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김우문, 불화의 새로운 장르를 만들다
8. 김우문, 불화의 새로운 장르를 만들다
  • 주수완
  • 승인 2019.11.05 13:19
  • 호수 15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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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적 왜곡까지 고려한 새로운 후불후벽화 세계

궁중화사로 이름 남긴 김우문
발원자 더 중시한 불교미술서
예술가로서 더 높은 대우 받아
반대 구도 등 선구적 사례 선보여
김우문 화가의 수월관음도, 일본 가가미진자 소장, 419.5×254.2㎝, 1310년.

일본 가가미진자(鏡神寺)에는 내반종사 김우문을 필두로 한화직대조 이계, 임순, 송연색 및 원외중랑 최승 등 4인이 그린 고려 수월관음도가 전한다. 서구방의 그림보다 조금 앞선 1310년에 그려진 작품인데, 그려진지 불과 9년만인 1319년에 아마도 왜구들의 약탈에 의해 지금의 가가미진자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이 수월관음도는 높이가 무려 4.19m에 달하는 대작이다. 고려불화의 크기가 대체로 그리 크지 않은데 반해 이 불화는 유독 거대하여 야외의식용 불화인 괘불화의 시초로도 추정되고 있다.

여하간 이 작품을 그린 김우문이라는 인물 역시 세속의 예술가, 그 중에서도 궁중화가로서 서구방과 마찬가지로 예반종사라는 직책이었음이 주목된다. 

수월관음도는 화기를 보면 왕실 발원의 매우 중요한 작업이었으며, 그 규모로 보건데 상당한 금액을 투자해 제작된 불사였음에도 여기에 당당히 화사로서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상당한 예우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원래 불교미술 작품에 작가의 서명을 남기는 일은 흔치 않았다. 동양미술사의 걸작이라고 전해지는 불상이나 불화들 중에 서명이 남아있어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있는 작품은 극히 드물다. 일찍부터 서예나 일반회화는 예술장르로 인정받아 작가가 작품에 이름을 남기는 경우가 많았지만, 불교미술은 심지어 그 위대한 석굴암의 조각가들조차도 어디 구석에라도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대신 불교미술은 작가보다 발원자를 중시했다. 불교미술은 작가의 기량을 뽐내기 위한 미술이 아니라 그 그림을 주문한 사람의 서원이나 바람을 이루어주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발원자의 소망 앞에서 작가들은 전면에 나서기를 양보하고, 오로지 발원자의 존재와 그 바람만이 부처님 앞에 당도하기를 바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왕실 발원자들의 이름과 함께 화가가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매우 큰 변화로 읽힌다. 이 수월관음도의 발원자는 충선왕의 숙비였던 김씨였다. 그녀는 원래 고려왕실의 종친인 최문이라는 진사와 결혼했으나 일찍이 남편이 죽는 바람에 홀로 되었다가 충렬왕의 왕후가 돌아가시자 나중에 충선왕이 되는 세자가 아버지 충렬왕의 후궁으로 들여보냈다. 그러나 이는 효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으며, 충선왕이 충렬왕을 감시하고 통제할 목적이 다분히 있었던 같다. 그리고 그렇게 충렬왕의 후궁으로 들여보낸 그녀였지만 충선왕의 마음에도 들었는지, 충렬왕이 죽은 후에는 충선왕이 다시 자신의 숙비로 삼았다. 이처럼 두 왕을 섬기고 또 숙비가 된 그녀는 왕실 내에서 상당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러한 정치적 배경 역시 이처럼 대형불사를 가능케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런 쟁쟁한 인물이 발원한 불화에 작가로서 함께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는 것은 김우문이라는 화사가단지 궁중화사로의 위계로서만 평가되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이름을 남김으로써 이 불화의 가치가 더욱 높아지게 되는, 따라서 그의 이름이 기록되는 것에 따라 발원자의 정성과 노력을 더 빛나게 할 수 있는 예술가로서 대우받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이 그려진 1310년은 충렬왕이 돌아가신지 2년 뒤이고, 이어 왕위에 오른 충선왕은 즉위 후 몇 달 있지 않아 원나라에 가서 원격으로 고려를 다스렸기 때문에 숙비 김씨도 고려 내에서 이 그림을 발원한 것이 아니라 원나라 머물면서 고려 궁정화원에게 원격으로 주문했을 가능성이 높다. 표면적으로는 돌아가신 충렬왕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전 남편 충렬왕과 현 남편 충선왕의 왕권을 놓고 벌어진 역사적 갈등관계를 돌아보면 그러기는 어려웠으리라. 아마도 원나라에 가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존재를 확실히 고려에 각인시키고 싶었던 충선왕과 숙비 김씨의 의도가 다분히 담겨있는 것 같다. 
 

마곡사 후불후벽의 수월관음도. 조선.

그러나 무조건 크게 그린다고 해도 걸 장소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 이 큰 불화는 어떤 쓰임새를 가지고 있었을까. 이 작품이 예외의식용 괘불이었을 것이라는 추정 외에 또다른 가능성도 한번 제시해보고자 한다. 이 수월관음도가 일반적인 수월관음도와 달리 구도가 반대로 되어 있는 점에서 시작한 추론이다. 일반적인 수월관음도는 화면 우측에 앉아 좌측을 바라보고 있지만, 여기서는 좌측에 앉아 우측을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이 그림은 예불자가 오른쪽에서 바라볼 것을 염두에 두고 그려졌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경우 오른쪽에서 보게 될까? 법당의 정면이 아니라 우측벽에 그려질 경우, 관음보살이 법당에 들어서는 사람들을 바라보도록 의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불화는 너무 크다. 두번째 가능성은 극락전이나 대웅전 같은 대형 전각, 그 중에서도 불상이 봉안되는 불단 뒷벽의 반대편, 즉 후불후벽이라고 불리는 곳에 걸렸을 가능성이다. 지금도 무위사, 내소사, 마곡사 등 많은 사찰 법당 뒷편에 백의관음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수월관음도는 그러한 사례의 선구적인 사례일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후불후벽에 그려지면 불단이나 탑 주변을 오른쪽으로 도는 의례, 즉 우요를 행하게 될 경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예불자가 움직이며 이 그림을 보게 된다. 만약 김우문의 수월관음도가 정말로 법당의 후불후벽에 걸기 위해 그려졌다고 한다면 이는 숙비 김씨의 발원 이전에 이미 특정 공간에 걸려야할 불화가 필요했고, 그 필요에 부응해 숙비 김씨가 비용 및 작가를 고용해 후원한 공적 성격을 지닌 발원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왕실에서 이러한 희사가 얼마나 일반적이었는지, 이런 거대한 불화가 얼마나 자주 그려졌는지 모르겠지만, 벽화로 그리면 더 적합했을 이런 대형 불화를 그린 김우문에게 이런 대작은 전혀 새로운 도전이었을 것이다. 특히 다른 수월관음도에 비해 다소 딱딱한 자세로 앉아있는 것 같지만, 작품이 거대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래서 위로 올려보면 부드러운 자세로 앉은 여타의 수월관음도와 다르지 않다. 보는 시점에서의 시각적 왜곡까지 고려한 듯한 김우문의 예술적 감각을 통해 불교회화는 새로운 후불후벽화의 세계를 열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주수완 고려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511호 / 2019년 11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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