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추사 김정희, 무량수와 자화상 ①
18. 추사 김정희, 무량수와 자화상 ①
  • 손태호
  • 승인 2019.10.29 10:52
  • 호수 15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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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의 노력으로 마음의 때 벗겨 완성한 추사체

조선 명문가 경주김씨 가문 태생
많은 장서 벗 삼아 학문 갈고닦아
안동김씨 모함에 제주 대정 귀향
학문 향한 열정·제자 도움에 버텨
세속 때 씻어내고 불교 하심 배워
연주암 요사채 ‘무량수’ 현판, 19세기.
그림1. 연주암 요사채 ‘무량수’ 현판, 19세기.

가을 날씨가 맑고 청량하여 공휴일을 맞아 서울 관악산을 올랐습니다. 관악산 정상 부근 깎아지른 절벽에 연주대가 있고 남쪽으로 약 300m 아래 연주암이 있어 오고가는 산객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연주암은 영험한 나한도량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주말 무료 점심공양으로 불자뿐 아니라 등산객에게도 아주 친숙한 인기 많은 사찰입니다. 

연주암에서 꼭 빼놓지 않고 감상해야할 작품이 두 점 있는데 하나는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예술가인 위창 오세창 선생의 전서체가 돋보이는 ‘산기일석가(山氣日夕佳)’ 현판과 조선후기 최고 서예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무량수(无量壽)’ 현판 입니다. 두 작품 모두 요사채에 걸려 있는데 요사채 툇마루에 앉아 쉬기만 했다면 머리 위에 글씨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검은색 바탕에 흰색으로 쓰인 ‘无量壽’(그림1). ‘무량수’는 ‘한 없이 긴 수명’이란 뜻입니다. 모든 생명은 소멸을 피할 수 없는데 ‘무량수’라니 역시 우리 같은 중생이 감히 할 말은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법신(法身)이 삼세 고금, 시방 그 어느 곳에서도 항상 존재하고 결코 멸하지 않으므로, 그 수명이 실로 무량하여 한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위대한 법을 칭송하기 위해 ‘무량수’라 하였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이 ‘무량수’의 뜻을 좋아했던지 이곳 연주암 현판 외에도 예산 추사고택에도 ‘무량수’ 글씨를 남겨 놓았습니다. 두 곳의 글씨는 동일하지만 연주암에는 김정희가 가장 많이 사용한 호 ‘완당’을 사용하였고, 추사고택에서는 ‘승련노인(勝漣老人)’이란 다른 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무량수’ 글씨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은 바로 첫 번째 글자인 ‘无’입니다. 보통 ‘없다’는 뜻은 ‘無’입니다. 하지만 추사는 ‘無’를 사용하지 않고 ‘无’로 사용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하늘 천(天)’을 쓴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无’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无’ 는 두 글자의 뜻이 합쳐서 만들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로 전신을 그린 사람[大]의 머리 위에 ‘一’을 더하여 머리가 보이지 않게 함을 뜻하는 ‘無’의 고문이체(古文異體)입니다. 

같은 ‘없을 무’인 ‘無’와 ‘无’는 어떻게 다를까요? ‘無’는 섶을 쌓아놓고 불을 질러 태우니 없어져 버린다는 의미의 없음이지만, ‘无’는 하늘 天자를 닮아 하늘의 텅 비어 있음과 같은 없음으로 불교의 공(空)과 같은 의미의 글자입니다. 추사는 ‘무량수’에서 말하는 ‘무’의 의미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오랫동안 고민한 결과로 ‘無’가 아닌 ‘无’로 사용한 것입니다. 

해남 대흥사 ‘무량수각’, 19세기.
그림2. 해남 대흥사 ‘무량수각’, 19세기.

조형적으로도 ‘量’과 ‘壽’ 두 글자가 다 가로 획이 연속적인 중첩되어 있는데 첫 글자도 ‘無’로 썼다면 얼마나 답답해 보이겠습니까? ‘无’로 사용하면서 마지막 획을 위로 치켜 올려 시각적으로 답답함을 해소시켰습니다. 추사는 이 ‘无’를 참 좋아하여 해남 대흥사와 예산 화암사의 ‘무량수각’ 현판에도 사용하였습니다. 특히 해남 대흥사 ‘무량수각’ 현판은 제주도로 귀양 가는 와중에 잠시 들른 대흥사에서 원교 이광사의 ‘무량수각’ 글씨가 마음에 안 든다며 본인의 글씨로 바꾸라며 쓴 글씨인데 ‘无’가 더욱 ‘하늘 천(天)’에 가깝습니다.(그림2)  

‘量’과 ‘壽’ 에서도 일부 가로 획을 위나 아래로 꺾어 단조로움을 극복하고 율동감을 살리고 있습니다. 어찌 저리 썼을까? 어찌 저리 해석했을까? 이렇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창적인 서체에서 왜 추사가 조선 최고의 서예가로 불리는지 알 것만 같습니다.

추사 김정희가 태어난 경주김씨 가문은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와 혼인하며 월성위에 봉해질 만큼 조선후기 양반가를 대표하는 명문 가문이었습니다. 월성위궁에는 매죽헌이라 하여 김한신이 평생 모은 서고(書庫)가 있어서 수많은 장서가 소장되어 있었고 김정희는 이곳에서 수많은 장서를 벗 삼아 자신의 학문을 갈고 닦았습니다. 사마시에 합격한 후 24살이 되던 1809년 호조참판인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청나라 사행을 동행하여 그 곳 청나라 문인과 학자들을 만나면서 김정희는 새롭고 넓은 학문의 세계를 접하게 됩니다.

김정희는 중국 제일의 금석학자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 당대 최고 석학 완원(阮元, 1765~1848) 등과 만나서 교류하며 최고 수준의 고증학의 진수를 접하고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귀국 후 김정희는 34세에 대과에 급제하고 관직에 진출하여 10여년간 아버지 김노경과 함께 여러 요직을 거치면서 승승장구 하였고, 그의 집안과 학문 실력으로 볼 때 그의 미래는 탄탄대로였습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였던가요? 당시 최고 세도가인 안동김씨의 공격으로 아버지 김노경이 먼저 탄핵되어 고금도에 유배되었다가 1년 뒤 귀양에서 풀려나 곧 세상을 떠났고 다음해 김정희는 병조참판에 올랐지만 곧 안동 김씨에 의해 그만두게 됩니다. 그 후 안동김씨는 화근을 없애겠다는 생각으로 10여년 전 ‘흉서’ 사건을 이용해 억지로 김정희를 옭아매어 끝임 없이 공격하고 공격하여 결국 절해고도 제주도에서도 가장 험한 곳인 대정으로 위리안치 시키고 맙니다. 여러 사람이 여론을 움직여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경주 김씨 가문의 고귀한 신분으로 살다가 낯선 풍토, 입에 맞지 않는 음식, 잦은 질병 등으로 유배생활 내내 고생했지만 무엇보다도 유배 3년째 자신을 정성껏 챙겨주던 예안 이씨 부인의 사망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부인에 대한 미안함과 장례마저 제대로 치러주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서러워 한동안 절망에 몸을 떨며 지냈습니다. 그래도 그 괴롭고 어려운 속에서도 그가 삶을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힘은 학문에 대한 무한한 열정과 초의선사 같은 벗, 그리고 우선 이상적, 소치 허련 같은 제자들 때문입니다.

그들과의 우정은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알게 된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는 말에 어울리는 참다운 관계입니다. 그런 감동적인 관계는 ‘세한도(歲寒圖)’와 같은 명작을 만들어 냅니다. 절해고도의 스승을 불쌍히 여겨 중국에서 새로운 서적이 발행되면 구입하여 먼 제주도로 보내주는 제자 이상적에게 보낸 감사의 편지 그림이 바로 ‘세한도’입니다. 명작의 탄생 배경에는 역시 훌륭한 인물들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김정희는 모슬포의 칼바람 속에서 붓을 들어 글씨를 쓰고 또 썼습니다. 그런 수련과정은 결국 자신의 마음의 때를 벗겨내는 작업이었고 불굴의 노력을 통해 추사체를 완성시켰습니다. 추사체에서 볼 수 있는 바위에 깎이고 패인듯한 서체는 바로 대정의 칼바람을 이겨냈기에 완성시킬 수 있는 글씨인 것입니다. 

제주도로 내려갈 때 쓴 ‘무량수각’ 글씨에서 어쩔 수 없이 묻어나오는 귀족풍의 기름진 서체는 귀향 후 쓴 화암사의 ‘무량수각’과 연주암의 ‘무량수’의 글씨처럼 담박하고 고졸함이 묻어나는 아름다운 서체로 변해갔습니다. 그리고 세속의 욕심과 때를 점차 씻어내었고 불교의 하심(下心)을 배워 나갔습니다. 

손태호 동양미술작가, 인더스투어 대표 thson68@hanmail.net

 

[1510호 / 2019년 10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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