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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수기 당선작] 우리 부부에게 닥친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 부처님 가피로 극복

기자명 법보

법보신문 사장상- 강문순

남편은 신혼 때부터 간경화로 고통…여동생 간 기증으로 기사회생
행복도 잠시 이번엔 내가 신장병 쓰러져…조카 사위 덕분에 살아
여동생․조카사위가 우리에게 온 보살…부처님께 의지한 세월 감사

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나의 재적사찰은 충남 서산 부석사이다. 할아버지를 따라 절에 가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불자가 됐다. 중학교 3학년 어느 여름날 할아버지는 “시집가서도 부석사를 큰집으로 알고 다녀라”하시면서 매미 울음소리와 함께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남들 대학 다니는 스무 살에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이 부러워 갈피를 잡지 못할 때는 기도보다는 부처님께 투정부리기 위해 절을 찾았다. 

남편은 둘도 없는 효자였다. 인연이라서 그랬을까? 신혼여행에서 남편의 얼굴을 보니 유난히 검었다. 원래 피부색이냐고 물으니 시아버지가 간경화로 돌아가셨고 남편도 간염보균자라고 했다. 검사해보니 GOT, GPT 수치가 높았다. 결혼생활은 그렇게 시작됐고, 신혼이 뭔지도 몰랐다. 남편의 간 기능 손상은 계속 진행됐다. 지점장으로 발령받아 2년 정도 근무했을 무렵. 친목모임에서 남편이 코피를 쏟더니, 멈추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간경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법당에 올라가 한바탕 울었다. 대답 없는 부처님은 내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바보같이 빙그레 웃었다.

부처님께 매달렸다. 내 남은 생을 절반으로 나누어 제발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신장내과 진료를 받던 나는 내 간을 기증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불가능하다는 단호한 대답을 들어야했다. 희망이 사라지고 불확실한 미래에 지쳐갈 무렵 교회 다니는 셋째 형님 아들인 조카가 기증하겠다고 했다.

남편과 나는 펄쩍펄쩍 뛰면서 감사하다고 부처님 가피라며 엉엉 울었다. 병원서 적합판정을 받던 날 조카가 안쓰러워 차마 저희는 소식을 전할 수 없어 망설이던 차에 셋째 형님께서 전화를 줬다. 결과를 말씀드리고 형님 댁에 가겠다니 오지 말라는 냉랭한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하면서도 별일이 아닐 거라 남편을 다독였다.

한동안 소식이 없던 형님은 남편에게 기도원을 다녀오라고 했다. 복수가 차 거동도 못하는 남편은 눈치 보느라 짐을 싸야 했고 1주일 후 형편없는 모습으로 돌아온 남편을 보며 잘못도 없는 부처님을 원망했다. 부흥회 한다고 교회 나오라 하여 남편은 복수찬 배를 부여잡고 열심히 참석했다. 부흥회가 끝날 무렵 돌아온 남편은 대성통곡을 했다. 이유를 물으니 시숙께서 간 기증을 못 해준다고 했다고 한다.

울지말라 했다. 부처님이 계시니 살려주실 거라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릴 테니 포기하진 말라고 남편에게 큰소리쳤다. 그리고 그날부터 새벽마다 ‘금강경’ 3독과 관세음보살 정근으로 기도를 시작했다.

형님은 교회 권사 두 분과 사무실로 찾아왔다. 하느님이 고쳐주신다고 교회 나오라고 2시간을 설득했다. 저는 세 분이 절에 나오시면 교회 나가겠다고 말씀드렸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진료 받으러 가니 종양 여러 개가 자리하고 있다고 했다. 조카기증은 무산되고 악성종양이라는 진단에 어찌할 바를 몰라 병원 대기실에서 엉엉 울었다. 지나는 사람들의 안쓰러운 눈길도 의식을 못 한 채 한참을 우는데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동생은 자신의 간을 기증할 테니 검사예약을 하라고 했다. 

여자임에도 간의 크기가 커서 이식에 문제가 없음이 부처님의 뜻이었을까. 동생의 딸은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은 5살로 엄마의 손길이 가장 필요한 시기였다. 동생은 제부와 시부모님의 허락으로 간 기증을 준비했다. 2002년 6월23일 아침 7시 수술실에 들어가 12시간 만에 남편은 무균실에, 동생은 중환자실로 이송되었다. 수술실에 들여보내고 병원 안 법당에서 남편을 살리고 싶은 욕심에 동생의 호의를 거절하지 못하고 고생시킨 잘못을 참회하면서 두 사람 모두 무사히 제 곁에 돌아올 수 있기를 기도했다. 무균실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드는 남편을 보니 감사한 마음에 눈물이 쏟아졌다. 수없이 매달린 링거와 복부에 대형밴드를 붙인 채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동생을 보니, 제 욕심만 부렸다는 죄책감에 아무런 이야기도 못하고 그저 용서만을 빌었다.

장기이식은 수혜자보다 공여자가 훨씬 더 고통스럽다고 한다. 그런데도 동생은 미안하리만큼 잘 견뎌줬다. 두 사람은 건강을 회복했다. 남편은 복직했고 동생도 며느리와 아내, 엄마의 역할을 잘하고 있다.

남편의 건강이 회복된 뒤로는 매일이 부처님께 감사한 날들이었다. 14년 동안 신도회 총무일을 보면서 비어있는 찻집을 주지 스님 허락 하에 운영했고 수입 전액을 불사에 회향했다. 108산사성지순례단장을 맡아 제주도 약천사와 관음사 성지순례에 80명이 동참했고 노 보살님들의 건강까지 챙겨주신 부처님 덕분에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다. 

장대비가 쏟아져 봉정암 순례길이 통제되었으나, 부석사 성지순례단이 백담사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그쳐 무사히 오를 수 있었음은 오로지 부처님 가피였다.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방송통신대학을 졸업하고 서광사 불교대학에 입학, 도반들과 부처님 법을 공부하고 포교사시험에도 합격했다. 다시 대한불교조계종 디지털 불교대학원에 입학하여 신행상담 전문포교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래서 웃을 날만 남은 줄 알았다. 꽃길만 걸을 줄 알았다. 그러나 작은아이가 5살 때 내 몸에 발병한 막성사구체신염이 점점 악화됐다. 그리고 2018년 구정을 2일 앞두고 사무실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신장기능이 20%도 남지 않았다. 응급으로 서혜부 쪽에 관을 삽입해 투석을 시작했고 연휴가 끝나자 목으로 다시 관을 삽입하고 손목에 동정맥류을 연결하는 시술까지 받았다. 그리고 혹시 모를 이식준비를 위해 필요한 검사까지 받은 후 15일 지나 퇴원했다.

1주일에 3번씩 4시간에 걸친 투석은 머리가 깨질 듯 아픈 고통을 동반했다. 남편은 그만 명퇴하라 했지만 나는 병가를 활용, 아침 7시에 투석을 시작해 11시에 끝내고 오후 1시부터 근무를 시작했다. 

5월 어버이날 즈음 투석 받고 출근하니 조카딸이 조카사위와 손주를 데리고 꽃바구니를 가지고 사무실로 찾아왔다. 조카딸은 머리가 아파 힘들어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울기만 했고 조카사위도 말없이 바라보다 돌아섰다. 나는 너무 힘들어 밥도 못 먹여 보냈다. 결혼 당시 유치원에 다니던 조카딸은 엄마가 멀리 떠나, 내가 엄마 대신, 딸이 없는 나에겐 딸 대신 살아온 지 32년 되었다.

1주일이 지나자 퇴근한 남편이 조카사위가 신장을 기증한다고 검사해보자고 했다. 깜짝 놀라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다. 여동생의 간 기증으로 건강을 되찾은 남편이지만 평생토록 동생에게 미안해하며 혹여 동생이 아플까 노심초사했던 나의 마음으론 조카사위의 신장 기증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다음날 조카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검사만 해 보자고 안 맞을 수도 있으니 검사만 해보자며 오히려 울고불고 야단이었다.

퇴근 후 남편의 설득에도 대답하지 않으니 조카내외가 찾아왔다. 조카사위가 맞지 않으면 큰 조카와 조카며느리가 검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부처님을 찾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금강경’ 기도와 정근을 했지만 그래도 부처님이 허락하시면 검사를 하겠다고 여쭈니 그날은 부처님이 유난히도 환하게 웃으셨다. 지금도 이상하리만치 그리 환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 뵌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용기를 얻었고, 또 조카사위의 진중한 모습에 검사를 예약했다. 검사결과 후 적합판정이 났고 국가 승인절차를 거쳐 12월19일 이식수술을 받았다. 국가승인을 신청하니 담당하는 사회복지사가 조카사위가 기증하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가족이 아니니 관련된 모든 자료를 가져오라 했다. 남들이 제출하는 서류의 세배는 준비한 것 같다.

기증 동기를 묻는 사회복지사에게 조카사위는 “제겐 장모님과 똑같다”고 대답해줬다. 그 말이 너무 고마워서 한바탕 눈물이 쏟아졌다. 수술에 대한 불안함은 부처님 손에 맡긴 터라 걱정은 없었다. 다만 조카사위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어찌할 줄 몰라 아침 일찍 병원 법당을 찾았다. 주지 스님께서 연꽃 한 송이를 주셨다. 회복하는 과정에서 새벽마다 조카사위를 위해 기도했다. 조카사위는 5일 만에, 나는 10일 만에 퇴원했다. 집중실을 나와 2인실에서 이틀을 제외하고 퇴원할 때까지 혼자 사용을 했으니, 큰 목소리로 경전을 읽고 정근 하는데 걸림이 없었다. 

어려서 할아버지 덕분에 부처님을 만날 수 있었다. 비록 남들은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하는 큰일을 두 번씩이나 겪었다. 그러나 부처님 가피로 건강을 되찾았고 훌륭한 스승님 아래 공부와 기도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른 욕심은 없다. 나는 내년 6월에 퇴직하면 여동생과 조카사위를 위해 기도하면서 직장과 건강의 이유로 제대로 활동하지 못한 포교사와 신행 전문포교사, 108여성 불자회, 7교구 신도회 활동을 계속하고 또 부석사에 금동관세음보살좌상이 돌아오길 기도하며 절에서 사시사철 풀 뽑고 낙엽도 쓸며 부처님께 공양을 올릴 수 있기를 서원했다.

어찌 헤쳐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부처님이 계셨기에 그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살아날 수 있었다. 끝까지 주저앉지 않고 미래를 향해 걸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경전이 낡아 다 해졌지만, 부처님이 그곳에 계시고 내 삶이 오롯이 그 경전에 있기에 끝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1540호 / 2020년 6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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