방민들 가운데 4․5두품의 장인들이 하였을 것이고, 중요한 마무리 작업은 이름난 장인들이 하였을 것이다.

김복순동국대 경주 국사학과 교수
김복순
동국대 경주 국사학과 교수

화엄석경은 4인 이상 서사(書寫)하여 각자한 것으로 그 글자체는 구양순체 계통과 해서체 계통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육조체 계통이 약간 있는 것으로 판독되었다. 최치원의 귀국이 신라에 구양순체를 퍼뜨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니, 이미 김생, 요극일 등에 의해 형성된 신라 명필의 전통에 최치원, 최인연 등으로 대표되는 유학생 출신의 한림학사들이 더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들 명필들과 함께 위에서 언급한 각자승과 가자승의 양산이 가능해진 신라 하대 헌강왕 이후의 시기를 화엄석경 조성의 한 시기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들은 9~10세기에 신라에서 비문을 쓰고 새기었다. 따라서 경주 창림사지 출토의 법화경석과 칠불암 출토의 금강경석을 각자한 이들도 바로 이 신라 하대에 각자를 전문으로 하였던 승장들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화엄사의 화엄석경도 역시 이러한 분위기에서 조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1447호 / 2018년 7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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