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은사스님께 보내는 편지 ② - 진광 스님
17. 은사스님께 보내는 편지 ② - 진광 스님
  • 진광 스님
  • 승인 2019.09.09 16:59
  • 호수 15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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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노릇 잘하라는 경책에 방황할 겨를 없습니다”

당신의 법구마저도 병원에 기증
마지막까지 보살행 실천한 스승
영결식날 뜬 해무리 생각하면서
“자신 속이지 말라” 가르침 새겨
돌아오셔서 큰 원력 실행하시길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스님! 여여(如如) 하신지요?

미혹한 제자 ‘진광’입니다. 스님께서 원적에 드신지도 어언 14주기가 다 되어 옵니다. 그렇게 꽃은 피고 또 지고를 반복하며 14년이란 세월이 흘렀건만 제 가슴 속에 항상(恒常) 하시는 스님의 크고 너른 자비덕화는 해가 거듭될수록 더해만 갑니다. 원래 생전에 불효한 자식들이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나면 더욱 애달픈 것과 같은 이치인 듯합니다.

남미를 여행할 적에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스님의 전화를 받았지요. “이제 들어와서 나를 도와다오”라는 한마디에 2박3일간 비행기를 타고 귀국을 했었지요. 귀국해 인사드리니 환한 미소로 맞아 주시면서 “이제 심장수술이 잘 되었으니 히말라야나 함께 가보자꾸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스님의 마지막 모습이 될 거라고는 어찌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스님의 갑작스런 원적 소식에 저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황망함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망연자실 했습니다. 스님의 법구는 유언하신대로 동국대 일산병원에 연구용으로 기증되어 마지막까지 보살행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법구를 떠나보내는 순간, 복받치는 슬픔에 얼마나 속울음을 지었는지 모릅니다. 조계사 앞마당에서 영결식을 하던 그 날, 조계사 하늘 위로 홀연히 해무리가 원을 그리며 그 안에 스님께서 천화하시는 듯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스님께서 “이제는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고 중노릇 잘 하시게나”라고 말씀하시는 듯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다음 해 저는 스님께서 그토록 가보고 싶다고 하시던 히말라야로 길을 떠났습니다. 세계의 지붕인 티베트 ‘초모랑마’로 가서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EBC)’에서 스님께 고(告)하고는 그 아래 ‘팅그리’라는 마을 언덕에서 스님의 옷가지와 가사를 불살라 드렸었지요. 그때 ‘팅그리’에서 만난 ‘케샹’이라는 소녀의 눈동자에서 저는 스님을 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지금도 저는 스님께서 히말라야의 허공과 구름, 그리고 바람과 꽃과 ‘케샹’의 눈동자 속에 항상(恒常)하고 계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니 미혹한 저를 직접 삭발해 스님으로 만들어 주시고 보살펴 주신 자비덕화는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넓기만 합니다. 매양 “진광대사!”라고 부르시면서 “나는 네가 그냥 좋단다”라고 말씀해 주셨지요. 아마도 숙세의 지중한 인연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지금도 누군가 “자네는 점점 은사 스님을 닮아가네 그려”라고 하시는 걸 보면 제 어딘가에 스님께서 살아 계신가봅니다.

한때 번민과 방황으로 헤매일 적에 한참 만에 만행을 끝내고 돌아온 때일 겁니다. 스님께서는 제게 “이제 마음을 쉬었느냐?”고 물으시고는 “그렇다”고 하자 “그럼 되었다. 중노릇 잘 하거라”라고 하셨지요. 그 뿐이었습니다. “노스님 시봉하다가 선방에 가겠노라”고 할 적에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에 부처님을 다시 뵙는 듯 무척 반가웠노라”고 하셨습니다. 철마다 선방에 대중공양을 하러오셨고 따로 용돈까지 챙겨주시며 “해제비 받으면 절반은 나눠 쓰자구나”라고 하셨지요. 물론 가져다 드리고 곧바로 더 큰 돈을 빼앗아 갈지라도 말입니다. 스님께서는 제가 드린 그 돈을 차마 쓰지 못하신 채 품에 지니고 다니시며 자랑을 하곤 하셨지요.

경북 문경의 희양산 봉암사 선원에서 정진할 적에 스님께서 직접 써서 보내주신 고구정녕한 당부와 격려의 편지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님이 안 계신 지금도 가끔 그것을 꺼내보며 스님을 뵈어 온 듯이 마음을 다지곤 합니다. 해외로 걸망을 메고 만행을 할 수가 있었던 것도 스님의 자비덕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외국에서 사다드린 변변치 않은 선물마저 얼마나 좋아 하셨는지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스님께서는 네팔 히말라야에서 자라는 ‘순드리’ 나무와 중국 황산의 지팡이를 특히 좋아하셨지요. 스님께 드렸던 그 지팡이는 제가 다시 구해다 잘 모시고 있답니다.

스님! 스님께서는 2003년 2월 실시된 제31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선거에 당선되었을 적에 저 하나만 불러들여 수행사서 일을 맡기셨지요. 매양 저만 나무라고 꾸짖은 것은 정말 미워서가 아니라 어쩔 수가 없었다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었지요. 가끔은 “장에 소 팔러 가는데 강아지 따라 다니듯이 한다”고 해서 ‘매우수견(賣牛隨犬)’이란 성어도 만들어 경책했었지요. 또한 사서국장인 본해 스님에게 “바람이 세차게 불면 진광이를 바람막이로 쓰라”고 해서 마음이 안 좋았는데 그게 저를 위한 말씀인 걸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그 외에도 참 모질게 대하신 것들이 모두 다 저를 위해 그러신 걸 그때는 왜 몰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3년 전에 속가 부친을, 1년 전에는 모친마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내 드렸습니다. 아마 저승에서 만나실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저는 세상천지에 천애고아의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스님과 부모님의 부재(不在)는 저의 실존(實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수록 자신에게는 추상처럼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춘풍처럼 자비로워야 하겠지요. 그래야지 스승이나 부모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안 듣는다고 합니다. 제 나이에 고아 아닌 사람이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선문에 “스승과 같아서는 스승의 은혜를 갚았다 할 수가 없나니 스승을 뛰어 넘어야 비로소 그렇다 할 것이다”라고 함이 그 뜻일 겁니다.

무릇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기 마련이고 만난 사람은 정히 이별하는 것이(생자필멸 회자정리 生者必滅 會者定離) 만고의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을 그리워함은 제 안에 영원히 함께하는 그 무엇이 항상(恒常)하기 때문일 겁니다. 다만 스님과 부모님의 이름에 부끄럽거나 욕되지 않도록 삶과 수행에 성심을 다하고자 합니다. 부디 제가 신심과 원력 그리고 공심으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굽어 살펴 주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제 곧 ‘영진 스님과 함께하는 티베트 수미산 성지순례’를 14박 15일 일정으로 다녀 올 예정입니다. 그럼 히말라야 설산의 허공과 바람, 그리고 구름과 꽃으로 항상(恒常)하시는 스님을 뵈올 수 있을 겁니다. 아니면 카일라스 수미산의 해와 달과 별과 호수로 함께 하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할 말은 바닷물로 먹을 삼아 쓸지라도 다함이 없거니와 이만 줄입니다.

은사이신 인곡당(仁谷堂) 법장(法長) 대종사여! 부디 본래 서원을 잊지 마시고 속히 사바세계로 돌아오셔서 널리 중생을 제도해 주시옵기를 우러러 바라옵니다. 미혹한 제자 ‘진광’은 스님의 유훈을 받들어 수행자답게 살아가도록 용맹정진 하겠나이다.

진광 스님 조계종 교육부장 vivachejk@hanmail.net

 

[1504 / 2019년 9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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