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⑮
45.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⑮
  • 최병헌 교수
  • 승인 2019.01.21 15:22
  • 호수 147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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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의 ‘대왕’ 칭호와 ‘건원’ 연호 사용은 중앙집권 최종 완성판

법흥왕, 전국 제방수리 지시
금관가야 병합, 진골로 편입

지방관리 부임 때 식솔동반
안정적 지방지배 정착 반증

최초의 신라사찰 건립 시도
이차돈의 순교로 좌절 맛봐

법흥왕 16년 살생 금지 왕명
신라의 불교 공인 시점 확실

법흥왕 22년 불사 다시 재개
17년 뒤인 진흥왕 5년에 완공

흥륜사 완공 전 대왕사 불려
안장이란 법명의 승려 존재

​​​​​​​법흥왕의 법명은 ‘법공’ 기록
퇴위 후 사찰에서 행각 추측
보물 156호 대구 무술명 오작비.

신라에서는 23대 법흥왕 22년(535)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이라는 왕호를 칭하면서 국왕의 초월자적 위상을 과시하였다. 그보다 11년 전의 법흥왕 11년(524)에 탁부라는 소속부를 관칭하고, 동시에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이라고 호칭하였던 것에 비하면 국왕의 위상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높아진 것을 알 수 있다. 모즉지라는 법흥왕의 본래 이름이 ‘삼국사기’에서는 원종(原宗), ‘양서(梁書)’나 ‘책부원구(冊府元龜)’ 등의 중국 역사서에서는 모진(募秦)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모즉지와 모진은 같은 말에 대한 한자 표기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매금은 신라의 고유왕호인 마립간과 같은 말로서 앞서 지증마립간 4년(503)의 영일 냉수리비에서 ‘두 왕(二王)’이나 ‘일곱 왕(七王)’으로 표기되던 단계보다는 다소 진전된 것이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6부체제의 부장회의를 구성하는 일원이면서 그들의 대표에 지나지 않는 존재였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제 ‘성스러운 불법을 일으킨 대왕(왕중의 왕)’이라는 왕호를 새로 칭하게 되면 국왕은 6부체제 구성원을 대표하면서 동시에 그 일원이었다는 2중적 성격을 완전히 탈피하여 명실공히 6부체제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법흥’이라는 왕호에서 그러한 국왕의 위상 강화에는 불교를 공인하고 불교사찰을 창건한 업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법흥왕 14년(527) 이후 국왕의 위상이 크게 높아진 배경에는 불교를 공인한 사실 이외에 정치적·경제적 변화가 동시에 추진되고 있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먼저 ‘삼국사기’에서는 왕을 대신하여 6부체제의 부장회의를 주재하는 새로운 관직으로 상대등(上大等)을 설치하기 한 달 앞선 법흥왕 18년(531) 2월 유사(有司)에 명하여 제방(堤防)을 수리케 하였던 사실을 전하고 있다. 앞서 눌지마립간(417~458) 때부터 철제 농기구의 제작, 우경(牛耕)의 실시, 제방의 설치 등을 통하여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추진하여 왔었는데, 특히 법흥왕 18년의 제방 수리는 전국적으로 시행케 한 조치로 보인다. 1968년 12월 신라삼산학술조사단에 의해 경상북도 영천군 금호면 도남동에서 발견된 영천 청제비(菁堤碑)는 병진년(丙辰) 2월8일 저수지를 축조하고 수립한 것인데, 병진년은 법흥왕 23년(536)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5년 전의 제방 수리 명령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 비문의 내용은 축조된 저수지의 규모와 동원 인력의 숫자, 그리고 축조에 관련된 인물들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46년 대구시 대안동에서 임창순에 의해 발견된 대구 무술오작비(戊戌塢作碑)도 저수지 축조 사실을 기록한 것인데, 축조연대인 무오년(戊午年) 11월14일의 무오년은 25대 진지왕(眞智王) 3년(578)으로 추정되어 42년 정도 늦은 시기이다. 이 비석의 내용에 축조에 관련된 인물들의 이름과 동원인력의 숫자, 그리고 축조된 저수지의 규모 등이 기록된 것은 청제비와 비슷한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축조 공사와 관련된 인물 가운데 제일 앞에 도유나(都唯那)인 보장(寶藏) 아척간(阿尺干)과 역시 도유나인 혜장(慧藏) 아척간 등 2인의 승려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점이다. 도유나는 진흥왕 때에 설치된 승직이고, 아척간은 신라 경위 17관등 가운데 제6등인 아찬의 이칭인데, 승려가 관등을 가진 사례로서는 이 비석이 유일한 것이다. 지방에 저수지를 축조하는데 지방관이 보이지 않고 승려가 그 책임자로 파견된 이유는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지만 국통(國統)·주통(州統)·군통(群統)과 함께 도유나의 승직을 가진 승려들이 중앙과 지방의 행정에도 참여했으며, 무오오작비의 경우와 같이 승려가 관등을 소지하고 지방의 저수지 축조의 책임자로 참여한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본다. 따라서 신지식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승려들이 농업이나 상업의 발달 등 경제면에도 기여하고 있었던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 제방을 수리케 한 다음 해인 법흥왕 19년(532)에는 전기 6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금관가야(金官伽耶)를 병합하여 그 왕실을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하고 그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충(仇衝, 또는 仇衡)의 세 명의 아들 가운데 셋째인 무력(武力)은 진흥왕 때 무장으로 크게 활약하여 관등이 각간에까지 이르렀으며, 무력의 손자인 김유신은 뒷날 삼국통일의 원훈이 되었다. 그런데 진흥왕 때의 단양 적성비(550?)·창령 진흥왕척경비(561)·북한산 진흥왕순수비(568)·마운령 진흥왕순수비(568) 등에서 모두 무력이 사탁부 소속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 사탁부에 편입되어 6부 가운데 사탁부가 탁부와 함께 6부 체제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는데 일조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로써 금관가야의 병합과 그 지배세력의 편입을 통하여 지방민을 대상으로 하는 왕경지배자공동체의 성격을 지닌 6부를 확대하고, 특히 사탁부의 세력을 강화시킴과 함께 낙동강 하구의 평야지대를 확보함으로써 낙동강 서쪽으로 진출, 대외적으로 팽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금관가야를 병합한지 4년 뒤인 법흥왕 23년(536)에는 신라역사상 처음으로 연호를 제정하여 건원(建元) 원년(元年)으로 하였다. 그리고 2년 뒤(538)에는 교명을 내려 지방관리에게 가속(家屬)을 데리고 부임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법흥왕이 ‘대왕’이란 새로운 왕호를 사용하고 이어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국왕의 초월자적 지위 상승에 대한 최종 완결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지방관리가 부임할 때 가족과 노비를 동반하도록 허가하여 안정적인 지방지배를 정착시킨 것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로의 발전에 대한 최종 완성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국왕의 위상은 하나의 부의 대표, 곧 부장으로서의 낡은 옷을 완전히 벗어던지고 명실상부한 신라의 국왕으로서 자리 잡게 되었으며, 지방에 대한 직접 지배를 관철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종교이자 철학으로서의 불교가 그것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초부족적 지배이념으로서 본격적인 역할과 기능을 담당한 결과였다.

보물 157호 영천 청제비.

한편 불교를 공인한 이후 왕실불교·국가불교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찰의 건립과 교단의 성립이 우선 요구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에서 최초의 사찰 건립 시도는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이 순교함으로써 좌절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사찰이 건립되고 교단이 성립된 것은 17년이 지난 진흥왕 5년(544)에 이르러서였다. ‘삼국사기’에서는 진흥왕 5년 2월 흥륜사가 준공되었고, 다음 달인 3월에 나라 사람들에게 출가하여 승니(僧尼)가 되어 부처를 신봉하는 것을 허락하였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는 흥륜사 준공 사실에 대한 기사의 주석으로서 ‘향전(鄕傳)’을 인용하여 법흥왕 22년(535) 흥륜사 공사의 재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실제로는 법흥왕 14년 정미년(527)에 비로소 터를 닦고, 그 뒤 22년 을묘년(535)에 천경림(天鏡林)을 벌채하고 처음 공사를 시작했는데, 서까래와 들보에 쓸 재목은 모두 이 숲에서 취하기에 충분했고, 주춧돌과 돌함들도 모두 거기에 있었다는데, 진흥왕 5년 갑자년에 절이 낙성되었기 때문에 갑자년이라고 한 것이다.”

이로써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興輪寺) 공사는 법흥왕 14년 정미년에 시작되었으나, 이차돈의 순교 사건으로 중단되었고, 공사를 다시 재개한 해는 법흥왕 22년 을묘년, 준공한 해는 진흥왕 5년 갑자년임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해석이 학계의 통설이 되었다. 오늘날 학계 일각에서는 공사를 재개한 법흥왕 22년을 사실상 불교를 공인한 시점으로 이해하려는 견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차돈의 순교로 인하여 일시 좌절되었던 불교 공인은 늦어도 살생을 금지하는 왕명을 내린 법흥왕 16년(529)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1970년에 발견된 경상남도 울주군 천전리 바위에 새겨진 명문(천전리서석 갑인명)에 “갑인년에 대왕사(大王寺)의 안장(安藏)이 짓다(甲寅年 大王寺中 安藏許作)”라는 글귀가 보이는데, 갑인년은 법흥왕 21년(534)으로 흥륜사 공사를 재개하기 1년 전이다. 대왕사는 곧 흥륜사로서, ‘삼국유사’ 원종흥법조에서는 진흥왕이 흥륜사가 완공되자 ‘대왕흥륜사’라고 이름 붙였다. 그렇다면 법흥왕 22년 흥륜사 공사 재개 이전에 이미 흥륜사는 ‘대왕사’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안장이라는 이름의 소속 승려까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법흥왕 때 ‘대왕’이라고 칭해질 수 있는 사람은 법흥왕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리고 흥륜사는 법흥왕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사찰로서 중국 남조인 양나라의 불교 영향을 고려할 때, 법흥왕이 말년에 양무제의 사신(捨身) 행위를 본받아 사찰에서 행각(行脚)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해동고승전’의 법공조에서 법흥왕이 공사를 마치고 왕위를 사양하고 승려가 되어 법명을 법공(法空)이라고 하였다는 기록, 그리고 ‘삼국유사’ 왕력에서 왕비 파도부인(巴刀夫人)의 법명이 법류(法流)이며, 영흥사에 머물렀다는 기록을 다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학계 일각에서 24대 진흥왕이 말년에 머리를 깎고 법운(法雲)이라는 법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왕비 사도부인(思道夫人)도 말년에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거주하였다는 사실과 혼동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법흥왕과 불교, 법흥왕과 흥륜사의 특별한 관계를 고려할 때, 그의 말년에 법명을 갖고 흥륜사에 출가했던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 법흥왕 22년 천경림의 숲을 베고 흥륜사 공사를 재개할 때, 서까래와 들보에 사용할 나무, 그리고 주춧돌과 돌함에 사용할 석재를 모두 그곳에서 조달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천경림은 원래 불교 이전부터 신성시되던 장소로서 무속종교의 제사터, 또는 소도(蘇塗)의 자리였던 것으로 본다. 곧 불교는 무속종교를 대체하는 새로운 신앙이면서 동시에 무속종교를 매개로 하여 수용되고 있었던 사실을 의미한다. 신라말기 김용행이 찬술한 ‘아도화상비’에서는 경주 지역에 전불시대(前佛時代)의 절터로서 흥륜사 터를 비롯해서 사찰을 세울 자리 7곳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는데, 모두 불교 수용 이전의 무속종교에서도 신성되던 장소였으며, 삼국통일 이전 ‘중고’ 시기의 대표적인 사찰들의 자리였다.

천경림(흥륜사) 삼천기(영흥사) 용궁 남쪽(황룡사) 용궁 북쪽(분황사) 사천미(영묘사) 신유림(사천왕사) 서청전(담엄사)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73호 / 2019년 1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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