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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이수민의 ‘고승한담(高僧閑談)’

기자명 김영욱

맑고 그윽한 담소의 운치를 담다

크지도 작도 않은 적당한 화폭에
거대한 암석산과 꽃나무 몇 그루
대화하는 두 스님 즐거움 전해져

이수민 作, ‘고승한담’, 18세기, 종이에 먹과 엷은 채색, 31.0×36.0㎝, 개인 소장.
이수민 作, ‘고승한담’, 18세기, 종이에 먹과 엷은 채색, 31.0×36.0㎝, 개인 소장.

一抹輕煙遠近山(일말경연원근산)
展成淡墨畵圖看(전성담묵화도간)
目前分外淸幽意(목전분외청유의)
不是道人俱話難(불시도인구화난)
‘멀고 가까운 산에 한 줄기 스친 엷은 안개 진실로 엷은 먹으로 이루어낸 그림 보는 듯하네. 눈앞 뜻밖의 맑고 그윽한 풍경 도반이 아니면 함께 말하기 어렵구나.’ 다이치(大智, 1290~1367)의 ‘봉의산 산속에 머물다, 하나(鳳山山居一)’.

산중에 살면 사람은 세 가지 즐거움을 얻는다. 첫 번째는 날마다 새로운 맑은 햇살과 투명한 달빛 담긴 산속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 즐거움이고, 두 번째는 개울 소리,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 새 소리처럼 나를 에워싼 세계를 귀로 들을 수 있는 즐거움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만든 지 몇 주 지나서 제 본연의 맛과 향을 품은 햇차를 마시며 자연을 음미할 수 있는 즐거움이다.

홀로 산중에 살며 세 가지 즐거움을 얻을 수 있지만, 마음 맞는 도반(道伴)이 곁에 있다면 또 하나의 즐거움이 더해진다. 세 가지 즐거운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담소(談笑)’의 즐거움이 바로 그것이다. 담소란 문자 그대로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말이다. 담소는 소소한 일상처럼 가벼울 수도 있고, 때로는 절집의 화두처럼 묵직할 수도 있다.

담소를 즐긴다는 것은 그저 말의 즐거움만 쫓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교환하며 자신의 마음을 바로 알기 위해서이다. 좋은 담소란 마치 청정한 찻잔에 담긴 맑고 그윽한 향기가 있는 차와 같아서 대화를 나누고 나면 마음이 개운하다. 반대로 좋은 차가 아닌 것처럼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는다면 그 담소는 좋은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마음의 수행이 근본인 이들에게 담소는 더할 나위 없다.

이수민(李壽民, 1783~1839)의 ‘고승한담’은 맑고 그윽한 담소의 운치를 담고 있다. 화면 아래에 적힌 ‘초원(蕉園)’이라는 호(號)로 인해 흔히 김석신(金碩臣, 1758~?)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아래 ‘군선(君先)’이라 새겨진 인장을 통해 같은 호를 사용했던 이수민의 그림임을 알 수 있다. 여하간 그림을 감상하기에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적당한 화폭의 절반에는 거대한 암석의 산이 자리 잡고 있다. 산에는 드문드문 꽃나무가 제 모습을 드러냈고, 산 아래에는 잡다한 나무들이 옅게 드리어진 안개 밖으로 얼비친다. 꽃나무 사이로 텅 빈 하늘을 바라보는 승려와 그에게 말을 건네는 듯한 또 다른 승려가 보인다.

들리지 않는 그들만의 대화가 이어진다. 속세의 번민을 풀어놓는 것인지, 절집 수행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인지, 경전 속 가르침을 토론하는 것인지, 아니면 눈에 보이는 마냥 좋은 풍경을 감탄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서로 도반이 되는 두 스님의 대화는 하루에 있어 가장 맑고 그윽하며 즐거운 시간이다. 그저 오고 가는 담소 속에서 하루의 날빛이 산속 꽃나무에 젖어 들고 있을 뿐이다.

김영욱 한국전통문화대 강사 zodiacknight@hanmail.net

 

[1477 / 2019년 2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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