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예수의 역설
136.  예수의 역설
  • 김정빈
  • 승인 2019.12.02 17:28
  • 호수 15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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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 인과법, 예수님께 역설적 사랑 배웠으면”

누가복음 ‘돌아온 탕자이야기’
합리적인 이치 파괴하고 있어 
죄짓고 방탕한 작은아들 우대 
인과법은 항상 적용되진 않아
그것 받을만한 이에게만 적용
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기독교 신약성서 ‘누가복음’에 ‘돌아온 탕자 이야기’가 있다. 한 아버지가 있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은 모범적이고 충실한 사람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열심히 집안일을 했다.

그에 비해 작은 아들은 바르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재산을 달라고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노력 없이 생긴 재산을 갖고 그는 외지로 나갔다. 거기에서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한끝에 가진 돈을 다 써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전에는 친구라며 가까이하던 자들이 다 떠나버렸고, 그는 결국 남의 집 하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를 먹으며 비참한 생활을 하던 그는 어느 날 문득 생각했다.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하인들도 이보다는 낫다. 나는 아버지에게 돌아가 품꾼이 되어야겠다.’

그는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향했고, 그가 돌아오자 아버지는 그를 측은이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이시여,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며 울었다.

이에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며 발에 신발을 신기라고 한 다음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라고 하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큰아들이 아버지에게 항의했다. “아버지, 저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 어김이 없었는데도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을 위하여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동생이 돌아오자 이를 위해 살찐 송아지를 잡으십니까?”

이에 아버지는 “아이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으며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네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라며 여전히 작은 아들을 편들었다.

기독교는 자신들의 사상을 ‘복음’이라고 말하는데, 이 이야기에 ‘복음’의 핵심이 들어 있다. 기독교는 건실하게 사는 사람보다는 타락했다가 회심한 사람을 더 중히 여긴다. 그것을 예수는 이 비유 설화를 통해 선포한다. 

이 이야기는 합리적인 이치를 파괴한다. 즉, 예수는 역설(逆說)의 설교자이다. 합리는 3에 3을 곱하면 언제나 9라고 말한다. 불교의 모든 설법은 이런 합리에 기초하여 짜여 있다. 공자와 소크라테스 또한 같은 입장에서 진리를 탐구한다. 하지만 예수는 다르다. 그는 3에 3을 곱하면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으며 9를 3으로 나누었는데 100이 되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죄지은 자가 공덕을 쌓은 자보다 더 우대받는 탕자의 이야기는 합리적인 사고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 불교인이 보기에 너무나도 불공정하다. 이를테면 불교의 입장은 큰아들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런 관점은 불교인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 진실이 100% 모든 경우에 다 ‘합당한’ 것은 아니다. 삶은 비합리, 초합리 한 이치를 요구할 때가 있다는 의미이다. 필자는 합리적인 이치는 99%의 경우까지만 적용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마지막 1%의 경우를 사랑으로 채워야만 한다. 사랑은 비합리 또는 초합리의 영역이다.

사람살이는 기본적으로 합리적인 정신으로써 운영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야기에 나오는 작은아들처럼 비참한 상황으로 전락한 이들이 많다. 나라 없이 떠도는 난민들, 한 끼 식사를 해결하지 못해서 굶어 죽는 아프리카 사람들, 참혹한 전쟁 또는 테러의 희생자들,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던 조선인들, 신체 결함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 등등.

그런 이들에게 합리적인 법칙은 요원히 먼 이야기일 뿐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합리적 다르마(인과법)가 아니라 초(비)합리적 사랑이다. 예컨대 그들은 점수로 치면 평균점 이하의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런 비참한 상황에서 그들이 장발장처럼 빵 한 조각이나 은촛대 하나를 훔쳤다고 해서 그들을 법(다르마, 인과법)대로 정죄(定罪)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법대로 판결할 경우 그는 어김없이 감옥에 가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미리엘 신부는 장발장을 용서했고, 그러자 장발장에게서 천지개벽 같은 내적 변화가 일어났다. ‘죄인’이었던 그가 한순간에 ‘성자’로 거듭난 것이다. 이 비약이 선(禪)이 그토록 강조하는 돈오(頓悟)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돈오라는 영적인 급성장은 반드시 선이나 명상으로써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으로써도 일어난다. 그것을 기독교 역사는 웅변하고 있다. 물론 불교가 제안하는 명상은 위대하고, 그를 통해서 우리는 영적인 발전을 한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그 ‘지성인의 길’ 아닌 ‘감성인의 길’도 있다.

여기에, 장애가 있는 아들을 둔 어머니가 있다고 하자. 그때 한 불교 선지식이 그녀에게 다가가 “당신의 아들이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은 그가 전생에 그럴 만한 업을 지었기 때문이오”라고 말한다고 해보자. 그것이 과연 그 어머니에게 힘이 되겠는가.

그래서 보살은 인과법의 적용을 잠시 그치고 그녀를 위해 울어 줄 것이다. 그것이 “법에도 인정이 있다”는 말과 궤가 같음은 물론인데, 판사로서 재판에 인정을 도입한다는 것은 법과 기준을 왜곡하거나 파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그것이 법의 왜곡이든 파괴이든 간에 인간사에는 그런 부분이 필요할 때가 있다.

인과법은 아무 때나 어느 곳에나 적용되는 진실이 아니다. 인과법은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정황에 있는 사람, 자기 몫의 삶을 일인분 이상(1.0 이상)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적용되어야 한다. 그 이전의 사람, 즉 이웃으로부터 사랑, 배려, 격려, 도움이 필요한 사람(1.0 미만) 앞에서 우리는 인과법의 적용을 잠시 중지해야만 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그를 위해 부족한 부분을 사랑으로 채워 주어야만 한다. 정리하면, 한 아버지로서 우리는 먼저, 큰아들이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데 대해 인과법을 적용하여 응당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 이 원리를 99%의 경우에 적용한 다음, 작은 아들을 만났을 때는 마지막 1%로서의 사랑법을 적용해야만 한다. 부처님으로부터 합리적인 인과법을 배우자. 그리고 예수로부터 역설적인 사랑을 배우자. 이 두 입장을 잘 조화시켜 멋지고 활달한 신대승(新大乘) 불교를 열자. 불교를 더 넓히자. 더 역동적인 것으로 만들자.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515호 / 2019년 12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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