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미켈란젤로의 ‘도니 톤도’
18. 미켈란젤로의 ‘도니 톤도’
  • 주수완
  • 승인 2018.09.27 11:41
  • 호수 14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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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의 근육 통해 중력 거스르는 신앙의 원천 드러낸 걸작

시스틴 성당 벽화 제외하고
미켈란젤로의 유일한 완성작

‘성모와 아기예수’의 그림은
수월관음도만큼 흔한 도상

레오나르도·라파엘로 작품
신성 강조한 초월적 표현

미켈란젤로 ‘도니 톤도’는
원색적이며 근육질적 표현

중력 속에 존재하는 몸 통해
격리되지 않은 신성을 표현

이상향을 그린 고려불화와
인간미 담긴 조선불화 차이
레오나르도의 ‘성모자’(파리 루브르 미술관)와 라파엘로의 ‘성모자’(우피치 미술관). 이 작품들처럼 양감은 풍부하나 어둑한 공간에 부유하는 빛처럼 인체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고려 ‘아미타삼존도’(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우피치 미술관은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의 회화 작품이 오롯이 모여 있는 세계 최고의 미술관 중 하나이다. 앞서 소개한 지오토, 마사치오 외에 치마부에, 보티첼리 같은 화가들의 그림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더할 수 없는 매력이다. 그 중에서도 우피치 미술관이 소장한 미켈란젤로의 ‘도니 톤도(Doni Tondo)’는 시스틴 성당의 벽화를 제외하고는 미켈란젤로가 유일하게 완성된 회화작품이다. 비록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도 ‘예수의 매장(Entombment)’과 ‘맨체스터의 성모(Machester Madonna)’로 전하는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지만, 모두 미완성이다.

‘톤도’란 이 작품처럼 둥그런 패널 안에 그려진 형태를 말하는데 미켈란젤로 당시 유행한 형식이었다고 한다. 또한 ‘도니’는 이 그림이 아뇰로 도니(Agnolo Doni)의 의뢰로 그려졌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니 결국 ‘도니를 위한 둥근 그림’ 정도의 의미라 하겠다. 그림의 주제는 ‘성모자’ 즉 ‘성모와 아기예수’다. 흔히 이런 주제의 그림을 ‘마돈나와 밤비노(Madonna col Bambino)’라고 하는데, 밤비노는 이탈리아어로 ‘아기’이지만, 작품 속에서는 ‘아기예수’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서양미술에서는 불교의 ‘수월관음도’에 해당할 만큼 유명한 도상이고, 거장들마다 이 주제의 걸작을 남겼다. 같은 주제를 다룬 레오나르도와 라파엘로의 작품을 통해 각 거장들의 특징을 비교해볼 수 있어 흥미롭다. 라파엘로의 성모자상도 우피치에 소장되어 있으며, 레오나르도의 원작은 루브르에 있지만, 그 모작 하나가 우피치에 있어 비교하기 좋은 조건이다.

우선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보면 아기예수는 마치 실제의 귀여운 아기를 모델로 한 듯 어린아이다운 천진함이 엿보인다. 양을 끌어안고 있는 아기예수는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애완견을 데리고 노는 아기와 별반 다름없어 보인다. 언뜻 이 아이는 양의 귀를 잡아당기는 것처럼도 보이는데, 그래서인지 성모께서 아이를 향해 팔을 뻗어 이러한 행위를 저지하려는 것 같다. 이 작품은 과거의 성모자상에 등장하는 너무 근엄하여 아기 같지 않았던 아기예수에 비해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인간적인 아기예수를 부각시켰다. 희생을 상징하는 양이 귀찮아하고 있음에도 아기예수가 천진난만하게 끌어안고 있는 모습은 왠지 미래에 예수께서 치뤄야할 고통에 운명적으로 다가가고 있음을 암시한 듯하며, 이를 저지하듯 붙잡아 끌어안으려는 성모는 성모가 아닌 평범한 한 아들의 엄마로서 그 험한 길을 가지 못하게 막아서고 싶은 공허한 손짓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들 뒤로는 성모의 어머니 성 안나가 이 모든 장면을 관할하는 사람처럼 미소 지으며 바라보고 있으며, 멀리 보이는 배경에는 저 유명한 ‘모나리자’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스라이 보이는 산이 풍경으로 펼쳐지고 있다.

한편 라파엘로의 ‘성모자’는 매우 정적이고 우아하다. 어린 예수와 함께 어린 시절의 세례 요한을 성모와 함께 삼각형 구도로 배치했는데, 이는 마치 고려불화에서 본존과 협시보살이 위·아래로 배치되며 형성하는 삼각형 구도를 연상케 한다. 마치 두 아이가 서로 놀도록 놔두고 책을 읽다 종종 눈길을 보내는 어머니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도, 어머니도 매우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인물로 승화되어 있다. 어쩌면 누구나 꿈꾸는 어머니의 모습이지만 실제로는 저렇게 아이들을 놀도록 놔두고 여유롭게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이를 키워본 사람은 알 것이다. 즉, 매우 사실적인 어떤 장면을 묘사한 것 같지만, 소위 ‘연출된’ 장면, 사진관에 가야 나올 수 있는 구도 같다. 그리고 비록 그런 연출적 느낌이 들더라도 누구나 꿈꾸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그것이야말로 라파엘로의 장점이라고도 할만하다. 또한 아기 예수는 분명 아기의 모습인 것 같으면서도 얼굴은 이미 아기 요한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듯 상당히 성숙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 모습에 성모께서는 내심 자랑스러워하고 계신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는 어떨까? 우선 레오나르도와 라파엘로의 작품과 비교해 매우 튀는 색감을 사용했다. 앞서의 두 작품이 다소 은은한 듯 빛나는 색이라면, 미켈란젤로의 색은 훨씬 원색적이고 밝으며, 각각이 자신의 색을 뿜어내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묘사하고자하는 바를 보다 직접적으로 묘사했다고나 할까.

이어 눈에 띄는 것은 독특한 원근감이다. 지면상으로 보기에 사진을 약간 아래서 위로 찍은 것이 아닌가 생각할수도 있지만, 그것은 사진을 찍은 각도 때문이 아니라 원래부터 의도된 원근법, 즉 전체 장면을 약간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는 로우 앵글로 그렸기 때문이다. 때문에 화면 가장 상단에 위치한 아기예수는 화면 더 높은 곳에, 그리고 더 깊숙한 곳에 위치한 것처럼 보인다. 현실적으로는 뒤에 서계신 성 요셉이 앞에 계신 성모께 아기를 건네주는 장면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이 위로 올려다보는 독특한 각도를 통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아기예수를 성 요셉과 성모가 받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마치 일상적인 장면인 것 같지만, 사실은 하늘에서 내린 아기임을 암시하는 이중적 구도라 하겠다.
 

미켈란젤로의 ‘도니 톤도’(1507년경)와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화려한 색채의 ‘장곡사 괘불탱’(1673년).

거기다 앞서 두 거장이 묘사한 성모보다 ‘도니 톤도’의 성모는 훨씬 근육질이다. 우아하고 연약한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 로마 군인으로부터라도 보호해줄 것 같은 강한 힘을 지닌 억척스런 여인으로 묘사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여성일지라도 이렇게 강인한 모습으로 표현하고는 했는데, 자칫 그의 해부학적인 지식을 뽐내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나, 이 작품 속 성모는 예수를 키워낸 어머니 성모가 결코 연약한 인간이 아니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나아가 아기예수를 요셉과 성모가 함께 손을 들어 받치고 있으면서도 이 근육질의 팔뚝을 통해 아기예수의 무게는 보통의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였음을 은연중에 보여주는 것 같다.

그렇다. 레오나르도와 라파엘로의 그림 속 인물들은 어두운 가운데에도 마치 공중을 떠다니는 빛처럼 부유하고 있다. 이처럼 중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부유하는 인간을 통해 성서 속 인물들의 신성성을 강조하고 있다면, 미켈란젤로는 색(色)이라는 물질성에 갇혀 중력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몸을 통해 종교가 결코 인간의 삶과 격리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도니 톤도’는 다른 두 성모자상과 달리 배경을 풍경으로 처리하지 않고 마치 그리스 신화 속 아르카디아(목가적 낙원)에 사는 목동들처럼 보이는 누드 인물상으로 채웠다. 바자리는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화려한 솜씨를 보여주려고 이들을 그려 넣었다고 했지만, 아기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 중대한 순간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그저 이 세상이 낙원인 줄 아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오히려 예수께서 앞으로 가져올 파란이 얼마나 큰 것일지 그야말로 폭풍전야를 묘사한 것이 아니었을까 느껴진다. 나아가 ‘도니 톤도’의 예수는 한편으로는 귀여운 아기이지만, 동시에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표정이 없다. 그 분은 그렇게 조용히 세상에 오셨다.

이처럼 어두운 듯 하면서도 부유하는 인물을 통해 초월적 인물들을 표현하는 방식과 무거운 몸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밝은 색채로 현실을 드러내는 방식은 서로 상반된 것이다. 이는 마치 고려불화와 조선불화를 바라보는 느낌만큼이나 다르다. 레오나르도와 라파엘로의 그림이 고려불화 같다면 미켈란젤로의 그림은 조선불화 같다. 고려불화 속 불보살은 매우 이상적인 인체와 구도를 지닌 반면, 조선불화 속 불보살은 선명한 색상으로 지구의 중력을 온몸으로 받고 있다. 우리가 조선불화에서 친근함을 느끼는 것은 마치 조선불화 속 불보살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연장선 속에 서계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리라. 이에 반해 고려불화 속 공간은 마치 저 머나먼 극락을 잠시 엿보는 듯이 초월적으로 다가온다.

그림이나 조각은 시간과 공간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고유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무게를 통해 작가가 생각하는 인간, 신, 자연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 속 인물들의 근육은 이 보이지 않는 중력의 무게를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나아가 그 중력을 거스르는 힘이 곧 신앙의 원천임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조선불화의 그 묵중한 인체의 왜곡과 직설적인 색채 역시 조선의 불교가 억불이라는 중력을 어떻게 버텨냄으로써 지금의 불교로 성장했는지 보여주고 있다. ‘도니 톤도’의 고요한 아기예수처럼, 부처님의 보드가야에서의 깨달음도 어쩌면 무서우리만치 조용했으리라. 그러나 이 ‘도니 톤도’ 스타일로 1년 후에 그려진 시스틴 체플의 천정화는 그야말로 미술계의 천지개벽이었으며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주수완 문화재전문위원 indijoo@hanmail.net

 

[1457호 / 2018년 9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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