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옛 절터를 떠나버린 비운의 불상들
22. 옛 절터를 떠나버린 비운의 불상들
  • 이숙희
  • 승인 2018.07.10 10:06
  • 호수 14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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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가람 지키던 불상이 사라지고 있다

초등학교 보관 중인 석불좌상
당산나무 옆 석조 비로자나불
의령·안동·음성 등 옛 절터서
통일신라·고려시대 석조불상들
관리소홀·무방비 상태로 도난
도난방법 대담·방지대책 시급
의령 중교리 석불좌상, 통일신라, 높이 68㎝. ‘도난문화재 도록Ⅱ’(문화재청, 2006).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정곡초등학교 안에 있던 통일신라시대 석불좌상 1구를 잃어버렸다(사진 1). 원래 석곡리 미륵골의 옛 절터에 있었던 2구의 불상을 1925년에 이곳으로 옮긴 것인데 2005년 7월25일에서 26일 사이에 그중 1구를 도난당한 것이다. 이 불상은 발견 당시 머리와 팔, 무릎 등이 파손되어 있었으나 후에 복원하면서 얼굴을 몸과 다른 석재로 만들어 올려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현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의령 중교리 석불좌상은 높이 68㎝로 신체비례가 적당하고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 등에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특징인 사실적인 조형감이 잘 나타나 있다. 몸에는 한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를 입었는데 오른쪽 어깨 위에 반달 모양의 옷자락이 표현되었다. 옷을 입는 방식과 옷주름 표현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두 손은 심하게 파손되어 있지만 팔의 위치로 보아 오른손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왼손을 무릎 위에 두고 있는 항마촉지(降魔觸地)의 손모양인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항마촉지인은 석가불이 주로 취하는 손 모양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등장한 후 크게 유행했던 불상형식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금계리 석조비로자나불상 역시 1998년 12월2일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사진 2). 이 불상은 탑리 마을의 큰 당산목 옆에 있는 작고 초라한 슬레이트 전각 안에 안치되어 있던 것이다.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불상 앞쪽으로는 허물어진 전탑 일부가 남아 있어 이 주변이 절터였음을 알 수 있다. 탑이 있었던 마을이라 이름도 탑리라 하였다는데 지금은 여름철이라 그런지 나무덩굴이나 농작물로 잔뜩 가려져 있어 그 모습을 알아보기 어렵다. 불상을 잃어버린 전각 안에는 근래에 만든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안동 금계리 석조비로자나불상, 통일신라, 높이 80㎝. ‘불교문화재 도난백서’(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1999).

안동 금계리 비로자나불상은 마멸이 심하여 세부표현이 뚜렷하지 않지만 머리 위에 보관을 쓰고 지권인을 하고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머리와 몸에는 시멘트로 붙인 흔적이 흉측하게 남아 있다. 여래의 모습이면서 보관을 쓴 비로자나불상은 인도 동부 오릿샤 지역에서 유래된 것으로 중국 당대 불상에 나타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불상형식이다. 이런 특이한 모습 때문에 중국 당나라에서 들어온 밀교와 관련 있는 불상 형식으로 보고 있다.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 87번지에 서 있는 석조미륵불입상 또한 1999년 9월9일에 감쪽같이 사라졌다(사진 3). 이 불상의 도난경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미륵불입상은 높이 250㎝로 한적한 노천에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대좌는 일부 땅속에 묻혀 있어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다. 불상의 머리는 몸에 비해 큰 편이며 몸체는 굴곡 없이 밋밋하게 처리하여 기둥과 같은 느낌을 준다.

나발이 얕게 표현된 머리 위에는 육계가 높고 둥글게 솟아 있고 그 위에 원형의 판석이 놓여 있다. 머리 위에 놓인 판석은 고려시대의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과 부여 대조사 석조보살입상 등에서도 보이는 형태이다. 이는 ‘왕이 곧 부처’라는 사상과 관련 있는데 제왕이 쓰는 면류관 형태에서 형식화된 것이다. 이러한 판석은 점차 시대가 내려가면서 4각형, 6각형, 8각형 등으로 다양해지고 조선시대 불상에까지 이어졌다. 둥근 얼굴에는 뚜렷하지는 않지만 눈, 코, 입이 선각으로 표현되었다. 목은 굵은 편으로 어깨와 거의 붙어 있다. 양어깨를 덮고 있는 통견의 법의에는 간략하게 몇 가닥의 옷 주름만 표현되어 있다. 두 손은 가슴과 배 앞에 두고 있는데 얕게 조각되어 있어 입체적이지 않다. 이 석조불입상은 전반적으로 신체비례가 맞지 않는 점이나 밋밋하게 처리된 불신의 표현, 머리 위의 판석, 정교하지 못한 조각기법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이 엿보인다. 특히 상이 크고 머리 위에 판석이 놓여 있는 경우에는 ‘도솔천에 있는 석가보살이 미륵에게 보관을 쓰게 했다’는 설화와 관련 있는 것으로 이 상이 미륵불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음성 유촌리 석조미륵불입상, 고려말∼조선 초기, 높이 250㎝. ‘도난문화재 도록’(문화재청, 2004).

근래에 이르러 머리 위에 판석이 놓여 있는 고려시대의 석조불상들이 집중적으로 도난되었다. 관촉사 석조불상과 같이 큰 불상의 경우는 도난방법도 기상천외하였다. ‘관촉사 유적기’에 의하면, 1907년경 어느 날 저녁 무렵에 일본인 3명이 논산 관촉사에 찾아와 머물렀는데 한밤중에 석조보살입상의 관 위로 그물을 던져 타고 올라가 금불상을 절취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여 충청북도 충주시 용탄동 석조미륵불입상(1998년 6월26일)을 비롯하여, 경상북도 고령 귀원사 석불좌상(1999년 10월2일)과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원각사 석조미륵불입상(1998년 6월21일), 경상북도 영주 유전리 미륵불상(2003년 12월29일), 충청남도 홍성 상하리 석불입상(2005년 3월15일∼3월16일) 등이 모두 도난되었다.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서산마애삼존불 관리사무소 앞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조비로자나불상도 2005년 3월19∼20일 사이에 도난당했다(사진 4). 이 불상은 높이 93㎝로 머리와 불신을 연결한 흔적이 목 부분에 흉측하게 남아 있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으며 누구의 손에 의해 없어졌는지, 그 내막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오랫동안 노천에 방치된 탓에 얼굴의 마멸이 심하나 각이 진 어깨와 양감 없는 네모난 신체, 형식적인 옷 주름 표현 등에서 고려 이후의 불상으로 보인다.

서산 용현리 석조비로자나불상, 고려, 높이 93㎝. ‘도난문화재 도록Ⅱ’(문화재청, 2006).

두 손은 가슴 앞에 올려서 왼손으로 오른손 손가락 전체를 감싸고 있는 지권인을 하고 있으나 흔히 비로자나불상이 취하고 있는 지권인과는 좌우 손의 위치가 바뀌어 있다. 이러한 좌권인(左拳印)의 수인은 중국 당대와 북송대의 비로자나불상 중에서 간혹 나타난다. 우리나라는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상을 비롯하여 강원도 홍천 물걸리 석조비로자나불상, 경상남도 진양군 한산사 석조비로자나불상, 전라남도 광주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상 등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기에 유행한 비로자나불상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좌권인의 비로자나불상은 새로운 불상형식을 수용할 때 흔히 있을 수 있는 단순한 지권인 좌우의 착오라기보다 삼존불상 중의 협시보살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단독상으로 조성되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렇듯, 절터에 방치되어 있는 불상들은 대부분 산중에 있거나 인적이 드문 곳에 있기 때문에 관리가 소홀하여 거의 무방비상태에서 도난되고 있다. 매년 발생하는 불상 도난 사건은 줄어들지 않고 도난방법도 점점 대담하고 다양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보다 근본적인 불상 도난 방지를 위한 대책과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다.

이숙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shlee1423@naver.com

[1447호 / 2018년 7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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