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아난존자의 발원
10. 아난존자의 발원
  • 고명석
  • 승인 2019.05.28 13:14
  • 호수 149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진리의 법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 가졌던 시자

부처님 열반할 때까지 25년 수행 
가장 많이 가르침 듣고 남긴 제자
여성출가 3번 간청해 허락받기도
시봉의 8개 조건 속 간절함 담겨
경주 석굴암 십대제자상 중 아난존자.
경주 석굴암 십대제자상 중 아난존자.

아놀드 토인비가 예견했듯이 배타적 유일신 관념은 점점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고 있다. 서양의 지성들은 법 중심의 불교에 아무래도 반한 모습이다. 진보적 신학에서는 신을 법의 핵심을 이루는 ‘무’(空)로 보며 무의 신성(神性)에 눈을 떠가고 있다. 과학시대의 현대적 종교성으로는 법, 그 보편적 진리가 마음을 끌기 때문이다.

법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지혜의 눈으로 발견한 것이다. 이 법이 널리 전해지도록 듣고 기억하며 남긴 사람이 아난존자다. 법을 기록한 경전의 첫 구절에 등장하는 말이 여시아문(如是我聞)이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법을 들으면 마음에 달이 뜬다. 환희롭다.    

아난존자는 부처님 10대 제자 중 한 분이자 부처님의 사촌동생이다. 아난존자는 다문제일(多聞第一)로 불린다. 부처님 법을 가장 많이 들은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대지도론’에서 그는 “세세생생 석가모니불의 제자로 다문제일이 되어 아난이 되게 해 달라”고 발원했다고 전한다. 

아난존자는 부처님을 25년 동안 모시면서 부처님이 열반에 이를 때까지 시자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낸다. 부처님을 모셨던 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시자로서 고정적인 역할을 끝까지 완수한 사람은 아난존자가 유일하다. 그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부처님일지언정 자신이 내거는 조건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시자역할을 할 수 없겠노라고 단호히 말한다. 그 조건을 들어보자. 이 조건은 아난존자의 발원이라 할 수 있겠다.

첫째, 부처님께 드린 새 옷이나 헌 옷을 저에게 주시지 않길 바랍니다.
둘째, 부처님께 따로 올린 공양을 저에게 주시지 않길 바랍니다.
셋째, 제가 부처님이 머무는 방에서 같이 지내지 않길 바랍니다.
넷째, 제가 부처님이 공양 초대 받은 자리에 가지 않길 바랍니다.  
다섯째, 제가 공양 초대받은 장소에 부처님 같이 가주시길 바랍니다.
여섯째, 먼 곳에서 사람이 찾아왔을 때 즉시 부처님이 만나주시기 바랍니다. 
일곱째, 제가 의심나는 것이 있을 때 언제든지 부처님께 질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덟째, 제가 없을 때 설한 법문은 나중에 다시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이 중에서 여섯 번째까지가 시자로서 섬김의 조건이라면 마지막 두 가지는 부처님 법에 대한 자신의 원을 담은 것이다. 가장 존경하는 부처님께 올린 옷이나 음식, 거처 등은 아마도 훌륭하고 진귀했을 것이다. 시자라면 부처님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니 그런 값진 것들과 접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부처님에게 바쳐진 공양물이 자신에게 주어진다해도 결코 취하지 않겠다는 원이 아난의 마음이다. 하지만 자신이 좋은 자리에 초대받으면 부처님도 같이 가야만 한다고, 같이 가서 맛있는 공양을 드셔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먼 거리에서 부처님을 만나러 온 사람은 그만큼 시간과 정성을 들일만큼 절실한 문제를 안고 왔을 것이니, 그런 사람들이 먼저 부처님을 만나야 한다고 아난존자는 바란다.

이러한 시자로서 섬김의 역할을 다하길 바라면서 아난존자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법에 대한 사무침을 드러낸다. 그만큼 부처님 법이 중요하고, 이것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며, 그 법을 안 결과 내 마음이 밝아져 지극한 기쁨으로 가득 차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법은 그렇게 사람들의 눈을 띄우고 마음을 열어 삶의 실상을 보여주어 ‘아하’하는 느낌을 선사한다. 그래서 구도의 길을 걷는 영적 순례자들은 법에 대해 목말라하며 그 법을 듣고 느끼며 깨우치기 위해 어떤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아난존자가 그런 사람이라면, 우리들은 이러한 아난존자를 따르는 또 다른 아난이다.  

아난존자는 여성 출가를 세 번이나 부처님께 간청한 끝에 허락을 받아낼 정도로 그에게는 여성 출가의 원도 간절했다. 부처님 당시에 인도 사회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심했다. 그러니만큼 여성 출가를 허락할 경우, 인도사회에서 부처님 승가공동체에 비난이 쇄도하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었다. 또한 여성들이 출가할 경우 남성들만이 머물고 있는 독신 청정 공동체에 유혹의 물결이 스밀 수 있는 오염의 위험성 또한 있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맨 처음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 독신으로 살거나 아파하는 많은 여성들이 있었다. 부처님을 어머니 대신해서 길러준 마하프라자파티는 양모이자 이모였다. 그는 남성들이 출가하거나 저 세상으로 떠나갔을 경우 혼자 살게 된 여인을 대표한다. 그밖에 이러저러한 남성들의 폭력으로 슬퍼하는 여성들이 즐비했다. 그들도 출가를 통해 평화와 진정한 행복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출가를 원했다. 그런 여성들이 하나둘 늘어나 500명이나 되었다. 그런 사람들이 먼 길에서 지친 몸과 부르튼 다리를 이끌고 아난에게 다가와 부처님께 출가를 허락해 줄 것을 부탁한다. 그래서 아난존자는 세 번씩이나 여성의 출가를 간청한 끝에 허락을 받아낸다. 여성들 또한 깨달음의 성품을 지닌 소중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아난존자는 가섭존자로부터는 여성 출가를 허락한 일로 불법이 500년 이상 물러났다는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 그래도 아난 존자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꿋꿋하게 길을 간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이 승가공동체의 일원으로 법을 중심으로 수행하여 깨달음을 열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아마도 아난존자의 이러한 원력이 없었다면 외려 불법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비록 법이 현대 자본의 논리에 속절없이 밀려나는 시절이긴 하지만, 그래도 최후에 남는 것은 법이요 진리다. 법은 오늘날 세속주의, 과학주의의 물결 속에서도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이 법과 법에 따른 실천으로 인격화된 분이 부처님이다. 법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법의 핵심인 공성은 인격을 초월하며 보편적이다. 반면 인격은 거기에 자비와 사랑이 넘치긴 하지만 인격의 자기중심성으로 인해 편향되고 제한적이다. 인격신을 중심으로 한 저간의 기독교 신앙의 차별성과 배타성이 이를 잘 보여준다. 

법과 인격성이 서로 어우러져야 차별을 떠나 남과 여, 부자와 빈자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자비의 비를 뿌린다. 차별성을 떠난 보편적 법에 따라 자비와 생명이 스며들 때 거기에 무차별적 종교성이 빛난다. 그래서 교토학파의 니시타니 게이지는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모색하며 비인격적 인격, 인격적 초인격을 강조한다. 그것은 법과 영성의 만남이기도 하다. 그 인격적 섬김의 영성을 깨우려면 법에 눈을 떠야 한다. 아난존자처럼 섬김에 철저하고 자주 법을 들으며 나누려는 원력이 간절해야 한다. 법과 공동체적 삶에서 타자의 섬김, 영성, 그리고 원력은 탈종교화를 넘어서는 오늘날의 종교성이다.

고명석 불교사회연구소 연구원 kmss60@naver.com

 

[1490호 / 2019년 5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나그네인 길손 2019-06-09 13:00:12
내게는 허무의 소리로 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