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몽골항쟁 최대 승첩지 충주산성·처인성
6.  몽골항쟁 최대 승첩지 충주산성·처인성
  • 임은호 기자
  • 승인 2019.06.17 16:41
  • 호수 149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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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군 침입 맞서 결사항쟁한 민초들의 호국정신 생생히 남아

대몽항쟁 민중 영웅 김윤후 장군
전장서도 수행자 본분 잊지 않아
‘스님' 기록뿐 알려진 행적 없어

승전 후에도 주민들에게 공 돌려
조선시대 승병 뿌리로 평가받아
스님이었던 김윤후 장군은 몽골군으로부터 청주성을 지켜낸 주민들을 노비에서 해방시켜 주며  부처님 같은 지극한 자비심과 평등정신을 보여줬다.

1253년(고려 고종 40년) 12월 충주산성. 산 아랫마을을 몽골군이 장악한 지 벌써 두 달이 지났다. 몽골군의 공격은 ‘세계를 정복했다’는 명성에 걸맞게 끈질겼다.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고려인이 몽골군 앞에서 피투성이 화살받이로 세워졌다. 70여일 간 전투가 이어지면서 죽거나 다친 이들이 수두룩했다. 크고 작은 부상에 병사와 노비들로 구성된 노군들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식량과 물이 모두 바닥을 드러내며 주민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성을 내줄 수 없다.’

가파른 성벽 위에서 한참을 고뇌하고 서 있던 김윤후 장군은 결심한 듯 병사와 노군, 주민을 불러 모았다. 더 이상 몽골군이 고려인을 살상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만약 충주성이 무너지면 충주민이 도륙당하는 것은 물론 경상도도 유린당할 게 뻔했다. 

“힘을 다해 싸워 성을 지켜내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관직을 내리겠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한다.”

김윤후 장군은 망설임 없이 관청에 보관돼 있던 노비 문서에 불을 질렀다.

“너희는 오늘부로 양민이다. 문하시중도, 병마사도 될 수 있는 양민이다. 이제 노비는 없다. 몽골에 맞서 싸우는 고려 백성만 있을 뿐이다.”

김윤후 장군은 그동안 전투에서 노획한 몽골군의 소와 말을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 주었다.

이튿날, 성문이 열렸다. 김윤후 장군의 약속에 힘을 얻은 주민들은 마지막까지 힘을 짜내어 바람처럼 내달렸다. 적진 속을 헤집고 들어가 몽골군의 중심부를 타격했다. 뜻하지 않은 공격에 몽골군은 대혼란에 빠졌다. 70여일 간의 전투에서 충주를 함락하지 못한 몽골군은 포위를 풀고 후퇴했다. 몽골군 총사령관 야굴은 충주성 공격실패로 목이 날아갔다. 승장 김윤후 장군은 현장에서 주민과의 약속을 지켰다. 이렇듯 절체절명의 위급한 상황에서 끝까지 성과 주민을 버리지 않고 싸웠던 김윤후 장군은 뛰어난 장수이면서 지도자였다.

몽골은 이후에도 고려를 침입할 때마다 충주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충주민들은 단단했다. 사기가 오른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성을 지켰고 몽골군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노비에서 자유인이 된 주민들은 벼슬아치와 귀족들이 백성들을 외면하고 도망가면서 버린 터전에서 제 땅과 혈육을 지켜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나라와 백성을 지키겠다는 단 하나의 일념으로 주민들을 진두지휘했던 김윤후 장군은 이후에도 기적같은 승전을 이어갔다.

김윤후 장군은 스님이었다. 진위현 백현원이라는 절에 살았던 김윤후 장군은 은사스님의 뜻으로 전쟁에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아쉽게도 법명이나 출가이야기, 심지어는 생몰연도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김윤후 장군은 몽골의 2차 침입(1232) 때도 처인성에서 스님과 소수의 부곡민 만을 이끌고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이를 죽이는 전공을 세우면서 민중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당시 처인성은 오늘날 용인에 있는 작은 토성으로 추정되는데, 제대로 갖춰진 성은 아니었다. ‘문화유적총람’에 따르면 “처인성은 승려 김윤후가 축성했으며 고려 고종19년(1232) 몽골의 2차 침입 때 적장 살리타이가 개성과 서울을 함락하고 이곳 처인성에 이르렀을 때 김윤후가 승병들과 항전하며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하고 몽골군을 퇴각시켰다”고 기록돼 있다.

처인성은 김윤후 장군이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이를 사살했던 장소다.

김윤후 장군의 업적이 지금까지도 칭송받는 이유는 전쟁 승리의 공 때문만이 아니었다. 상대방 우두머리를 없애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김윤후 장군에게 국왕은 무관으로서 최고의 자리인 상장군직을 수여하고자 했다. 그러나 장군은 “싸울 때 나는 활도 화살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어찌 헛되이 중한 상을 받겠습니까?”라며 이를 간곡히 사양했고 그 공을 함께 싸운 주민들에게 돌렸다. 그래서 모든 공이 함께 싸웠던 주민들에게 고루 돌아가게 했다. 전쟁 중에도 출가 수행자의 정신을 잊지 않고 권력과 욕망을 떠난 무소유의 정신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30여년간의 전쟁 끝에 고려는 1259년 3월, 몽골과의 전쟁을 끝냈다. 이후 역사의 기록에서 김윤후 장군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전쟁 후 한직으로 내몰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지만 김윤후 장군의 마지막 삶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김윤후 장군의 짧은 일화는 우리에게 몇 가지 큰 감동을 주고 있다. 호국불교의 의미와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다는 평등사상이다. 

호국불교 정신은 대승불교의 실천과 다르지 않다. 스님들이 전쟁터에 나서는 것은 중생의 편에서 중생이 안고 있는 절박한 고통을 헤아려 그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결코 왕조나 정치권력에 다가서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한국사에서 호국불교 하면 대부분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떠올린다. 휴정, 유정, 영규, 처영 스님 등 승병을 모아 구국의 횃불을 치켜든 고승들과 왜적에 맞서 장렬히 전사했던 승병장들이 익히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700년 한국불교사에서 나라와 민중을 위해 죽비 대신 칼자루를 움켜쥔 스님들은 그전에도 결코 적지 않았다. 다만 이름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져 갔거나 혹은 후대 사람들이 애써 기억하지 않을 따름이다. 그중에서도 침략당한 중생의 안위를 위해 목숨 바쳐 전장에 나선 김윤후 장군의 활약은 어쩌면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시대에도 승병들이 적극적인 활약을 할 수 있게 한 호국불교의 시발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몽골과의 거듭된 전투에서 항상 승리했던 유일한 인물임에도 기록이 많지 않은 것은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해 권력의 한복판에 들어가는 대신 자신의 공을 낮춰서라도 민중의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김윤후 장군이 실천한 ‘노비 문서 파기’는 부처님과 같은 지극한 자비심과 평등의 정신의 실천이었다. 노비 문서가 소각되는 것을 지켜본 노비들은 환호했다. 신분의 해방은 그들이 싸워야 하는 이유를 알려줬고 ‘자유’는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권리임을 보여줬다. 이는 충주성에서 벌어졌던 전투가 빛나는 예로 우리 역사에 남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행동의 이면에는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다는 믿음이 함께 했을 것이다.

몽골항쟁 최대 승첩지였던 충주산성은 최근 정비를 마쳤다. 충주산성은 대부분 소실되고 300m가량 남아있었으나 현재 둘레 1120m, 높이 약 6.5m로 복원됐다. 또 초입에서 산성으로 향하는 산길에는 김윤후 장군과 대몽항쟁 역사의 한 장면을 소개하는 판넬 등을 설치해 시민들의 역사교육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충주시는 2008년, 충주성에서 승전한 김윤후 장군과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해 대몽항쟁전승기념탑(탑신 15m, 기단부 지름 10m)을 건립하기도 했다. 5인의 군인상과 충주백성을 묘사한 이 기념탑은 몽골군의 침략으로 결사항쟁 한 이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처인성은 1977년 경기도 기념물 44호로 지정되며 성곽이 복원됐지만 여전히 잡목만 무성한 상태다. 둘레가 650여보밖에 되지 않는 조그마한 토성. 성안이 흙으로 메워져 도토리나무와 잡목들만이 열 지어 서 있는 처인성은 1979년 세워졌다는 ‘처인성승첩기념비’만이 당시의 흔적을 보여준다. 기념비에는 “…이곳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이 작은 성에서 세계를 정복한 몽골군을 물리친 한국민족의 슬기와 힘을 다시금 되새기게 될 것”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성에서 실제 적과 목숨 걸고 싸워낸 사람들이 만들어낸 극적인 스토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시공을 넘나드는 감동을 준다. 능력과 양심, 책임감을 가진 지휘관의 리더십, 강력한 적 앞에서 오랜 경험과 끈질긴 저항의식으로 무장한 주민들의 단결력, 이 한 가운데 서 있는 김윤후 장군의 처절한 삶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준다. 몽골의 침략 앞에서 고통받던 민중들을 구제하기 위해 승려이면서 또한 장수의 삶을 살았던 그의 삶은 이(理)와 사(事)의 경계를 넘어선 위대한 스님의 삶으로 기록돼야 할 것이다.  

충주·용인=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493호 / 2019년 6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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