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⑩
40.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⑩
  • 최병헌 교수
  • 승인 2018.11.06 13:36
  • 호수 146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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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부족해체·신흥부호 등장 등 격변기에 불교로 사상 기틀 마련

4∼6세기 농업발달과 교역증가
토지와 기술 소유 부유층 등장

확장된 경제활동 적합 종교로
불교가 새롭게 주역으로 부상

종족 중심에서 국가로 발전한
BC 5세기 인도의 상황과 비슷

브라만 권위 눌려있던 시대에
불교는 왕 세속적 권위 인정

불교의 정치적 입장과 특징은
신라 고대국가 발전에 큰 기여

지방의 부유한 가부장가족장
불교수용 주체일 가능성 높아
신라 최초의 사찰로 알려진 구미 선산의 도리사. 신라에 불교를 전한 고구려 아도 화상이 창건한 절로 아도 화상 사적비 등이 남아있다.
신라 최초의 사찰로 알려진 구미 선산의 도리사. 신라에 불교를 전한 고구려 아도 화상이 창건한 절로 아도 화상 사적비 등이 남아있다.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반 즈음 신라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전반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었다. 17대 나물마립간(365〜402)부터 22대 지증마립간(500〜514)의 시기로서, 부족국가의 전통을 계승한 ‘사로국’으로부터 중앙집권적 영역국가인 ‘신라’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그 중간의 과도기에 해당된다. 나물마립간 때부터 김 씨가 왕위세습권을 독점하게 되고, 19대 눌지마립간 때에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지증마립간 4년(503) 마침내 신라라는 국명과 중국식의 왕호를 독점적으로 사용하기에 이르러 왕권은 크게 강화되었다. 또한 4〜6세기 철기문화의 보급으로 인한 농업기술의 발달과 농업생산성의 향상, 교역의 증대와 도시의 발달은 토지와 생산기술을 소유한 부유층을 등장케 하였다. 그 결과 부족사회의 전통을 계승한 읍락공동체를 해체시켜 가부장가족이 새로운 사회집단의 기본단위가 되었다. 이들 가부장가족장으로서 지방의 유력한 재지세력, 그리고 도시의 부유한 장인과 상인세력은 변화된 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종교와 사상을 요구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변화된 현실사회에서 강력한 왕권을 뒷받침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와 사상의 수용, 그리고 확대된 경제활동에 적합한 새로운 종교와 사상의 수용은 시대적 과제가 되었으며, 그에 부응한 것이 바로 불교와 유교, 특히 불교가 주역이었던 것이다.

기원전 6〜5세기 즈음은 동서양을 포함하여 인류역사에서 독보적인 사상적인 황금기를 열어 놓았다. 인도에서는 장차 세계적인 종교로 발돋음할 석존의 불교를 비롯하여 62개, 또는 363개의 학파가 출현하였으며, 같은 시기 중국에서는 공자의 유교를 비롯한 제자백가의 사상이 꽃을 피웠다. 중국의 유교는 정치와 도덕에 관련된 현실적이라는 점에서 인도의 출세간적이고 내세적인 불교와는 대조적인 면을 보이며, 동양 사상의 두 원류를 이뤘다.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들에 의해 윤리적인 인간행위를 문제 삼는 철학사상을 발달시켜 서양 철학의 전형을 이루었다.) 한국의 역사에서는 불교와 유교가 고대국가 발전 단계부터 전래되어 사상의 두 주류를 이루면서 역사적 과제에 부응하였다. 인도와 중국에서 이루어진 종교와 사상적 성과를, 특히 신라에서는 900〜1000년의 시차를 두고 비로소 받아들여 4〜6세기의 사회적 변화에 부응하는 역사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기원전 6〜5세기 즈음 인도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큰 전환점을 이룬 시기였다. 이전에 인도 북서부와 펀잡 지역에서 형성된 정치와 문화적 활동이 이 시기에는 인도 중부의 갠지스 평원으로 옮겨와 있었다. 철기의 보급으로 인한 농업 생산성의 향상과 교역의 성장은 갠지스강 중하류 지역에서 도시화의 진행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6세기 즈음부터 종족 중심의 정치적 조직체가 점차 영역국가로서의 왕국의 틀을 잡아가고 있었으며, 각 종족을 대표하는 회의체를 통한 통치형태는 점차 약화되어 가는 추세였다. 반면 종족 중심의 대의 정치제도를 더욱 철저하게 유지하던 공화국들도 상당수 존재하였다. 석존의 조국인 카필라국, 석존이 열반에 들었던 말라국, 석존이 가장 훌륭한 국가형태로 찬양하였던 밧지국 등은 공화국들이었다. 그러나 석존 당시의 정세는 이미 마가다국과 코살라국 등 신흥 왕국 중심으로 통합되어 가는 추세였으며, 석존 자신도 그러한 통합 추세를 인정하고 왕국의 왕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원래 왕을 의미하는 라자(rājā), 또는 라잔(rājan)이란 용어는 부족의 군대 지휘관인 부족장, 또는 유목민 집단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뒤에는 영역국가로 발전한 왕국과 공화국들의 통치자가 되었으며, 크샤트리아 계급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왕국의 라자는 왕위 세습권을 확보한 1인체제의 통치권자였던 반면에 공화국의 라자는 왕을 선출하거나 중대사를 결정하는 회의체의 구성원들이었다. 대표적인 공화국인 밧지국의 집회에는 7707인의 라자들이 참가하였다고 하며, 석존의 조국인 카빌라국에서도 숫도다나(Suddhodana)왕을 비롯한 다수의 라자들이 있었다. 특히 석존 자신이 당시 갠지스강 중하류 지역에서 라자로 칭해지던 크샤트리아 출신이었고, 그의 불교교단이 라자들에 의해 지원과 보호를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브라만의 지상주의적인 권위를 비판한 반면에 라자들의 세속적 권위를 긍정하는 입장을 취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부족적 전통을 계승한 공화국을 더 높이 평가하는 복고적인 역사의식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또한 새로운 왕국을 인정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은 당시의 정치적 변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정치권력의 집중화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리고 석존이 자신의 교단 명칭을 공화국의 명칭인 상가(saṃgha)를 취하면서 그의 교설에서 특히 평등과 화합을 강조한 것도 그러한 취지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석존의 정치적 입장과 불교사상의 특징을 고려할 때, 1000년 가까운 시차를 뛰어넘어 4〜6세기 즈음 부족연합 형태의 연맹왕국에서 중앙집권적인 왕국으로 전환을 모색하던 신라의 고대국가 발전과정에서 사상적인 주역을 불교가 담당하게 되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고 보며, 부족통합과 왕권강화라는 사회변화에 부응하는 새로운 종교와 사상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던 것이다.

한편 철기문화의 보급과 농업생산력의 발달, 그리고 교역의 증가와 도시의 발달은 농촌과 도시에서 부유한 계층을 새로이 성장케 하였다. 우선 농촌 사회의 신흥세력으로 주목되는 존재는 가하빠띠(gahapati)였다. 가하빠띠, 또는 그리하빠띠(grihapati, skt.)라는 용어는 리그베다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한 집안의 가장에 대해 사용되었으며, 여성 가장은 그리하빠뜨니(grihapatnī)로 불렸다. 이 단어는 원래는 어떤 중요한 제식에 있어서 주인과 중심적인 제물을 의미했다. 뒤에 이 단어는 가장이나 집에서 생활하는 사람, 또는 집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농업 경제가 발전하면서 베다 시대와 달리 토지 소유에 따른 부의 관념이 형성됨에 따라 그들은 사회의 새로운 세력으로 중요한 지위를 점유하게 되었다. 베다에서 가장을 의미했던 가하빠띠가 기원전 6세기 이후에 부유한 집안의 가장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당시 농촌사회 내부에서 경제적 격차가 커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새로 등장한 부유한 계층의 존재는 부족사회에서 공동의 재산이 소수 지배층에게 집중됨으로써 혈연집단과 평등성으로 상징되는 부족사회를 해체시켜 가부장가족이 기본적인 사회단위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초기불교 문헌에는 부유한 가하빠띠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타난다. 특히 석존과 불교 상가를 지원한 인물로는 멘다까(Mendaka)와 아나타삔디까(Anāthapiṇḍika, 급고독) 등이 유명하다. 또한 철제농기구의 보급과 농경기술의 발달과 함께 가축인 소의 중요성도 더욱 커져서 성우(聖牛)사상을 발달시켰는데, 석존의 성씨인 고따마(Gautma)는 바로 성우를 의미하는 용어이다. 그리고 석존의 아버지 이름인 숫도다나(Suddhodana)는 깨끗한, 또는 하얀 쌀밥을 의미하는 용어로 보아 농경에서의 소의 중요성과 벼농사의 발달 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

한편 북인도 갠지스강 중하류 지역에는 많은 도시(nagara)들이 성립되고 있었는데, 기원전 600〜300년 즈음에 60여개의 도시가 존재했던 것으로 전한다. 당시 도시는 정치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수공업자들과 대구모의 교역활동에 종사하는 상인들의 경제활동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초기 불교 문헌에 따르면 전문화된 다양한 직종의 이름이 전하고 있으며, 교역상인들은 대상을 조직하여 육로와 해로를 왕래하였다. 이들 수공업자와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거의 대부분 길드적인 조직을 만들었는데, 후대 불교문헌은 라자가하(왕사성)에 18개의 장인과 상인의 길드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한다. 길드적인 조직을 가나(gana), 또는 상가(saṃgha)라고 하였으며, 그 우두머리를 장자(śresthi), 또는 셋티(seṭṭhi)라고 하였다. 수공업자나 상인들이 불교나 자이나교를 지지한 것은 이들 신흥종교가 브라만적인 계급차별을 부정하고 이들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긍정하고,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이었다. 석존이 성장하고 활동한 무대가 주로 도시였는데, 특히 코살라국의 사바티(Savati), 또는 쉬라바스티(Ṥrāvastī, skt. 사위성)는 ‘무엇이든지 다 있다’는 의미를 가진 상업의 중심도시로서 석존이 대부분의 우안거를 지낸 도시였다. 그리고 석존이 자신의 교단 이름을 공화국의 명칭이자 상인조합의 이름이기도 한 상가에서 취한 것은 평등한 관계 속에서 민주적 운영을 추구함으로써 구성원 사이의 화합을 이루는 이상적인 집단으로 인식한 때문이었다. 그 결과 석존의 교설로 하여금 브라만교의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크샤트리아 출신의 왕들의 정치적 권위와 함께 수공업자나 상인들의 경제적 이익을 인정하게 하였다.

결론적으로 기원전 6〜5세기 석존 당시의 철기문화의 보급과 농업생산력의 발달, 교역의 증가와 도시의 발달, 농촌과 도시에서의 부유한 계층의 대두, 부족사회의 해체와 가부장가족의 등장 등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부응하는 새로운 종교와 사상으로 성립된 불교는 1000년 가까운 시차를 뛰어넘어 4〜6세기의 신라의 정치와 사회경제적 발전에 적합한 새로운 사상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게 하였다. 특히 북방으로부터 소백산맥의 조령을 넘어 선진문화 전래의 교통로상의 요지인 선산 지역의 모례(毛禮), 그리고 죽령을 넘어오는 또 다른 교통로상의 요지인 순흥 지역의 연꽃 벽화고분의 주인공 같은 지방의 유력한 세력, 곧 지방의 부유한 가부장가족장들이 불교전래의 주역으로 등장하였던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국도인 경주의 시장 개설과 도로의 정비, 운송수단과 우역(郵驛)의 정비 등의 변화는 새로운 상인 세력의 성장을 유추케 하는 바, 비록 근거자료의 부족으로 구체적인 사실은 알 수 없지만, 이들도 또한 불교 전래와 수용의 또 다른 주체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주목해도 좋을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63호 / 2018년 11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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