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특집 인터뷰] 팔공산 대륜사 덕신 스님
[새해 특집 인터뷰] 팔공산 대륜사 덕신 스님
  •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19.01.02 18:25
  • 호수 147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바윗돌 신심으로 기도하라!” 묘심 스님 가르침 귓전에 생생

“절에 가서 살아야 한다”
계룡산 신원사로 동진출가

역대 5대 총무원장 모시며
포교·사회·문화·총무국장

“부처 안 되고 뭐 하느냐”
한 마디에 3년 만행 길

“여행 다녔느냐!” 호통에도
바랑 내려놓고 8년 시봉

인욕·하심의 끝자락서
건진 일심으로 ‘기도’

불자·일반인 함께하는
찬불가 더 꽃 피웠으면

대구 어린이 불교학교
개설하는 날 ‘꼭, 올것’
“여태 부처 안 되고 뭐하고 있느냐!”는 묘심 스님의 호통은 “출가 본분사(本分事)도 해결 않고 국장 소임이 다 뭐냐”는 일침이었다고 덕신 스님은 술회했다.
“여태 부처 안 되고 뭐하고 있느냐!”는 묘심 스님의 호통은 “출가 본분사(本分事)도 해결 않고 국장 소임이 다 뭐냐”는 일침이었다고 덕신 스님은 술회했다.

“너 출가한지 얼마나 되었느냐?”

순식간에 인 적막의 중심부로 서릿발 호통이 떨어졌다.

“여태 부처가 되지 않고 무엇을 한 게야!”

덕신 스님은 불교계 최초의 장애인 포교단체 ‘원심회’를 창립(1988)한 주인공이다. ‘좋은 벗 풍경소리’ 창립(1985) 초기 2대 회장을 맡아 찬불가 보급에 앞장서 온 장본인도 덕신 스님이다. 역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한 의현, 탄성, 월주, 고산, 정대 스님은 덕신 스님의 포교 원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는 주요 소임을 맡겼다. 2002년까지 12년 동안 포교국장(3년), 사회국장(3년), 문화국장(4년), 총무국장(2년) 직을 연이어 맡았다. ‘초대 문화국장’이라는 기록도 덕신 스님이 보유하고 있다.

총무원 행정업무와 함께 장애인, 어린이·청소년, 교도소 포교에도 심혈을 기울인 덕신 스님은 시간을 쪼개 자정부터 새벽 2시까지 진행하는 불교방송 프로그램 ‘살며 생각하며’를 맡았다. 청소년들의 아픔을 다소나마 치유해 보려는 마음이 지쳐있을 두 다리를 마포로 향하게 했을 터다. 당시 ‘살며 생각하며’는 24회 한국방송대상 청소년부문 우수작품상을 받았다. 덕신 스님의 포교 원력과 행정 능력은 서울 견지동에서 정평이 나 있었는데 대구 대륜사 주지 묘심 혜안(妙心 慧眼) 스님만은 마뜩치 않게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출가 전의 덕신 스님은 서울에서 출생(1956)한 인연으로 서울 돈암동 정각사 어린이 법회에 다니며 유년의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절에 가서 살아야 한다!”

누구의 전언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가족들은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 한 10대 소년을 계룡산 신원사로 보냈다. 동진출가(1969) 한 덕신 스님을 애지중지 물심양면으로 보살핀 스님은 다름 아닌 묘심 스님이었다. 조계종 전 종정(8대) 서암 스님을 30년 시봉한 그 비구니 스님이다. 대장부 기질과 당찬 선기를 품고 있었기에 서암 스님은 묘심(妙心)이라는 법호를 내렸다고 한다. 초등학교만을 마친 덕신 스님이 검정고시를 통해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법주사 승가대학과 동국대학교 선학과에서 수학할 수 있었던 건 묘심 스님의 배려와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신적 은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다.

“여태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묘심 스님의 일갈이 덕신 스님을 움직였다. 두 어깨에 짊어 진 소임들을 내리고 바랑 하나 얹었다. 사막의 신기루 사라지듯 덕신 스님은 교계 언론의 지면·전파에서 완벽하게 사라졌다.

세간· 출세간의 간극이 딱 ‘요만큼’이라는 듯 돌담이 낮다.

승복 입었다고 절에서 쉬이 묵을 수 없다는 걸 만행 길에서 알았더랬다. 주지 스님 만나기도 전에 공양주 보살로부터 “방 없다”는 소리 듣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으니 말이다. 한 끼의 공양은 무거운 것이었다. 잠을 청할 곳이 마땅치 않으면 허름한 창고에 몸을 뉘였다. 하여, 여름과 겨울 두 철을 나게 해 준 백담사는 지금도 ‘고마움의 절’로 남아 있다. 그렇게 2년 넘게 길을 걷다가 묘심 스님의 안부 확인 차 대륜사에 들렀다. 남루한 행색의 덕신을 자비롭게 맞이해 줄만도 한데 아니었다.

“네 승복 멀쩡한 걸 보니 만행을 떠난 게 아니라 여행을 다녔구나!”

그 때 묘심 스님은 병환 중이었다. 심장수술도 받았던 터라 누군가 시봉해 주지 않으면 일주문조차 나설 수 없었다. 덕신 스님 스스로 그 자리에 바랑을 내려놓았다. 3년 남짓한 만행은 그렇게 갈무리 됐다.

덕신 스님이 언론에 다시 노출된 건 거의 8년만인 2010년 11월이었다. 천수경과 예불문을 담은 CD를 출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 묘심 스님의 봉양비를 마련하기 위한 음반이었다. 2012년 6월, 묘심 혜안 스님은 세납 82, 법랍 75세로 원적에 들었다. 다비는 동화사에서 봉행됐다.

노장 스님 곁을 8년 동안 떠나지 않았던 연유가 궁금했다. 말이 시봉이지 사실상 병수발 아니던가. 보은(報恩) 너머의 그 무엇이 있을 듯싶었다. 절은 담인 듯 담 아닌 듯한 돌담 안에 살포시 들어 앉아 있다. 담길 따라 폭 1m 남짓한 꽃밭이 길게 놓여 있다. 봄에 피울 생명들을 잠시 뉘여 놓았7을 터다.

대웅전에서 다상을 편 채 차 한 잔 우려낸 덕신 스님은 “법회 할 때는 법당이고, 차를 마실 때는 차실”이라며 미소 짓는다. 총무원 국장 소임을 두루 본 자신을 대견해주실 줄 알았던 묘심 스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은 순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머리를 한 대 ‘쾅!’ 맞은 듯했습니다. ‘출가 본분사(本分事)도 해결 않고 국장 소임이 다 뭐냐’는 일침이었던 겁니다.”

올 봄에도 야외 법당 주변의 꽃밭에서는 꽃망울이 터질 것이다.

묘심 스님의 일갈을 그대로 가슴에 안은 채 만행 길에 오른 연유를 알 법하다. 어려서 출가 한 후 어느 때인가부터 ‘철이 들’면서 자연스럽게 구도열정을 불태웠다. 그런데 ‘거창한 깨달음’을 꿈꾸었다. 경전·선어록 속의 난해한 문구에 매달렸다. 세간으로 치면 10대의 청소년이었지만 이것만 풀면 세상을 호령할 듯싶었다. 사중의 운력 하나하나가 다 달갑지 않았다. 시간을 허투루 쓰는 것 같아서였으니 말이다. 그러던 중 노장 스님 따라 찾은 한 암자에서 조고각하(脚下照顧)를 만났다. ‘고개를 숙여 발 아래를 살펴라!’ 어쭙잖은 깨달음을 핑계로 대중 운력에 불만을 피워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깨달음 또한 깊고 신묘한 문장 속이 아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덕신 스님은 자신의 발아래를 좀 더 세심히 살피려 그리 먼 길을 떠났을 터다. 그 길에서 무엇을 얻었을까?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진짜 만행은 대륜사에서 시작됐습니다!”

묘심 스님 시야에서 벗어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무슨 일이든 시키면 무조건 해야 했다. 도량에는 크고 작은 돌들이 유독 많았는데 “저 돌 치우라”하면 그 즉시 치워야 했다. 바위 덩어리처럼 큰 돌을 옮기다 허리를 다쳤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돌을 옮기라고 성화시다. 돌이 너무 작아 굳이 치울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토’라도 달라치면 불호령이 내려졌다. 심지어 신도들 보는 앞에서 따귀도 맞았다.

“싫으면 가라!”

두 무릎을 꿇고, 두 팔꿈치를 땅에 대고, 머리 조아린 사람을 한 번 더 짓누른 묘심 스님이다. 인욕과 하심의 끝자락에 설 때면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결코 떠나지 않았다.

“대웅전 부처님, 돌 뒤에 핀 꽃 감상하시라고 돌을 치우라 하셨던 겁니다.”

묘심 스님은 대륜사에 시주되는 그 모든 걸 부처님 전에 올렸다. 과일, 떡, 차는 물론이고 신도들이 선물한 털신, 장갑 하나도 까지도 부처님께 올린 후에야 썼다. 총무원 소임을 보면서 놓쳤던, 만행 길에서도 만나지 못한 그 무엇이 잡혔다. 지고지순한 존재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자비의 눈길로 굽어보는 부처님께 합장을 올렸다. 까맣게 잊고 있던 신원사 새벽 종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부처님도 꽃구경 하셔야 한다” 했던 묘심 스님은 법당 문을 늘 열어 두었다.

덕신 스님은 어느 새 치워 놓은 돌과 외부에서 직접 실어 온 돌로 담을 쌓아갔고 그 곁에 꽃밭을 조성 해 일궈갔다. 봄부터 가을까지 꽃망울 터트리는 대륜사는 ‘꽃 절’이다.

묘심 스님 생전의 대륜사는 사월 초파일이면 어김없이 법당 문을 굳게 닫아버리는 절로도 유명했다. 심지어 연등 하나 달지 않았다고 한다.

“‘사월 초파일 하루만 부처님 오신 날이면 364일은 무슨 날이냐?’며 늘 마땅치 않아 하셨습니다. 하루를 비움으로써 365일이 부처님 오신 날임을 전하고 싶었던 겁니다.”

새벽이든, 대낮이든 “기도 가자!” 하시면 핸들을 잡아야 했다. 낙산사, 법흥사, 월정사, 상원사, 봉암사, 정암사 등 가고자 작심한 곳이 최종 목적지였다. 그렇게 손수 운전한 거리만도 60만Km다.

“신도들에게도 틈만 나면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나 살아 있을 때, 기도 많이 하거라. 나 죽고 나면 누가 나처럼 기도하자 그러겠느냐!’”

버스를 대여 해 신도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가는 날이면 신도들은 전날 밤부터 바짝 긴장해야 했다. 차는 약속 시간에 정확히 출발하기 때문이다. 떠나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며 뛰어본들 소용이 없다. “부처님 친견하러 가는 기본자세가 안 돼 있으니 늦는 게야!”

그보다 더 특이한 점이 있었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버스 안에서 이따금씩 차창 밖의 무엇인가를 향해 합장을 올리셨다. 한참 후에 알았다. 큰 산을 마주할 때 합장하신다는 사실을! 큰 산에 큰 절 있고, 큰 절에 부처님 계시지 않은가!

“노장 스님께서는 ‘우리가 올리는 합장에 부처님께서도 미소로 화답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산과 강을 향해서도 ‘안녕!’ 하시며 인사를 나누곤 하셨습니다. 의상 스님의 법성게 한 구절인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 스민 일상의 한 토막일 겁니다.”

저 법성게를 직역하면 ‘찰나가 곧 영원’이다. ‘지금 이 순간이 모든 시간과 공간에 두루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처님 광명 온 누리에 퍼져있고, 모든 생명에 불성 있다고 했다. 그러니 불광(佛光)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나는 피어있는 꽃, 흐르는 강과 맞닿아 있음이다. 수치상의 거리·시간은 중요치 않다. 덕신 스님도 대륜사를 떠났다가 돌아올 때 팔공산이 보이면 합장을 올린다고 한다.

묘심 스님이 평소 덕신 스님에게 자주 하신 말씀이 있었다.

“중노릇 잘 해야 한다.”

사월 초파일과 초하루 시줏돈 50만원 재정의 절 살림이니 신도들과 기도하며 정진하는 삶만을 선택할 만도 한데 아니다. 대구에서 기차 타고 서울로 가서는 전철로 갈아타고 의정부로 걸음 해 교도소 법회를 본다. 대전 교도소, 대구 구치소 법회도 놓지 않았다. 대구 지역의 군 법당 2곳도 살핀다.

“한 낮의 교회에서 쏟아져 나오는 젊은 층의 교인들 보신 적 있나요? 서울역 3.1교회만 잠시 지켜보아도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사찰은 어떤가요? 몇 명을 모아서라도 청소년 법회를 보고 있는 사찰이 대단할 정도입니다. 포교를 위한 새로운 공간이 필요해요. 신발을 벗고 법당에 들어서서 바닥에 앉아야 하는 시스템으로는 어린이·청소년 포교에 한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음악을 좋아하는 그들에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악기를 준비 해 와 찬불가를 연습한다 해도 내줄만한 공간이 없는 겁니다. 설법, 강연, 공연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문화센터가 주요 도시에 한 두 개씩만 서 있어도 포교지평은 엄청나게 확대될 게 분명합니다. 아쉽게도 우리는 그 준비에 소홀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 날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습니다. 큰 사찰이든, 작은 사찰이든 나름의 역량을 총 동원해 나름의 포교에 힘써야 합니다.”

사찰 문화에 뛰어들라 하기 전에 그들의 문화를 어떻게 담아 낼 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다.

덕신 스님은 묘심 스님이 계실 때도 ‘좋은 벗 풍경소리’의 끈만은 놓지 않았다. 2009년 5대 회장을 맡았고, 작곡가 김회경 선생의 권유로 찬불가 작사를 시작해 현재까지 50여곡을 썼다. 불교 음악인들이 정기적으로 무대를 오를 수 있는 토대를 다지려 ‘붓다 콘서트’를 열어 온 덕신 스님은 불교음악상 대상을 수상(2014) 했다. 불교 음악가들에게 간절하게 바라는 게 하나 있다고 했다.

“용성 스님의 원력을 이은 운문 스님의 노력으로 1970년대에 많은 찬불가가 우리 곁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삼귀의와 사홍서원이 그 시대에 탄생됐습니다. 1980년대에 서양음악 색채가 짙게 깔린 찬불가가 중심을 이룬 반면 90년대에는 국악 풍의 찬불가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며 국악과 서양음악 기법이 만난 새로운 작품들이 창출됐습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찬불가의 깊이가 더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불자와 일반인들 모두 즐길만한 대중 찬불가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가스펠 음악’처럼 현대문화와 신심이 접목된 대중 불교음악을 말하고 있음이다.

“한국 기독교가 아직도 젊은 층에 쉬이 다가갈 수 있는 건 음악이라고 봅니다. 취미활동이든, 신앙심의 발로든 일단 그들은 교회·성당으로 운집합니다.”

대구 지역에 어린이·청소년 불교학교를 개설하려는 원력을 세워놓고 있다. “설사 꿈으로 끝날지언정 결코 지울 수 없는 꿈”이라고 했다.

새해를 맞이한 독자님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하나를 부탁드렸다. “제가 드릴 만한 특별한 메시지는 없다”며 대신 묘심 스님이 대륜사 대중에게 당부한 일언을 전했다. 어느 날 묘심 스님이 돌담에 박힌 바윗돌을 가리키며 말했다.

“돌은 무거우나 변함이 없다. 바윗돌 같은 신심으로 기도하며 살아라!”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덕신 스님은

- 1956년 서울 출생.
- 1969년 신원사 출가.
- 1975 구족계 수지.
- 1986 동국대 선학과 졸업.
- 1988 ‘원심회’ 창립.
- ‘좋은 벗 풍경소리’ 회장(2대·5대) 역임. 국민훈장 동백장(2002). 불이상(2016)·불교음악상 대상(2014). 현재 대구 대륜사 주지.

 

[1471호 / 2019년 1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