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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총림 방장 지유 스님 기해년 동안거 해제 법어

  • 교계
  • 입력 2020.02.12 13:12
  • 호수 1524
  • 댓글 1

오늘 벌써 삼동 결제를 하고 마지막 해제 날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선문에 들어와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 마음먹고 결제날 시작해서 오늘까지 벌써 석달이 지나갔습니다. 석 달이 지난 오늘 지금 이 시각에 나의 몸과 마음이 석 달 전 결제 때와 비교해 볼 때, 석 달 전에는 몸도 형편없었고 마음도 그랬던 것이 용심을 잘하고 몸도 잘 쓰고 하면서 건강하지 못하고 좋지 못했던 몸이 건강해지고, 마음도 편치 못하고 괴롭던 것이 괴로움이 없고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면 아마 성취했다고 봐야 하겠지요.

우리는 ‘공부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공부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불법에서는 몸과 마음을 닦는 것이 공부입니다. 몸과 마음을 닦는다고 하는 것은 몸도 잘 써야 하고 마음도 잘 써야 합니다. 잘못된 몸이 있습니다. 몸이 병이 낫거나 몸에 지장이 있을 때입니다. 그렇다면 그 병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고 원인을 바로 알았으면 원인을 제거하면 몸이 바로 될 것입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괴롭고 고통스럽고 답답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 괴롭고 답답한 것입니까? 마음이 답답하다고 하는 것은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잘되지 않고 원하는 것이 원대로 되지 않고 알고자 하는 것이 알아 지지 않을 때입니다. 물론 자기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만 알고자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무엇을 알고자 하고 있습니까?

선문에 들어온 사람은 밖의 물체를 알려고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불법의 진리가 무엇인가, 어떤 것이 도인가, 도라고 하고 진리라고 하고 불법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알고자 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이 책도 보고 저 책도 보고 남의 말도 들어보고 선지식의 법문도 들어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이름을 불법이다, 도라고 하고 진리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도, 진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과거 조사 스님의 법문을 들어보면 마음밖에 도가 없고 마음밖에 진리가 없고 마음밖에 불법이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마음이 바로 도이고 진리이고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무엇이겠습니까?

몸은 우리가 눈, 코, 귀가 있고 손과 발이 있고 앉아 있고 서 있는 이것이 나의 몸입니다. 몸이 잘못되었다고 하면 바로 해야 할 것입니다. 몸은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져 볼 수도 있고 반듯하다, 비틀어졌다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마음이 도라고 했고 마음이 진리라고 하였고 마음이 불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마음을 모르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동물이나 짐승 미물, 고충까지도 마음이 없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 마음이 도이고 진리라고 한다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곧 자기 자신 아니겠습니까? 결국, 자기 자신이 곧 도이고 불법이고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진리며 도이며 불법을 찾는 것입니까?

마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소리가 나면 종소리인 줄, 목탁 소리인 줄 알아차리는 것이 마음 아닙니까? 찬 것이 오면 찬 줄 알고 더운 것이 오면 더운 줄 알지요. 이렇게 알고 있는 놈이 바로 마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각자 자기입니다. 이것은 땔 수도 없습니다. 엎어지고 자빠지고 화가 나고 괴로워하고 온갖 시기 질투를 하더라도 이 마음은 여읠 수 없습니다. 엎어져도 마음이고 일어서도 마음이고 괴로워도 마음이고 즐거워도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답답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어떤 사람은 같은 마음인데도 괴로워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구나 찬 것이 오면 찬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압니다. 이때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은 너무 더우면 덥지 않도록 애를 쓰고 너무 추우면 춥지 않도록 애를 씁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미물 곤충도 자기 용심을 합니다. 똑같은 마음인데 어떤 자는 일상생활에서 항상 답답하고 괴롭고 불안합니다. 더우면 더워서, 추우면 추워서 괴롭습니다. 그런 사람이, 답답하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고 불안하지 않다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그럴까 하고 찾아가서 물어봅니다.

“나는 이러이러할 때는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이럴 때 당신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어보면 그 사람은 “당신은 무엇 때문에 괴롭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괴로운 사람은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것이 해지지 않고 구하고자 하는 것이 구해지지 않고 알려고 하는 것이 알아 지지 않아서 괴롭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그런 것으로 괴롭지 않습니다. 무엇을 구하고자 합니까? 여러 가지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면서 나름대로 답답하고 괴로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신처럼 답답하고 화가 나고 괴로웠습니다. 그랬던 것이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까 하고 나름대로 생각도 많이 하고 연구했는데, 스스로는 안되어서 어떤 선지식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 몇 마디 주고받고 설명을 듣다 보니 제가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당신이 말한 대로 일체 괴로움이 없어졌습니다.”

그 구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세속 사람들은 명예랄지 권력이랄지 재물이라고 하는 것을 구하려 해서 구해지지 않으면 괴롭겠습니다만, 우리 출가인들은 그런 것은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출가인은 다른 것을 구하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진리, 도가 뭐냐 하고서 나의 주인공, 자성이라고도 하고 각자 자기 나름대로 선문에 들어와서 어떤 선지식을 찾아서 공부의 길을 묻자 화두를 하나 얻었다든지 마음 깨닫는 방법을 듣고서 열심히 자기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그것이 자기 노력한 대로 쉽게 깨달아지고 터득했다고 하면 편안한데 아직 의문이 풀리지 않고 알고자 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자기 나름대로 도저히 안 되면, 그때는 혼자 몸부림치지 말고, 밝은 선지식 찾아가서 한마디 질문한다든지 물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과거 선지식도 자기 나름대로 몸부림을 쳐도 안 되니까 밝은 선지식 찾아가자마자 말 한마디 듣고 알아차렸다는 그런 말 들어보지 않았습니까?

이 사람의 답도 그런 의미입니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너무 답답해서 누구를 찾아가서 여차여차 질문했더니 그의 말 한마디로 알아차렸다, 무엇을 알아차렸는지 궁금하시지요? 상대방이 궁금해하자, 그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제가 당신을 위해서 말씀을 드리면, 당신이 이 말을 믿을지 안 믿을지 그것이 의문입니다.”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선문에도 있습니다. 선사를 찾아간 수행자가 “솔직히 일러주십시오.” 하는 말과 같습니다. 대답은 이렇습니다. “정말 내 말을 믿겠습니까? 그대가 바로 부처님입니다.”

네가 바로 부처님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이 말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개개인이 모두 부처다, 왜 부처가 부처를 찾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부처라고 하면 깨달은 사람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고민이고 답답함과 괴로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질문하는 이는 불안하고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불안하고 답답하고 괴로운 것은 무엇 때문에 그렇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이 알고자 하는 것이 알아 지지 않고 깨치고자 하는 것이 깨쳐지지 않기 때문인데, 도대체 얻고자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불법이니 도이니 진리니 하는 것은 다만 명칭이지, 마음밖에 도가 없고 마음밖에 진리가 없고 마음밖에 불법이 없다는 말은 곧 마음이 도이고 진리이며 불법이라는 말인데 당신 무엇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몸은 육신을 몸이라고 합니다. 마음은 무엇이 마음이라고 합니까? 조용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은 분명 있지만, 물건과 같지 않아 형태가 없어서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있긴 있는데 보이지 않고 있긴 있는데 잡을 수 없는 것은 마음이 그렇게 생긴 것입니다. 마음은 물질이 아닙니다. 물질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에 크고, 작고, 색이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형태가 없기에 없는 데가 없습니다. 산에 가면 산, 물에 가면 물, 방안에 들어오면 방안, 방 밖으로 나가면 방 밖, 괴로우면 괴로움 속, 즐거울 때는 즐거움 속에 있습니다. 어느 장소, 어느 시간, 어떤 형태를 하고 있더라도 마음을 떠나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마음을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이러쿵저러쿵, 소리가 나면 소리가 나자마자 이러쿵저러쿵, 사람들이 오면 사람들이 오는 것을 알자마자 이러쿵저러쿵, 앞에 물체가 오는 것을 알자마자 이러쿵저러쿵합니다. 이러쿵저러쿵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항상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생각하는 자체가 마음 아닙니까? 마음은 자기 스스로가 마음이면서 자기 마음을 깨닫고자 해서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진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이러쿵저러쿵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목표를 세워놓고 생각을 집중한다고 하고 있지만 금방 밖에 소리가 나면 소리에 따라서 이러쿵저러쿵 또 외부에 한계에 부딪히면 이러쿵저러쿵하면서 마음은 항상 사량분별 하다 보니, 사람이 결국 답답하다고 하는 것은 깊이 생각해 보면, 마음속에 온갖 복잡한 생각이 가라앉지 않고 마음 전체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같은 마음인데 하나는 답답하고 하나는 답답한 것이 없습니다. 답답하지 않은 사람은 여태까지 몰랐던 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아직 모르고 무엇을 몰랐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이 무엇이겠습니까? 마음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이러쿵저러쿵 생각하고 있는 놈입니다. 그 생각이 마음은 아닙니다.

마음은 바로 자기입니다.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있다가 사라집니다. 생각을 자기라고 한다면, 생각이 사라지면 내가 없어졌다고 해야 하겠지만 생각이 사라져도 내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에 사로잡혀 버릴 뿐 생각 속의 자기 진체를 모르고 있습니다.
“당신 말대로, 나도 옛날에는 그렇게 고민했던 것이 어떤 밝은 선지식의 말 한마디를 듣고 보니 내가 깨달았다고 해서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 사실, 이 내용을 당신도 갖고 있습니다. 당신은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알았다고 해서 없던 것이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이냐, 정말 그대가 내 말을 믿을지 모르겠지만, 그대가 믿거나 말거나, 소리가 나면 소리인 줄 알고 찬 것이 오면 찬 줄 아는 이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깨달아서 비로소 아는 것이 아닙니다. 깨닫기 전에도 찬 것이 오면 찬 줄 알고, 뜨거운 것이 오면 뜨거운 줄 압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이 말을 믿겠습니까? 사람뿐만 아니라 미물 곤충까지도 다 압니다. 그런데 이것을 확인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피식 웃고 맙니다. 하지만 이것을 제쳐놓고 따로 진리, 불법, 도, 깨달음을 찾는다면 천년만년 쫓아다녀도 그런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육조 스님을 쫓아간 도명 선사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저는 의발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로지 불법을 구하러 왔습니다. 원컨데 저를 위해서 한마디 일러 주십시오.” 그랬더니 당시 육조 스님, 노행자께서는 이런 법문을 하셨습니다. “선도 생각지 말고, 악도 생각지 말아라. 이럴 때 마음을 나에게 한번 보여 주시오.” 선도 생각지도 말고 악도 생각지 말아라? 악을 생각하면 말 안 들으면 바로 빼앗겠다, 이런 모진 마음도 버리고, 불법을 배우겠다는 선한 마음도 내어 버려라, 이때 마음을 보여달라 하니 이때 도명 선사가 홀연히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깨달았는가 물었을 때, 여러분도 너무 잘 아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물을 마심에 입에 대면 차면 찬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압니다.”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육조 스님도 “잘 알았구나.” 합니다. “과거 부처님도 이것을 깨달았고 나도 이 문중에 와서 이것을 깨달았고 당신도 이제 내 말을 듣고 이제 알았다.”

그런데 깨달은 사람만 그러합니까? 깨닫지 못한 사람도 차가운 것이 오면 찬 줄 알고 뜨거운 것이 오면 뜨거운 줄 압니다. 깨달음하고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깨달은 사람만이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이 이것이구나, 그렇게 해서 다른 일체 생각이 딱 끊어져 버립니다.

도명 선사가 너무 감격해서 눈물을 흘립니다. “제가 오늘까지 오조 스님의 회상에서 20여 년 동안 잠도 안 자고 계율도 철저히 지키며 수행했지만, 아직 이 마음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만일 노행자께서 나에게 한마디 일러주지 않았더라면 제가 지금까지 공부해왔던 것을 앞으로도 수백생 되풀이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질문이 있었지요. “그러면 불법이 이것 말고 또 다른 것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노행자, 육조 스님은 “이것뿐이다. 있다고 하면 여기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그대가 믿으면 부처님과 한 몸이 될 것이고 믿지 못하고 의심하면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진다. 의심치 말고 그대로 믿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성취(信成就)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는 수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확인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앉아 있으면, 종소리가 나면 종소리인 줄 알고, 목탁 소리가 나면 목탁 소리인 줄 압니다. 찬 바람이 불면 찬 줄 압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몸을 단정히 앉아서 눈 뜨고 가만히 앉아 벽을 보면 벽이 보입니다. 이때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것을 마음이라고 합니까? 어떤 것이 마음이냐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 나인가 하는 말입니다. 벽을 보고 있을 때, 벽이 나입니까? 아닙니다. 벽을 보고 있는 것이 자기입니다. 종소리가 나면 종소리가 나입니까? 아닙니다. 종소리는 남입니다. 나는 무엇인가, 종소리 듣고 있는 놈입니다. 종소리는 오면 가는 손님입니다. 어떤 물체가 오게 되면 내가 아니니까 남입니다. 손님이 오고 가고 하지만 나는 오고 가지 않습니다. 가만히 벽을 눈뜨고 있으면 바깥에 소리가 나면 어린아이가 울면 어린아이가 우는구나, 벽을 보고 있으면 벽이 눈에 들어옵니다. 천 번, 만 번 생각해도 이것이 자신입니다.

그런데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앞의 벽을 대하면서 이러쿵저러쿵 온갖 생각을 하게 되어서 눈앞의 벽이 자신의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밖에 어떤 소리가 나도 생각에 사로잡히면 무슨 소리가 나는지 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피곤해서 잠에 빠져 버리면, 벽이 보이지 않습니다. 종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종소리가 들리고, 앞의 물체가 보인다고 하는 것은 내가 졸지 않았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을 비웠기 때문에, 마음속의 모든 생각을 탁 털어버렸기 때문에 종소리도 귀에 들어오고 앞의 물체도 눈에 들어옵니다. 그것은 무심(無心)이 되었을 때 벽이 보이고 종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잠깐 앉아 있어도 나도 모르게 깜박 졸음에 빠집니다. 나도 모르게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지는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 해서 졸리면 졸리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할 것이고, 쓸데없는 생각이 일어나면 거기에 끌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을 용심(用心)이라고 합니다. 만일 이것이 확실하게 의심 없이 알아차렸다고 한다면, 일상생활에서 용심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옛말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가소롭다. 가히 우습도다, 소를 찾는 자여, 소를 타고 있으면서 소를 찾으니 우습구나.”

소를 찾는다는 것은 마음을 찾는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깨치고자, 마음을 알고자 찾는 것이 우습다는 말입니다. 마치 물속에 있는 물고기가 물을 찾기 위해서 동서남북 찾아 헤매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치고 바쁘게 쫓아다녔지만, 물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동기에 모든 생각을 쉬어버리니, 내가 물속에 있으면서 물을 찾고 있었구나, 이렇게 알았을 때, 그때는 용심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을 잊어버립니다. 물을 잊어버린다 해서 물 밖에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엎어져도 자빠져도 물 속입니다. 물을 잊어버렸다고 하는 것은 물과 하나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어떻게 찾습니까? 마음을 잊어버리면 됩니다. 마음을 잊어버린다고 해서 마음이 어디 갑니까?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잡히지만 않으면 됩니다. 마음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몸도 잊어버리고 마음도 잊어버리면 신경 쓰이는 일이 없습니다.

“일체 생각을 여읜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말씀이 ‘금강경’에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말 역시 수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아무 생각하지 않고 앉아 있어 보면, 특별히 생각하지 않아도 눈 뜨고 있으면 여기 여러 명이 있다는 것을 환하게 알고 있지요? 촛불이 켜져 있는 것도 알고 있지요? 모르는 사람은 틀림없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거나, 졸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생각하지 않고 졸지 않고 있으면 틀림없이 현실과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선문에도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불법은 특별한 것이 없다. 배고플 때 밥 먹으면 되고, 목마를 때 물 마시면 된다. 일할 때 일하면 되고 피곤하면 쉬었다가 하라.” 그것이 용심입니다. 몸도 적절하게 쓸 때 쓰고 앉을 때 앉고 일할 때 일하되 너무 과도하면 병이 납니다. 섰을 때도 기본자세가 있어야 옆으로 기울어지지 않습니다. 앉을 때도 똑바로, 섰을 때도 똑바로 하고 일할 때 구부려야 할 때는 구부리되 피곤하다고 해서 그냥 잠들어버리면 몸이 굳어버립니다. 일단 굽어 있던 몸을 좌선할 때처럼 쫙 펴고 정자세로 이루고 난 이후에 잠들어도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몸이 좋지 않고 마음이 좋지 않다고 하면 몸의 어딘가 비틀어져 있거나, 또 음식도 그렇습니다. 적절하지 못하면 몸에 반드시 무리가 와서 병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도 적절하게 움직이는 사람은 몸의 나쁜 병이 스스로 없어질 것이고, 마음에 고통스럽고 괴로웠던 것도 용심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불안하던 마음이 불안한 것이 없습니다.

여태까지 그렇게 헤매고 있던 자신이, 육조 스님의 법문대로, 한 생각 놓고 보니, 놓든 놓지 않든 찬 것이 오면 찬 줄 안다, 더운 것이 오면 더운 줄 안다, 바로 이것인 줄 알게 됩니다. 이것을 알기 전에 온갖 생각으로 구하고자, 알고자, 얻고자 했던 것이 아직 남아있으면 그것은 저절로 가라앉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나 깨닫지 못한 사람이나 똑같이 차면 찬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알면서도 무엇이 차이가 있는가, 용심이 틀립니다. 이것을 확인하지 못한 사람은 무엇인가 마음속에서 여전히 얻고자 구하고자 하고 얻어지지 못하고 구하지 못하니까 답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확인한 사람은 그것이 필요 없습니다. 일체 일할 때 일하면 되는 것이고, 쉴 때 쉬면 되는 것이고, 예불할 때 예불하면 되는 것이고, 손님이 오면 손님과 얘기하면 되는 것입니다. 특별한 용심이 따로 없습니다. 자연 그대로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이 이해됩니까? 이해 안 되는 분이 있습니까? 이해되었다고 하면 정말 맞는지 실천해야 합니다. 일할 때는 부지런히 일하고 일이 딱 끝나면 조용히 앉아 보십시오. 가만히 앉아 있어 보면, 눈뜨면 앞에 벽이 보이고 종소리가 나면 종소리인 줄 아는 것이 바로 자신입니다. 여기에 이러쿵저러쿵 생각하다 보면 마음속의 환상이나 생각 속에 묻혀 답답합니다. 그것을 탁 놓고 보면 눈앞이 저절로 들어옵니다.
청산첩첩미타굴(靑山疊疊彌陀窟) 창해망망적멸궁(滄海茫茫寂滅宮),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것이 무심이라고 하겠습니까? 마음속의 온갖 생각을 탁 털어버리면, 앞의 벽이 보이고, 창밖의 푸른 산이 보입니다. 그것이 무심입니다. 보이지 않는 이유는 복잡한 생각이 가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탁 털어내어야 합니다. 그래서 조주 스님께서는 “뜰앞의 잣나무”라고 했습니다. 너무 간단합니다. 너무 간단해서 여러분이 믿을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지속하게 되면 마음이 편안합니다. 몸도 나빴던 것이 몸도 편안해지고 마음도 답답했던 것이 마음도 편안해지고, 어제보다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아집니다. 몸과 마음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몸은 마음의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답답하면 몸도 병이 나고, 마음이 상쾌하고 밝으면 몸은 마음의 그림자라고 했기 때문에 몸도 같이 좋아집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닙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용심 잘했다, 몸도 잘 썼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누가 봐도 부러울 정도로 단정한 몸으로 바뀔 것입니다.

제가 조금도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과거 부처님, 조사 스님께서 말씀하셨고 저도 제가 느낀 대로 사실대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것을 믿느냐 못 믿느냐의 차이입니다. 일상생활에 의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깨달았다는 새삼스러운 지혜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차면 찬 줄 아는데 얻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수행자는 거기에 의지해서 앞에 장애물이 없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성불한다고 합니다. 너무 간단합니다.

얻었다는 것도 가짜입니다. 잃었다는 것도 가짜입니다. 얻은 것이 없다, 잃은 것도 없다는 것이 진짭니다. 잃어버린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차린 것을 이름 붙여서 얻었다고 한 것이고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잃어버렸다고 한 것이지 실은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2월8일 금정총림 범어사 보제루에서 봉행된 불기 2563년 금정총림 범어사 동안거 해제 법회에서 방장 지유 스님이 설한 내용입니다.

 

[1524호 / 2020년 2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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