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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법성게’ 제6구 :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기자명 해주 스님

진성은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룬다

문수보살 첫 친견은 신지
다시 만남은 증지이지만
지혜의 체 구별되지 않아

화엄연기는 인과가 동시
자력과 타력이 둘 아니다

차별경계는 환일 뿐이니
실로 평등한 법성일 뿐

모든 법 일체무분별이니
연기관문, 법성증득 인도

‘법성게’의 제6구는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다.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룬다”라는 진성수연(眞性隨緣)을 말한다. 진성이 매우 깊고 극히 미묘해서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룬다.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루므로 진성이 매우 깊고 극히 미묘한 것이다. 이 두 구절로 나타낸 연기의 체를 의상 스님은 곧 일승다라니법의 무장애법 법계(無障礙法法界)라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진성수연은 먼저 진성이 있어서 연(緣)을 따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일승 화엄의 연기는 연(緣) 이전에는 법이 없다. 만약 성(性)에 나아가 논하면 성기(性起)의 법체가 본래 있으나, 연에 나아가 논하면 연 이전에는 법이 없다. 금일의 연 가운데 나타나는 오척이 연기의 본법이니, 곁이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法融記’)

‘진수기’에서는 이것을 물과 돌 등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즉 내가 오늘 혹은 물의 작용[水用]이 되기도 하고, 혹은 돌의 작용[石用]이 되기도 한다. 연 가운데 법계의 모든 법이 남김없이 단박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성 경계의 예로 법융 스님은 ‘화장세계의 매우 깊음’과 ‘미륵누각(彌勒樓閣)의 매우 깊음’을 들고 있다. 화장세계가 매우 깊다는 것은 하나하나의 티끌 속에서 법계를 보기 때문이고, 미륵누각이 매우 깊다는 것은 미륵보살 선지식이 손가락을 튕겨 누각의 문을 여니, 선재동자가 들어가자마자 단박에 삼세의 자기 몸과 법과 선우들을 다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화장세계는 보장엄(普莊嚴) 동자[大威德 太子]의 수행에 의해 건립된 연화장세계 즉 화엄정토이다. 이 세계는 낱낱 티끌 속에 법계가 있고, 무진 법계의 낱낱티끌마다 다시 무진 법계가 있다. 미진과 세계가 원융무애하고 중중무진이다.

미륵누각은 미륵보살의 공덕행으로 건립된 (비로자나)대장엄장 누각이다. 이 누각은 선재동자가 미륵보살 선지식의 인도로 부처님의 깨달음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을 상징한다. 선재동자는 누각 안에서 갖가지 무진 공덕장엄을 보고 단박에 미륵보살의 해탈문인 불망념지(不忘念智)를 증득하는 것이다.

보장엄동자와 선재동자는 ‘화엄경’의 대표적인 두 구법자로서, 보장엄동자는 노사나불의 본생(本生) 보살이고 선재동자는 일승의 원생(願生) 보살이다. 두 보살의 수행과 성불을 통해 연기 도리의 깊고 미묘함을 접할 수 있다.

이러한 깊은 도리는 깊고 얕음을 여읜, 지극히 미묘한 깊음으로서 다음과 같은 경계로 이해되어 오기도 했다.

“문수의 오묘한 지혜에 계합하지만 완연히 초심이니 곧 깊음을 얻을 수 없으며, 보현의 현묘한 문에 들어가지만 일찍이 별체인 적이 없으니 얕음도 얻을 수 없다.”(‘법융기’; 설잠, ‘법계도주’)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복성의 동쪽 대탑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신심을 일으켜 발심하고 53선지식을 역참하여 보살도를 배우고 해탈하게 된다. 선재동자는 마지막 제53선지식인 보현보살을 만나기 직전 문수보살을 다시 만난다.
 

설잠 김시습 진영. 무량사 소장(사진 왼쪽). 설잠 김시습 부도. 무량사 소장(사진 오른쪽).
설잠 김시습 진영. 무량사 소장(사진 왼쪽). 설잠 김시습 부도. 무량사 소장(사진 오른쪽).

‘화엄경약찬게’에서도 “선재동자선지식 문수사리최제일(善財童子善知識 文殊師利最第一)” 내지 “미륵보살문수등 보현보살미진중(彌勒菩薩文殊等 普賢菩薩微塵衆)”이라고 한다. 선재동자가 문수사리 보살로부터 시작해서 내지 미륵보살에 이르고 다시 문수보살을 만난 뒤 마지막으로 보현보살을 만나서 구법순례의 여정이 일단 끝나게 된다. 그런데 선재동자가 단지 53선지식만 만난 것이 아니라 실은 이름이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그 사이 한량없는 선지식을 만난 것이다.

아무튼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을 다시 찾아 만났을 때 문수보살이 선재동자에게 만약 신근(信根)을 여의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 변함없는 돈독한 신심(信心)을 칭찬하였다. 선재보살을 동자라고 부르는 것도 구법의 열정이 끝까지 식지 않은 때문인 것과도 통한다.

‘화엄경행원품소초’에서는 선재동자가 처음 문수보살을 친견함은 신심이 바로 지혜인 신지(信智)를 뜻하고, 문수보살을 다시 만남은 증득한 지혜인 증지(證智)를 나타내는데, 비록 신지와 증지가 시작과 끝이 달라도 지혜의 체는 원래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모두 문수보살임을 밝힌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선재동자가 여러 선지식을 역참하고 다시 문수보살을 만나서 문수보살의 오묘한 지혜에 계합하지만 그 증지가 처음 문수보살을 만났을 때의 신지와 다름이 없기 때문에, “문수의 오묘한 지혜에 계합하지만 완연히 초심이니 곧 깊음을 얻을 수 없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화엄 연기는 인(因)과 과(果)가 동시이고 자력과 타력이 둘이 아니다.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만나는 순례에서도 이 도리를 보여주고 있다. 선재동자가 처음 문수보살을 만날 때는 문수보살이 선재가 살고 있었던 복성으로 다가와 준다. 선재동자가 비록 선근은 깊었으나 그 때까지는 문수보살을 몰랐기 때문이다. 복성동쪽 사라숲 고탑아래에서 문수보살이 법계수다라를 설한다는 소문을 듣고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을 찾아가 만났다.

후에는 미륵보살의 가르침에 의하여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을 찾으러 다녔다. 그러자 문수보살이 선재가 떠나온 자리에서 팔을 뻗어 선재를 칭찬한 것이다. 그리고는 선재동자를 보현보살 처소에 잠깐 인도했다가 다시 제자리에 도로 데려다 놓고 사라진다. 선재동자는 다시 보현보살을 찾아다니며 끝없는 바라밀행을 닦고 중중무진 공덕을 지어서 드디어 보현보살 선지식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선재의 선지식 역참에서도 처음과 끝, 시작과 마지막, 인(因)과 과(果), 자력(自力)과 타력 등이 둘이 아니고 동시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미륵보살과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경계가 다른 것이 아니다. 그 자리가 바로 부처님 자리이고 선재동자도 그 자리에 함께 한 것이다.

선재동자는 보현보살 선지식에게서 무진 삼매문을 얻고, 낱낱 삼매에서 부처님을 뵙고 온갖 지혜 광명을 얻었다. 선재동자는 보현보살 몸의 낱낱 털구멍 속에서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부처님 세계를 본다. 또 자기 몸이 보현보살의 몸속에 있는 시방 모든 세계에 있어서 중생을 교화함을 보았다. 그리하여 보현보살과 동등하고 부처님과 동등하고 일체 모든 존재와 동등하게 된다.

그래서 보현보살의 현묘한 문에 들어가지만 원래로 한 마음 한 성품, 터럭하나 티끌하나도 여의지 않았기 때문에 일찍이 별체인 적이 없으니 얕음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선재동자의 구법여정은 지극히 깊어서 깊고 얕음을 여읜 진성수연의 일승보살도이다. 보살행으로 부처님 세계를 장엄하는 화엄이다. 이러한 보살행은 발보리심에 의해 성취되고 발보리심은 깊은 신심이 있어야 가능하다. 신심으로 발심해서 내지 성불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살명란품’에서는 이 신심을 방해하는 의심을 풀어주는 열가지 문답이 펼쳐지고 있다. 그 첫째가 연기가 매우 깊다는 연기심심(緣起甚深)이다. 마음성품은 부처님 지혜로서 하나뿐인데 어떻게 갖가지 차별적 과보를 내며, 지혜와 경계는 어찌 서로 알지 못하는지를 연기의 도리로 풀어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차별적인 것은 임시로 연따라 생겨난 것이고, 연기된 모든 것은 공(空)해서 자성이 없다. 그러므로 차별경계는 환(幻)일 뿐이니, 실제를 구해도 얻을 수 없어서 일체 법은 서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연따라 갖가지 차별이 일어나나 실은 평등한 법성뿐인 것이다.

따라서 의상 스님은 임시 진성이라는 이름을 붙여 진성수연의 깊은 연기 도리를 보이고 있다. 연기관문으로 모든 법이 일체가 무분별이며 곧 참된 성품 이룸을 알게 하니, 진성에 의해 법성을 증득하도록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나쁜 사람은 없다. 나쁜 상황이 있을 뿐이다.”

최근의 영화 ‘신과 함께 2’에서, 한 성주신이 천년동안 이집 저집을 수호하면서 보고 느꼈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쁜 상황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다. 인연법을 잘 알아서 나쁜 과보를 받을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 하겠다. 진성수연의 연기도리를 깨달아 본래의 자기 모습을 잃지 않는 연기적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456호 / 2018년 9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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