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케이트 필드의 아주 특별한 순간
99. 케이트 필드의 아주 특별한 순간
  • 김정빈
  • 승인 2019.01.22 13:26
  • 호수 147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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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을 순금처럼 빛나게 살아야만 한다”

시골 우체국장인 케이트 필드
동명이인 여배우와 이름 같아
전국 우체국장 모임서 호명돼
여배우 케이트 필드의 배려로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연설해
일생 삶 중 가장 특별한 순간
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미국의 제23대 대통령 벤저민 해리슨 정부에서 체신장관을 지낸 워너메이커가 전국의 우체국장들을 한곳에 모아 우정 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회의를 마련했다. 토론회 당일, 연단에는 대통령, 대법원장, 국무장관이 참석했고, 당대의 유명인사들도 다수 참석해 있었다.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마지막 연사가 연설을 마쳤을 때였다. 군중 속에서 “케이트 필드!”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케이트 필드!”를 외쳤다.

사람들이 이름을 부르고 있는 케이트 필드는 그 자리에 참석해 있던 여배우였다. 단상에 앉아 있던 케이트 필드는 군중의 호응에 응해야할지를 잠시 생각해보았다. 자신은 우정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그에 대해 특별히 해야만 하는 자신만의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대중 한 가운데서 키가 작은 한 중년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서서 모든 사람들을 조용히 둘러보았는데, 그녀가 쓰고 있는 보닛은 유행이 지난 지 오래된 것이었고, 어깨 위에 두른 숄은 검은빛을 잃어 거의 파란색으로 보일 지경으로 낡아 있었다.

케이트 필드는 얼른 회의 진행 과정이 적혀 있는 프로그램을 들여다보았고, 거기에서 ‘케이트 필드-켄터키주 컴벌랜드 코너스 제4급 우체국장’이라는 구절을 발견했다. 시골 우체국장인 중년여인 케이트 필드가 자신을 부르는 줄 잘못 알고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여배우 케이트 필드는 자신과 동명이인인 그 여인이 무안해하지 않도록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박수를 치며 “케이트 필드 부인!”하고 소리쳤다. 청중들은 그녀와 함께 박수를 치며 우체국장 케이트 필드를 환영했다. 시골 우체국장 케이트 필드가 말했다.

“여러분이 저에게 왜 연설을 하라고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네요. 처음 초대를 받았을 때, 내가 회의에 참석하면 우체국 일은 누가 볼지, 수십 마리나 되는 닭들은 누가 돌볼지 몰라 여간 고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상의를 했더니, 그분은 내가 굳이 그런 훌륭한 자리에 참석할 수 있겠느냐며 저를 무시하더군요. 저는 그분의 모욕을 이겨내기 위해서라도 이 모임에 꼭 참석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지난 사흘 동안, 훌륭한 분들이 연단에 올라와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제가 운영하는 것 같은 작은 우체국에 대해 말씀하시는 분은 한 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국의 작은 우체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산골이고, 그래서 주민들은 거의가 다 한 달에 한 번 밖에는 우체국에 오시지 못합니다. 그리고 가난하기 짝이 없는 그분들에게는, 나쁜 소식을 전하는 편지밖에는 오지 않아요. 누가 죽었다든지, 무슨무슨 걱정거리가 있다든지 하는 소식들이지요. 저는 그 편지들을 뜯어봅니다. 그런 다음 잘 걷는 노새를 가진 사람 중에 착한 이를 골라 편지를 수신자에게 보내드립니다.

이왕 고백하는 김에 제가 문서 위조죄를 범한 일을 털어놓겠습니다. 우리 마을의 과부인 호버 부인의 아들 제이크가 집에서 나갔습니다. 그 뒤로 아무 소식이 없다가 아들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호버 부인은 글을 못 읽습니다. 그래서 제가 편지를 읽어드렸는데, 중간에 ‘엄마, 돈을 좀 부쳐 주세요. 급히 쓸 데가 있어서요’라는 구절이 있지 뭡니까?
저는 그 부분을 바꿔서 읽었습니다. ‘머지않아 엄마께 돈을 조금 부쳐드릴 수 있을 거 같아요’라고요. 그러자 호버 부인은 기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제이크에게는 전부터 좋은 면이 있지요! 나는 그걸 알고 있었어요!’

저는 곧 제이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만약 네가 하루 빨리 일자리를 얻어 엄마에게 돈을 보내지 않으면 내가 쫓아가서 혼꾸멍을 내줄 거야!’ 그러자 얼마 안 있어 정말로 제이크가 어머니에게 돈을 보내왔습니다.

어머! 제가 너무 길게 말했죠? 침례교 목사라도 되는 듯이 말이죠. 하지만 저는 켄터키주의 컴벌랜드 코너스라는 동네의 평범한 우체국장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시골 우체국장 케이트 필드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고, 회의의 주최자인 워너메이커는 신문기자들을 따로 불러 모아 이 일을 기사화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시골 우체국장 케이트 필드가, 자신이 여배우를 부르는 소리를 잘못 알고 일어서서 연설을 한 것을 알게 되면 부끄러워할까 염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워싱턴에서 발행되는 작은 신문에 그녀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마지막 연설은 그날 회의의 백미였다. 그때 그녀가 받은 박수갈채와 환호는 그가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그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줄 것이다.” 

몇 년 뒤, 가족이 없이 홀로 살던 우체국장 케이트 필드가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머리맡에 신문기사를 오린 종잇조각이 놓여 있었고, 기사 아래에는 그녀의 손글씨가 적혀 있었다. “사실이 그랬다.”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특별한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인류학은 인류가 오래전부터 출생, 성년이 됨, 혼인, 죽음 등을 특별하게 인식하여 그 순간을 기념하는 통과의례를 치러 왔음을 증언한다. 육십갑자로 해(歲)를 헤아렸던 선조들이 환갑연을 맞아 성대한 잔치를 벌인 것 또한 통과의례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평균연령이 많이 늘어난 현재에 환갑잔치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의 특별성이 많이 희석된 것이다. 나아가 부처님께서 강조하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히 살 것’에 비추어 본다면, 재가 신자야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스님까지 환갑이나 생일잔치를 벌이는 것은 불교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삶은 지루한 것이고, 그래서 특별한 순간, 특별한 장면을 요구한다. 일상적이고 평범하기만 하던 시간의 흐름 가운데서 순금처럼 빛나는 한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 순간이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내가 남달랐던 순간, 내가 사람다웠던 순간, 내가 돋보였던 순간, 그리하여 나의 삶이 의미 있게 되었던 순간.

시골 우체국장 케이트 필드에게도 그 순간이 있었다. 그녀는 그 순간의 빛났던 자신의 모습에서 힘을 얻어 평생을 잘 살아 마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다. 삶은 양면적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순금처럼 빛나는 한 순간’으로 살아야 한다고도 느끼고, ‘일상적이고 평범하기만 하던 시간의 흐름 가운데’ ‘순금처럼 빛나는 한 순간’이 필요하다고도 느낀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74호 / 2019년 1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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